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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관기
작성일
2022-11-15 22:24
조회
1661
*. 기왕에 보시려거든 앞 뒤 옆 위에 계시는 분들에게도 읽어보라 권해보세요.

송득후 3 – 해설과 정리

민관기가 송순재의 신학셰계를 기초로 해설한 것입니다.


송득후 목사에 대한 공적은 오해나 오판의 여지가 있다. 하여, 독립유공자 심사/포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명하고, 더 깊이 연구해야할 과제가 있다 여겨져, 위에서 (송득후 1과 2 자료)제시한 논점 중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설코자 합니다.


1. 만주신학교 교장 재직에 대해

만주신학교는 감리교회협성여자신학교 교장과 감리교회신학교 부교장을 역임한 걸출한 여선교사 채핀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왜제(倭帝)’의 미국인 배제 전략에 따라 특히, 미국인 선교사들은 요직에서 제거됨에 따라 그 자리를 파송제에 의해 송목사가 이어받았지만, 한글이나 조선역사 등이 강의되며, 대한인 성직자/교수들이 젊은 신학생들에게 어떤 사상을 주입하는가는 사실상 뻔하게 민족주의 교육임을 알고 있었기에 왜적들은 감시하기도 귀찮아서인지 1941년 이 학교를 폐교시킨다. 어찌보면 당시 만주신학교는 대한인을 직업적 성직자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중 제일 선진적 민족 교육을 택하고 있었다 여겨진다. 그 곳은 그나마 왜의 감시가 국내보다는 덜한 요소가 있었고 따라서 일일이 어떻게 하기가 번거로워 폐교시켜 버린 것으로 본다.

예로 1) 안산의 최용신 선생이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상대로 한글 교육 등을 할 시에 순사들이 수시로 상록학원을 감시하였기에 제대로 된 교육을 맘껏 시키지 못했음과 결국은 상록학원 인근에 본오소학교를 세워 어린아이들의 민족교육의 통로를 틀어막고 학생들을 뺏어가고 규제를 가하여 100명 이상이 되는 인원은 모두 다 집으로 보내 집에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눈물바다로 만든 사건이나,
2) 서울의 감리교회신학교는 황국신민화교육이 기승을 부리자 아예 황국신민화반대 삐라를 제작 살포하여 항거하다 교장/교수 3명과 학생 7명 등 10여 명이 피체되어 지독한 고문을 받고 학교는 1942년 폐교되었던 것과,
3) 평양의 요한학교 역시 마찬가지로 교회 수가 늘어나는데 부족한 교역자를 채우기 위해 세워졌으나 역시 민족주의 종교교육을 하고 있을 것이 보나마나 뻔한 상태였으므로 감시하기가 만주보다도 더 용이하였다는 점이 작용되었는지 오랫동안 놔두다가 100여 명의 졸업생만 배출한 채 1944년 폐교시킨 것에서 확인된다.

서울의 감리교회신학교와 평양의 요한신학교 그리고 만주신학교 세 학교는 공히 민족주의 감리교회 성직자 양성(정신 방면의 민족운동가 양성)의 최고교육기관(약 50여 명의 독립유공자와 60여 명의 순교자 배출)이었음이 드러난다. 그중 감시하기가 훨씬 어려웠던 만주신학교가 폐교의 1순위로 작동된 것이다. 더구나 만주신학교의 교장이 3.1혁명에 참전했던 정경옥 교수로 바뀌고 송득후, 현석칠, 도인권, 배형식 등의 민족주의 목사들이 이사진으로 포진하고, 교감에 역시 강골 민족주의자 송정률 목사가 시무하게 되자 왜제는 만주신학교 탄압에 더욱 열을 내어 그 결과 이 학교는 1941년 감리교회 신학교 중 제일 먼저 폐교되고 만다.

감리교회 목회자 양성을 위한 3개의 신학교는 그렇게 차례대로 폐교되었다.

