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만난 자의 비유’를 왜 ‘사마리아 사람 비유’라 하는가?
Author
원형수
Date
2024-07-2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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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누가복음 10:25-37절은
”자비나 선을 행하라“는 비유가 결코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 오사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음 당하신 자신을
강도 만난 나그네로 비유하여,
”온 몸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그리스도로 시인하면‘, 롬10:9)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율법사의 참 이웃이 자신임을 계시하신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아니라,
‘강도 만난 나그네의 비유’인 것입니다.
"내가 온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람함으로 내게 영생을 줄 수 있는 내 이웃이 누굽니까?"
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강도만난 나그네가 바로 네 이웃이고, 네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그 이웃이 바로 나다!“
라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강도 만난 나그네'로 비유하신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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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나 선을 행하라“는 비유가 결코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 오사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음 당하신 자신을
강도 만난 나그네로 비유하여,
”온 몸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그리스도로 시인하면‘, 롬10:9)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율법사의 참 이웃이 자신임을 계시하신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아니라,
‘강도 만난 나그네의 비유’인 것입니다.
"내가 온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람함으로 내게 영생을 줄 수 있는 내 이웃이 누굽니까?"
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강도만난 나그네가 바로 네 이웃이고, 네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그 이웃이 바로 나다!“
라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강도 만난 나그네'로 비유하신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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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라는 조롱과 멸시를 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자기네들을 '개'라고 조롱하고 멸시한 사람 중 하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적 봉사를 했으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하는 것도
충분히 一理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의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성경이 성경에 대해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고 봅니다.
베드로후서 3:15-16절, 고린도후서 3:15-17절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요한복음 5:39절은 모든 성경(그 당시는 구약성경)이
“내(예수)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요한복음 20:31절은
성경을 어떤 목적에서 기록된 책인가를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율법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주목할 때 그 의미는 분명해 진다고 봅니다.
율법사는 “내가 사랑함으로 내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그 이윳이 누구냐?”고 묻고,
예수께서는 “네 앞에서 강도를 만나 고난 당하는 자 내가 바로 네 이웃이다!”라고
답하신 것이라 봅니다.
어떻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율법사가 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것일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시험하게 한 것일까?”
를 주목해 보면 밝혀질 것이라 봅니다.
그 답은 누가복음 10:21-24절이라 봅니다.
“보는 것을 보는 눈”(눅10:23)이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는 것’을 말하고,
‘든는 것’이란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듣는 것’이라 봅니다(마16:16).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예수)를 보고, 듣는 바(예수는 그리스도시다!)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했다”는 말이 율법사로 하여금 예수를 시험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 것이라 봅니다.
율법사는 “내게 영생을 줄 수 있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고,
예수께서는 “내가 바로 네 이웃이다”라고 대답하신 것이라 봅니다.
그럼에도 “선행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해석하게 된다면
그것은 소금의 방정식을 묻는 질문에 소금의 용도를 대답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주께서 **비유라 친히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굳이 명명할 필요가 있을까요”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설명드린 바와같이 .
대한성서공회는 1967년도에 발간한 새번역 신약성경 때부터 소제목을 달아왔습니다.
특히 네비게이션 성경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했습니다.
