어머니와 여자
Author
함창석
Date
2024-07-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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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
어머니와 여자
함창석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 2:1-5)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남성과 여성이 주류이나 간혹 게이나 레즈비언같이 양성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여성은 암컷의 동물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여성 중 직접적으로 자기를 낳아 줄 경우 생태학적인 어머니라 부르게 된다. 생태학적이 아니라고 하여도 자기를 양육하여 준 여성을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모, 시모, 고모, 이모, 숙모, 백모, 외숙모, 대모, 신모 등과 같이 간접적 어머니도 있다.
어머니는 목회자와 같기도
어머니는 이스라엘의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가부장적 사회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주된 역할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아이를 낳는 일은 매우 큰 기쁨이었으며(시 113:9; 사 54:1),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는 매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예. 삼상 1:4-11). 비록 고대 이스라엘이 부계 중심사회였으나, 지파들의 족보를 살펴보면 모계 중심적인 면도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참조. 레아와 라헬의 자손들은 첩인 빌하와 실라의 자손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예. 창 46:8-25; 49:3-27; 민 1:5-15, 20-43; 2:3-31; 26: 5-50; 참조. 신 27:12-13; 33:6-21). 히. '에므'는 실제적인 어머니뿐만 아니라, 할머니(왕상 15: 10)나 여자 조상(창 3: 20; 24:60) 또는 여자 사사(삿 5:7)를 가리키는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는 불렀으나 '어머니'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속성이 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시 131:2; 사 49:15; 마 23:37).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아니한 까닭은, 아마도 고대 가나안족들이 섬기던 여신들(이들은 대개 다산이나 풍요의 신들로 섬김을 받았음)과 혼돈을 피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어머니로 묘사하였다(예. 사 50:1; 계 12장; 참조. 갈 4:26).
여자는 일반목사와 같기도
Ⅰ. 구약
인간 창조에 관한 창세기의 두 기사는 여자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 서로 다른 특성들을 나타내고 있지만, 남성과 여성을 주의 깊게 언급하고 있다. 비평학자들에 의해 더 초기의 것으로 판단된 창 2:4-3:24을 보면 처음에 남자가 창조되고, 그 다음에 남자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식물, 그 다음으로 그에게 맡겨줄 짐승이 창조된다. 이 피조물들은 어떤 직무에 적합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의 돕는 배필이 되게 하신다. 이것은 여자가 그의 종이 되는 것처럼 종속적인 관계로 맺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 '에제르'("돕는 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구약에 30회 가량 나온다. 하나님 자신과 관련하여 29회를 사용하시고 다윗 왕에게 한번 사용된다. 그러나 '첼라'("갈빗대"또는 "옆구리")는 "넘어지게 하는 것"(stumbling, '첼라')을 뜻하는 것과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돕는 배필이 남자의 몰락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쓰인 것이다. 사실 아담(3:12)과 하나님(17절)이 하와를 비난하고 있고, 후기 유대교와 기독교도 그녀에 대해서 '아담으로 하여금 범죄케 한 유혹자'라는 여자관을 갖게 된다. 남녀가 서로 같은 동료로서 창조되었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시키신다(16절). 그것은 성관계(2:24), 옷을 입는 것이나(3:7,21), 죽어야하는 운명(19절),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문제(14절)의 근원을 설명하는 원인론이 되는 이야기의 해석과 일치된다. 창 1:1-2, 4 상반절에 나타나 있는 다른 창조 기사는 남자와 여자가 여섯째 날에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기록한다(1:27-28). 여기서는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종속된다는 지시가 주어지지 않으며, 양자가 그 나머지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한다고 기록한다. 남자와 여자가 다시 대등한 관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곳이 있다. 즉 월경 중에와 그 이후의 의식적 불결에 관한 일련의 법들에 관한 언급에서다(레 15:19-33). 이것은 정액 배설에 관한 법들과 함께 언급된다(레 15:1-18). 다른 율법을 보더라도 히브리 문화가 전적으로 족장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약서(출 20:22-23:33)는 첩으로 팔린 여자가 그 주인을 기쁘게 해주지 못할지라도 그 여자의 권리를 보호해 주고 있다. 