*. 서울의 경성제대는 어떤 경우에도 폐교될 위험이 없었다. 대한에 존재하는 단 2개의 대학 중 유일하며 최고의 매국대학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한엔 대학령과 전문학교령 등이 있었는데 대학은 단 2개였다. 하나는 매국대학 경성제대 그리고 감리교회신학교였었다. 대학령은 예과 2년 본과 3년제였으며, 4각모를 착용했다. 이화전문, 연희전문, 세브란스의전, 경성의전, 보성전문, 숭실전문 등은 전문학교령에 따른 학교였다. 예전에 있었던 이화학당의 대학과나 숭실학교의 대학과 배재학당의 대학과 등은 호칭이 대학과 였고 실제의 대학은 아니었으나, 실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경성제대는 대한인 중 머리에 든 게 제일 많은 이들이 왜적에게 빌붙어 먹으려 들어갔다. 경성제대 출신의 독립유공자가 2명인가하나 친일인명사전 등재자는 수다히 많다. 서울 감신대는 50여 명, 평양 장신대 30여명, 평양 숭실학교 80여 명, 서울 이화 20여 명. 서울 배재 20여 명, 서울 배화 20여 명, 광주 수피아 20여 명, 서울 정신 20여 명, 개성 호수돈여고, 원산 루씨여고, 평양 숭의여고, 대구 일신학교, 양양 정명학원이나, 그리고 제중원의학교, 세브란스의전, 경성의전, 경성여의전 등 의료인 양성기관 출신은 특별히 합하여 100여명 이상이다. 비교가 안 된다.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위에 언급된 학교들의 특성을 가만히 보라. 경성의전을 제외하면 100%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미션스쿨이다.

왜 그럴까? 그 답은 해당 교단들의 학교에선 민족주의 신앙교육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학교 출신들이 독립유공자가 많은 것은 가르침을 주는 의사 교수들에게서 전수 받은 인류박애정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스크랜턴과 제임스 홀, 로제타 홀, 셔우드 홀, 하디,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 백정출신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독립유공자 건국포장 추서자) 등을 살펴보면 그 증거가 된다.

* 파송제와 청빙제 : 정춘수의 감독 피선 1938년 이후 1945. 8. 15까지 감리교회 선교사나 목사 등 성직자는 100% 감독에 의해 직권 파송되었다. 가라면 가야만 했던 것이다. 하여, 함경북도 곧, 장로교회 단독 선교구역으로 협약된 곳에 애산 김진호 목사를 파송하는 것은 선교협정 파기행위였으나, 이를 뻔히 알고 있던 애산은 그 파송에 순응했으며, 후일 독립운동 참여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포상 받음에 정춘수 체제에 순응한 것이 아무런 걸림돌이 안 되는 것이었다. - 교단의 통리자(統理者) 정춘수는 이러한 일을 강압에 의해 주도하긴 하나 독립운동가 목사인 김진호를 감리교회 선교지역이 아닌 장로교회 단독 선교구역 함경북도로 파송하여 교회 5개를 개척 설립하게 했다. 이 때 안산에서 최용신 선생을 도와 교사를 했었던 황종오 장로가 김진호 목사와 협력하여 민족운동과 선교활동을 수행했는데, 김진호 목사는 정춘수 체제에 순응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운동 공로를 부정당하지 않고 독립 유공자 추서를 받았다. - 이 논리와 상황은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의 연회장으로 취임한 송득후 목사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반면, 정춘수(3.1혁명 민족대표) 매국혁신교단 체제에서 같은 반열의 매국노는 언론활동을 하던 민족대표를 역임했다가 변절한 동양지광의 박희도(3.1혁명 민족대표, 매국행위로 무훈, 박희도의 변절은 민망한 행위로 인함이다. 어느 여학생과 옷벗기 화투놀이를 했다가 일이 폭로되어 종교계 이탈)이고, 교단 내부에서 매국행위에 동참한 이들은 갈홍기와 박연서(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가 친일행적 발굴로 2005년 서훈 박탈)등인데, 이들은 왜의 국방헌금 강요가 있자 유수의 감리교회 39개를 방매하며 여기에서 나온 20만원에서 10만원은 국방헌금으로 헌납하고 10만원은 나눠먹었으며, 수난자들의 유가족 원호조차도 하지 않은 파렴치한들이 진정한 의미의 친일매국노이자 인간 말종들이지 단순히 직책에 순응했다하여 친일행적이 있다 해석하는 건 지극히 부당하다.