‘비유’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함”을 말하는데,
예수께서 ‘비유’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전개되는 내용, 곧 ‘강도만난 나그네’에 빗대어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율법사의 질문에 답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강도만난 자(들)의 이웃이 누구냐? 에 답하면 되고
답에 맞게 살고 살게 하는 게 설교자의 몫이 아닐까요”라는 말씀에는
저의 의도나
율법사의 질문 의도와는 좀 다른 의견이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사의 질문이나
예수님의 대답이나
“강도만난 자(들)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은 것도
또한 예수께서도 그리 답하신 것은 아니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단수)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고,
예수께서도 “강도만난 자(들)의 네 이웃이다!”가 아니라,
“강도만난 자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네 이웃이다!”는 말씀을
그 비유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율법사는 '일반적'이거나 '통상적'인 이웃이 아니라
'특정한 이웃' 곧 율법사 자신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그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물었고,
예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심으로
자신이 "강도만난 나그네"로써
"네가 온 몸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할 네 이웃이다"라고 계시하신 것이라 봅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리면
“답에 맞게 살고, 살게 하는 게 설교자의 몫이 아닐까요”라 하셨는데,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누가복음 10:25-37절이 과연
“답에 맞게 살고, 살게 하는게 설교자의 몫”을 가르치려는 의도,
또는 “숨겨진(담겨진) 뜻이라 할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해 보게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
예수님의 이웃이 누구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느냐?]가 핵심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실지를 고민하시고
강도 만난 자와 같이 돌아보는 이 없는 자를 찾아
그 이웃이 되어주셨지만 말입니다
서로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이 되어 매우 고맙습니다.
이러한 나눔을 통해 보다 더 깊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기회가 될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느냐?’가 핵심입니다”는
주장은 전통적인 해석이였습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너는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질 말고
‘강도를 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등의 해석”입니다.
대표적인 분이 민중신학자로 잘 알려진 서남동 박사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누가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했는가?
전통적인 해석대로 하자면 그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해서 사경에 빠진 인간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필자는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역을 담당한 자는 '강도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강도를 만나서 얻어맞고, 빼앗기고, 사경에 처해서 도움을 부르짖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신음소리(한)가 바로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름인 것이다. 그 사람에게 대한 태도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다.“(‘민중신학의 탐구’, 107쪽)
"마태복음 25장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의하면, 메시아는 고난받는 이웃으로 화신해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합니다”(‘민중신학의 탐구’, 217쪽)
심지어 어느 목사님은 ‘강도 만난 인생들’(옥성석)란 글에서
“우리 모두 강도 만난 인생들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이란 강도를 만날 것입니다.”고 하고,
또 다른 목사님은 ‘나의 이웃에서 너의 이웃으로’(김흥규)라고 강조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내가 네게 영생을 줄 수 있는 그 이웃이다!”(요20:31, 행4:12, 롬10:10)라고
예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신 비유라 보기 때문입니다(요5:39).
세 번씩이나 글 올려주신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비판이든 격려든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제 의견을 드립니다.
결코 비판이나, 논쟁이 아님을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목사님께서
“대개 **비유라고 하지만 이 경우, 큰 차이가 없다 하겠으나
비유라기 보다는 예화가 적절하다 생각한다. 사람을 예로 들었기 때문이다”는
말씀에 대해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예화’와 ‘비유’의 사전적 의미는 다릅니다.
예화의 경우 “실례를 들어 하는 이야기”이고,
비유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일”로 구분한다고 볼 때
예수께서 빗대어 말씀하신 이야기는 비유로 봄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자나 목사님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예화’라기 보다는 예수님의 ‘비유’라 적고 있다고 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가 네 이웃이다(?) 그런 점에서 목사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성경의 모든 내용이 예수께로 향한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이와 같은 목사님의 지적에 대해 저의 의견은 다릅니다.
제 의견은
요5:39, 고후 3:15-16, 요16:12-14절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입니다.
“성경에 대한 것이 감리회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제 의견은
교리와 장정 【103】 제3조(교리) 감리회의 기초 교리는...........존 웨슬리의 설교와 강론 그리고 찬양시집과 우리 교회의 신앙적 개요, 교리적 선언 및 신앙고백에 설명되어 있다.“한 규정에 따라 “성경에 대한 것” 역시 가능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몰라서 그렇게 한다면야 어쩔 수 없으나, 알면서 그러는 것은
다분히 악의적인 처사라 봅니다.”
상당히 가슴에 찔리는 지적이셨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당뉴스에 올리고
게시판에는 소개하는 내용을 적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속된 말로 도진,개진이지요.
고마움을 담아 제 의견을 전합니다.
불편함이 없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