즉 그녀가 제대로 대우받아야 되거나 자유롭게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21:7-11). 그러나 또 다른 법은 여자를 소유의 범주에 속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만약 남자가 약혼할 의사가 없이 여자를 유혹하면, 그는 신부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와 결혼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만약 유혹한 자의 성격이 악하여 그 여자의 아비가 결혼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면, 그는 어떻게든 신부의 몸값을 지불해야만 한다(22:16-17). 이 율법의 취지는 아버지의 소유권을 보호하는 데 있다. 즉 아버지가 처녀가 아닌 딸을 시집 보낼 수 없다 해도, 신부의 몸값을 잃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명기의 관계 율법은 여권(女權)에 대해 다소 조심스럽다. 약혼하지 않은 여자가 강간당하면 그 여자는 강간한 범인에게 주어야 했고, 그 아버지는 신부의 몸값을 지불받았다(신 22:28-29). 새신부가 처녀가 아니라고 남편이 거짓 고소를 했을 때는 남편이 장인에게 벌금을 지불해야 하며, 그 여자는 자기를 미워하는 남편이라도 그대로 함께 살아야한다(13-19절). 더욱이 남자는 그 아내와 이혼할 수 있어도, 여자는 남자와 이혼할 수 있는 규정이 전혀 없다(24:1-4). 남자의 소유물로서 여자의 낮은 신분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는 구약을 통해 발견된다. 십계명은 남성들에게 이웃의 집, 아내, 종, 소, 나귀를 탐내지 말라고 말한다(출 20:17). 보아스가 룻을 보고 그 이름을 묻지 않고 "이는 뉘 소녀냐"라고 묻는다(룻 2:5). 약혼한 딸의 처녀성을 손님 환대에 대한 율법보다 더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인 롯은 소돔의 패거리들에게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라"고 말한다(창 19:8). 구약의 몇몇 여인들은 엄격한 족장 제도의 한계 내에서도 아주 현명하게 행동한다. 다말(창 38장)과 룻(룻 3:1-13)은 수혼(嫂婚) 결혼 또는 기업 무름(kinsman redemption)에 대한 그들의 본래의 권리를 얻는데서 담대하고 적극적이다. 야엘은 겐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의 원수인 시스라를 살해하기 위해 그를 배반한 남편에게 도전한다(삿 4:11, 17-22). 페르시아의 유대인 왕 에스더는 여인의 예절을 갖춰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 그의 미모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 백성을 구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를 정한다. 우리는 잠 31:10-31에서 '좋은 아내'의 상을 살필 수 있는데, 여자의 특별한 재능과 부지런함은 전적으로 가정에 대한 의무라고 나타나 있다. 완전히 여성 상동증(常同症)을 벗어난 구약의 여걸은 선지자들이다. 모세와 아론의 누이인 미리암은 이스라엘 여인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선지자 사역을 할 수 있었으나(출 15:20-21), 여선지 드보라와 훌다는 남편까지 포함하여 함께 계시로써 다스린 사사들이었다(삿 4:4-5; 왕하 22:11-20). 드보라의 예언은 가나안 사람을 격퇴할 수 있게 했고 훌다의 예언은 신명기의 진정성을 보증하였다. 이 여인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런 권위 있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II. 신약
탈무드에는 에수께서 아들과 딸이 동등하게 상속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여자에 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교훈이 들어 있지 않다. 막 7:24-30에서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의 말씀을 되받아 말하기 전까지 그녀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녀가 이방인인 것을 아셨고, 이방인과는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유대인의 인습을 거부하셨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향유를 부어 준 여인에게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하셨으며, 바리새인 시몬을 꾸짖으셨다(눅 7:36). 그러나 시몬이 문제 삼은 것은 그녀가 '죄인'(아마 창녀)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요 7:53-8:11에 있는 간음한 여인에 관한 문제게 있어서도, 무리들은 율법이 요구하는대로 남녀 두 사람 모두를 처형하겠다고 데려온 것이 아니라 여인만을 처형하겠다고 데려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처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막 5:25-34에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는데 그 여자는 줄곧 율법에서 부정한 자로 간주된 자였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짐으로써 예수님이 부정케 되었을 것이지만, 예수님이 직접 먼저 접촉한 것은 아니었다(레 15장의 의식법도 이런 것을 부정하다고 규정한 것은 아니다). 요 4:4-9과 27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다.