한편, 정춘수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가 구속/파면, 휴직 등을 당한 감리교회 평신도와 성직자들은 이를 종교인의 종교행위가 아닌 종교인의 민족신앙행위 차원으로 해석하여 포상함이 마땅하다.

한편, 청빙제는 교단의 최고지도자가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들 나름의 원칙을 세워 자기들 뜻대로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다. 파송제와 청빙제는 전혀 다른 목회자 임명제도이다.


2.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 교구장 복무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목회자 임명/면직 제도는 개별교회의 판단과 결정으로 청빙하는 제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교단의 최고 행정지도자인 감독이 1,000명 교회에서 10명 교회로 파송하면 그대로 따라야하고 따르지 않으면 미파송상태가 되어 진급이 보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상황 하에 송득후 목사는 정춘수 매국혁신교단 체제에 의하여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장에 파송되었다. 하여, 송목사는 그냥 동포들을 위하여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각 권역 지역별 정세를 간략히 살펴본다.

1) 서울 – 왜제의 정무 핵심기관들의 집결처이다. 조선총독부, 헌병사령부 등이 존재하므로 감시나 통제가 한반도내 중 제일 엄중하여 무얼 공개적으로 한다든지 왕성하게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감리교회의 선교본부는 서울에 소재하여 왜제의 집중 감시를 받았으며, 최고 행정 지도자인 감독이 주재하였고 임기가 4년이나 되어, 총회장 임기가 1년이고 지역도 평양인지라 감시체제에서 훨씬 벗어나 있었던 장로교회와는 전혀 달랐다.

장로교회 총회장은 피선된 후 어찌어찌 우물쭈물 대다보면 임기가 끝나갔다. 그냥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버티면 되었다. 감리교회하고는 상황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4년은 우물쭈물하면 지나가는 기간이 아니다.

서울지역의 감리교회의 민족운동 단체는 공개든 비공개든 신간회, 근우회 이후 거의 소멸되었고, 호칭이나마 지키며 미약하게나마 민족운동에 동참하던 단체가 감리교회 여선교회, 남선교회, 청년회, 절제회, YMCA,, YWCA 정도였다. - 서울에서 멀거나 왜제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지역일수록 민족운동이 공개적이든 미공개적이든 훨씬 왕성하게 일어났음은 자명하다.
그만큼 어려웠다.

2) 감리교회의 동부연회인 강원지역을 살펴보자. 참으로 특이한 민족운동 양상이 나타난다. 상하이 임정의 연통제 조직인 철원애국단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철원애국단은 비단 철원지역만의 미공개 비합법 애국단체는 아니며 감리교회 강원도지역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독립운동단체였다.

또한, 1933년 봄 춘천여자관에서 밀담을 통해 십자가당을 조직한다. 이는 남궁억 장로(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자), 아들인 남궁염, 딸인 남궁경숙과 목회자인 남천우, 유자훈 등 제인들로 조직되었던바 기독교인중 감리교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왜제의 침략기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는 강원도지역이 상대적으로 감시가 훨씬 덜했단 뜻이며 제대로 감시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3)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지역인 만주를 보자.