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단지 사마리아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여자(27절)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심으로써 사회적 인습을 깨뜨리셨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구절들에서 여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위를 인류 평등주의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온갖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구원활동과 그들이 당시의 율법 학자들보다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것이 더 쉬웠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10:38-42에서 예수님은, 여자들이 대체로 율법을 교육받을 수 없었던 시대에 베다니의 마리아를 가르치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막 15:40, 41,47; 눅 8:1-3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 다른 부유한 여자들은 예수님을 쫓으며 음식을 제공하였고, 필요한 경비를 지불하였다. 당시 유대주의에서는 여제자들이 선생을 따른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신약과(딤후 3:6-7을 눅 10:38-42과 비교하라) 다른 여러 곳에서 입증된 것을 볼 때 부유하고 게으른 헬라주의적 사고를 가진 여자들이 순회 전도자와 교사들을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여자들도 있었으나, 열두 제자 가운데 여자 이름은 하나도 거론되지 않는다.초대 교회에서 여자들은 여선지자로서 폭넓게 활동했음이 분명하다. 사실 누가는 이 사실을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요엘의 예언 성취로 생각한다(행 2:17-18; 참조. 욜 2:28-29). 누가는 전도자 빌립의 결혼하지 않은 네 딸을 언급하는데 그들은 예언을 하였던 자들이다(행21:8-9). 바울은 예언하는 여자에게 적용되는 예법을 논의한다(고전 11:5 이하). 그들은 예언하는 권세를 표시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부여하는 수건을 머리에 써야만 하였다(고전 11:5 이하). 바울이 언급한 이래 이것은 온 교회의 법칙이 되었고(16절), 여선지자의 활동이 보편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케 해준다.바울은 뵈뵈를 천거하는 편지에서(롬 16장) 많은 여자를 복음 안에서 '동역자'(디모데에게도 사용된 호칭; 21절), '돕는자'(후원자 또는 지도자를 뜻함, 2절; 한글 개역 성경 '보호자')로 언급한다. 그는 유니아를 언급했는데, 유니아는 여자임이 분명하다(7절). 유니아라는 이름은 흔한 로마식 이름이고, '유니아'를 남자 이름이라고 지지하는 아무런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갈 3:2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자나 남자나 모두 동등하다고 명확히 천명한다. 즉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전 11:2-16에서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되는 존재이므로 여자는 남자의 영광으로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주장이 논란을 벌이지만 다시 원래의 관점에서 돌아가서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11절)라고 밝힌다.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질문을 하지 말고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라고 권함으로써 당시의 예절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14:33-35). 딤전 2:11-15에서도 여자는 질문을 그만두고 조용히 배우라고 한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처럼 초기 기독교 가정에서도 여자의 역할은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여자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엡 5:21-33에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상호 복종을 명하지만, 그의 설명은 아내가 남편에게 묻지 아니하고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골 3:18-19은 동일한 경우로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다. 벧전 3:1-7(특히 1,5-6절)은 남편을 '아내의 주'(헬. '큐리오스';6절)로 표현하고 아내를 '연약한 그릇'(7절)으로 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고 언급하고 있어 적어도 이 점에서는 남녀가 동등하다. 여자가 몸을 가꾸는 데 대한 문제가 딤전 2:9-10에서 논의된다. 벧전 3:2-4을 보면 화장품과 보석과 좋은 옷과 머리를 꾸미는 것이 모두 금지된다. 몸을 가꾸는 것은 당시 유대 및 헬레니즘 문화에서 부정한 행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목회 서신 저자에 따르면 여자의 위치는 가정에 있다. 그녀의 구원 자체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딤전 2:15). 홀로 된 여자('젊은 과부')는 성경에서 언급하는대로(5:11-15) 무익한 험담을 하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될 소지가 있다. 만약 경건하게 되기를 바란다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을 돌보아야만 한다. 딛 2:5은 그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여자는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종은 남편의 경건한 지도를 전제로 하는 순종이다.
함창석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 2:1-5)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남성과 여성이 주류이나 간혹 게이나 레즈비언같이 양성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여성은 암컷의 동물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여성 중 직접적으로 자기를 낳아 줄 경우 생태학적인 어머니라 부르게 된다. 생태학적이 아니라고 하여도 자기를 양육하여 준 여성을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모, 시모, 고모, 이모, 숙모, 백모, 외숙모, 대모, 신모 등과 같이 간접적 어머니도 있다.
어머니는 목회자와 같기도
어머니는 이스라엘의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던 가부장적 사회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주된 역할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아이를 낳는 일은 매우 큰 기쁨이었으며(시 113:9; 사 54:1),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는 매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예. 삼상 1:4-11). 비록 고대 이스라엘이 부계 중심사회였으나, 지파들의 족보를 살펴보면 모계 중심적인 면도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참조. 레아와 라헬의 자손들은 첩인 빌하와 실라의 자손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예. 창 46:8-25; 49:3-27; 민 1:5-15, 20-43; 2:3-31; 26: 5-50; 참조. 신 27:12-13; 33:6-21). 히. '에므'는 실제적인 어머니뿐만 아니라, 할머니(왕상 15: 10)나 여자 조상(창 3: 20; 24:60) 또는 여자 사사(삿 5:7)를 가리키는 칭호로도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는 불렀으나 '어머니'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속성이 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시 131:2; 사 49:15; 마 23:37).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아니한 까닭은, 아마도 고대 가나안족들이 섬기던 여신들(이들은 대개 다산이나 풍요의 신들로 섬김을 받았음)과 혼돈을 피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어머니로 묘사하였다(예. 사 50:1; 계 12장; 참조. 갈 4:26).
여자는 일반목사와 같기도
Ⅰ. 구약
인간 창조에 관한 창세기의 두 기사는 여자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 서로 다른 특성들을 나타내고 있지만, 남성과 여성을 주의 깊게 언급하고 있다. 비평학자들에 의해 더 초기의 것으로 판단된 창 2:4-3:24을 보면 처음에 남자가 창조되고, 그 다음에 남자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식물, 그 다음으로 그에게 맡겨줄 짐승이 창조된다. 이 피조물들은 어떤 직무에 적합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의 돕는 배필이 되게 하신다. 이것은 여자가 그의 종이 되는 것처럼 종속적인 관계로 맺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 '에제르'("돕는 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구약에 30회 가량 나온다. 하나님 자신과 관련하여 29회를 사용하시고 다윗 왕에게 한번 사용된다. 그러나 '첼라'("갈빗대"또는 "옆구리")는 "넘어지게 하는 것"(stumbling, '첼라')을 뜻하는 것과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돕는 배필이 남자의 몰락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쓰인 것이다. 사실 아담(3:12)과 하나님(17절)이 하와를 비난하고 있고, 후기 유대교와 기독교도 그녀에 대해서 '아담으로 하여금 범죄케 한 유혹자'라는 여자관을 갖게 된다. 남녀가 서로 같은 동료로서 창조되었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시키신다(16절). 그것은 성관계(2:24), 옷을 입는 것이나(3:7,21), 죽어야하는 운명(19절),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문제(14절)의 근원을 설명하는 원인론이 되는 이야기의 해석과 일치된다. 창 1:1-2, 4 상반절에 나타나 있는 다른 창조 기사는 남자와 여자가 여섯째 날에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기록한다(1:27-28). 여기서는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종속된다는 지시가 주어지지 않으며, 양자가 그 나머지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한다고 기록한다. 남자와 여자가 다시 대등한 관계에 놓여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곳이 있다. 즉 월경 중에와 그 이후의 의식적 불결에 관한 일련의 법들에 관한 언급에서다(레 15:19-33). 이것은 정액 배설에 관한 법들과 함께 언급된다(레 15:1-18). 다른 율법을 보더라도 히브리 문화가 전적으로 족장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약서(출 20:22-23:33)는 첩으로 팔린 여자가 그 주인을 기쁘게 해주지 못할지라도 그 여자의 권리를 보호해 주고 있다. 즉 그녀가 제대로 대우받아야 되거나 자유롭게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21:7-11). 그러나 또 다른 법은 여자를 소유의 범주에 속하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만약 남자가 약혼할 의사가 없이 여자를 유혹하면, 그는 신부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와 결혼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만약 유혹한 자의 성격이 악하여 그 여자의 아비가 결혼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면, 그는 어떻게든 신부의 몸값을 지불해야만 한다(22:16-17). 이 율법의 취지는 아버지의 소유권을 보호하는 데 있다. 즉 아버지가 처녀가 아닌 딸을 시집 보낼 수 없다 해도, 신부의 몸값을 잃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명기의 관계 율법은 여권(女權)에 대해 다소 조심스럽다. 약혼하지 않은 여자가 강간당하면 그 여자는 강간한 범인에게 주어야 했고, 그 아버지는 신부의 몸값을 지불받았다(신 22:28-29). 새신부가 처녀가 아니라고 남편이 거짓 고소를 했을 때는 남편이 장인에게 벌금을 지불해야 하며, 그 여자는 자기를 미워하는 남편이라도 그대로 함께 살아야한다(13-19절). 더욱이 남자는 그 아내와 이혼할 수 있어도, 여자는 남자와 이혼할 수 있는 규정이 전혀 없다(24:1-4). 남자의 소유물로서 여자의 낮은 신분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는 구약을 통해 발견된다. 십계명은 남성들에게 이웃의 집, 아내, 종, 소, 나귀를 탐내지 말라고 말한다(출 20:17). 보아스가 룻을 보고 그 이름을 묻지 않고 "이는 뉘 소녀냐"라고 묻는다(룻 2:5). 약혼한 딸의 처녀성을 손님 환대에 대한 율법보다 더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인 롯은 소돔의 패거리들에게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라"고 말한다(창 19:8). 구약의 몇몇 여인들은 엄격한 족장 제도의 한계 내에서도 아주 현명하게 행동한다. 다말(창 38장)과 룻(룻 3:1-13)은 수혼(嫂婚) 결혼 또는 기업 무름(kinsman redemption)에 대한 그들의 본래의 권리를 얻는데서 담대하고 적극적이다. 야엘은 겐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의 원수인 시스라를 살해하기 위해 그를 배반한 남편에게 도전한다(삿 4:11, 17-22). 페르시아의 유대인 왕 에스더는 여인의 예절을 갖춰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 그의 미모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 백성을 구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를 정한다. 우리는 잠 31:10-31에서 '좋은 아내'의 상을 살필 수 있는데, 여자의 특별한 재능과 부지런함은 전적으로 가정에 대한 의무라고 나타나 있다. 완전히 여성 상동증(常同症)을 벗어난 구약의 여걸은 선지자들이다. 모세와 아론의 누이인 미리암은 이스라엘 여인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선지자 사역을 할 수 있었으나(출 15:20-21), 여선지 드보라와 훌다는 남편까지 포함하여 함께 계시로써 다스린 사사들이었다(삿 4:4-5; 왕하 22:11-20). 드보라의 예언은 가나안 사람을 격퇴할 수 있게 했고 훌다의 예언은 신명기의 진정성을 보증하였다. 이 여인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런 권위 있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II. 신약
탈무드에는 에수께서 아들과 딸이 동등하게 상속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여자에 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교훈이 들어 있지 않다. 막 7:24-30에서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의 말씀을 되받아 말하기 전까지 그녀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녀가 이방인인 것을 아셨고, 이방인과는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유대인의 인습을 거부하셨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향유를 부어 준 여인에게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하셨으며, 바리새인 시몬을 꾸짖으셨다(눅 7:36). 그러나 시몬이 문제 삼은 것은 그녀가 '죄인'(아마 창녀)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요 7:53-8:11에 있는 간음한 여인에 관한 문제게 있어서도, 무리들은 율법이 요구하는대로 남녀 두 사람 모두를 처형하겠다고 데려온 것이 아니라 여인만을 처형하겠다고 데려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처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막 5:25-34에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는데 그 여자는 줄곧 율법에서 부정한 자로 간주된 자였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짐으로써 예수님이 부정케 되었을 것이지만, 예수님이 직접 먼저 접촉한 것은 아니었다(레 15장의 의식법도 이런 것을 부정하다고 규정한 것은 아니다). 요 4:4-9과 27절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다.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단지 사마리아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여자(27절)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심으로써 사회적 인습을 깨뜨리셨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구절들에서 여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위를 인류 평등주의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온갖 소외된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구원활동과 그들이 당시의 율법 학자들보다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것이 더 쉬웠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10:38-42에서 예수님은, 여자들이 대체로 율법을 교육받을 수 없었던 시대에 베다니의 마리아를 가르치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막 15:40, 41,47; 눅 8:1-3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 다른 부유한 여자들은 예수님을 쫓으며 음식을 제공하였고, 필요한 경비를 지불하였다. 당시 유대주의에서는 여제자들이 선생을 따른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신약과(딤후 3:6-7을 눅 10:38-42과 비교하라) 다른 여러 곳에서 입증된 것을 볼 때 부유하고 게으른 헬라주의적 사고를 가진 여자들이 순회 전도자와 교사들을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여자들도 있었으나, 열두 제자 가운데 여자 이름은 하나도 거론되지 않는다.초대 교회에서 여자들은 여선지자로서 폭넓게 활동했음이 분명하다. 사실 누가는 이 사실을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요엘의 예언 성취로 생각한다(행 2:17-18; 참조. 욜 2:28-29). 누가는 전도자 빌립의 결혼하지 않은 네 딸을 언급하는데 그들은 예언을 하였던 자들이다(행21:8-9). 바울은 예언하는 여자에게 적용되는 예법을 논의한다(고전 11:5 이하). 그들은 예언하는 권세를 표시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부여하는 수건을 머리에 써야만 하였다(고전 11:5 이하). 바울이 언급한 이래 이것은 온 교회의 법칙이 되었고(16절), 여선지자의 활동이 보편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케 해준다.바울은 뵈뵈를 천거하는 편지에서(롬 16장) 많은 여자를 복음 안에서 '동역자'(디모데에게도 사용된 호칭; 21절), '돕는자'(후원자 또는 지도자를 뜻함, 2절; 한글 개역 성경 '보호자')로 언급한다. 그는 유니아를 언급했는데, 유니아는 여자임이 분명하다(7절). 유니아라는 이름은 흔한 로마식 이름이고, '유니아'를 남자 이름이라고 지지하는 아무런 증거도 없기 때문이다. 갈 3:2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자나 남자나 모두 동등하다고 명확히 천명한다. 즉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전 11:2-16에서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되는 존재이므로 여자는 남자의 영광으로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주장이 논란을 벌이지만 다시 원래의 관점에서 돌아가서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11절)라고 밝힌다.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질문을 하지 말고 집에서 남편에게 물으라고 권함으로써 당시의 예절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14:33-35). 딤전 2:11-15에서도 여자는 질문을 그만두고 조용히 배우라고 한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처럼 초기 기독교 가정에서도 여자의 역할은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여자는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엡 5:21-33에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상호 복종을 명하지만, 그의 설명은 아내가 남편에게 묻지 아니하고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골 3:18-19은 동일한 경우로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다. 벧전 3:1-7(특히 1,5-6절)은 남편을 '아내의 주'(헬. '큐리오스';6절)로 표현하고 아내를 '연약한 그릇'(7절)으로 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고 언급하고 있어 적어도 이 점에서는 남녀가 동등하다. 여자가 몸을 가꾸는 데 대한 문제가 딤전 2:9-10에서 논의된다. 벧전 3:2-4을 보면 화장품과 보석과 좋은 옷과 머리를 꾸미는 것이 모두 금지된다. 몸을 가꾸는 것은 당시 유대 및 헬레니즘 문화에서 부정한 행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목회 서신 저자에 따르면 여자의 위치는 가정에 있다. 그녀의 구원 자체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딤전 2:15). 홀로 된 여자('젊은 과부')는 성경에서 언급하는대로(5:11-15) 무익한 험담을 하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될 소지가 있다. 만약 경건하게 되기를 바란다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족을 돌보아야만 한다. 딛 2:5은 그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한다. 여자는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종은 남편의 경건한 지도를 전제로 하는 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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