1유형인 국내는 식민지국의 상태(여기도 앞서 기술한바와 같이 감시상태가 서울과 지방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이고, 특별히 대만도 직접 지배하는 식민국의 형태였으나 대만인은 왜제에 대항하여 항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순응하는 모습을 취하여 특별한 감시니 억압이니 하는 것이 없었으며, 2유형인 만주는 독자적으로 왜제의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고로 청국 마지막 황제 부이를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
동남아 제국들을 점령하고는 통치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고 군사적으로만 점령 상태이니 점령국이어서 실제적인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의 3유형 그리고 4째 유형인 미국이라는 자신들의 잠정적 적국이 있다.

여기에서 송득후 목사가 시무했던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의 위상이나 자리를 본다. 국내의 서울과 지방은 상태에 따라 국내에 생존하는 대한인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매국이 아니더라도 위장이든 아니든 항복/굴종/부역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한인은 없었으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강제신사참배는 지옥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태를 극복해내지 못한 지도자들의 한계는 있었지만, 몽양 여운형과 같이 위장굴복의 자세를 취하면서 실질적 광복/승전을 준비했던 지도자들도 있었다. 이와는 달리 정춘수는 매국혁신교단체제를 초기엔 물론 강요에 의해 택한 입장에서 자신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투옥된 교회의 목회자나 평신도들의 유가족을 원호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유명한 변절자 죄옹 윤치호가 투옥자 원호/석방을 위해 무던히 애를 썻었던 것과 대비된다. 한편, 기분 나쁜 부역자/변절자인 기독교 여성계의 김활란처럼 이화학생들의 강제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노골적으로 부역자의 길을 공개적으로 걸었던 경우도 있다.
김활란은 훨씬 더 나쁜 노천명 등과는 질이 다른 부역자이며, 김활란은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서 지역마다 다니며 강사를 하여서 타인의 눈에 띄게 부역이 드러나 있던 측면이 있어 더 많은 친일을 한 것처럼 보이고, 하여, 처음부터 지금까지 무훈상태이고, 동아일보/보성전문 김성수는 김활란과 같은 친왜매국단체의 대표와 격이 같은 감사를 역임했음에도 대중들에게 드러나는 활동을 하지 않아 한 때는 건국훈장 2등급 대통령장에 추서되어 친왜행적이 발굴되어 서훈이 박탈되기까지 수 십 년이 걸린 것에서 국내에 있던 지도자들의 곤혹스런 처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바가 아니다.

만주는 청국, 러시아, 몽골, 왜, 조선인들, 공산주의,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비적, 마적, 정규군, 비정규군 등 각 인종과 나라/민족/이념들이 뒤엉켜 누가 누군지도 구분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상태가 많았다. 하여, 상황을 오해/오판하여, 같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대적하여 싸우지 않아도 되는 상대와 전투를 벌이는 일들도 다반사로 일어났었다. 왜는 밀정을 파견하고 상대를 이간하고 매수하여 싸우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한 후 기독교조선감리교단만주교구를 보아야 한다. 제일 중요한 의제는 감리교인 4,500여 명, 감리교회-장로교회-성결교회-동아기독교회 등 45,000여 명의 보호와 생존이 최우선 당면과제였다. 송목사는 이러한 상황의 만주선교 최고 현안인 동포애호에 복종한 것이지 정춘수의 매국혁신교단체제에 순응한 행위가 아니었다.

4) 미국을 보자. 미주의 동포사회는 1902년부터 하와이 노동이민 7,200여 명과 본토로의 이주,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의 애니깽 농장이주, 쿠바로의 이주와 혁명 참여 등 북중미로의 진출이 있었는데 특히, 미국 본토로의 이주가 두드러졌다. 미국의 주요도시 즉, 샌프란시스코, 덴버, 필라델피아, 시카고 등이 대한인들이 주요하게 진출했었던 곳이었다.

미국은 대통령제 민주공화정 국가이며 국회도 있는 3권분립의 민주국가였으며, 독립국가체제가 늦게 이루어짐과 북남전쟁으로 인해 식민지국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측면이 있어 겨우 먹는다는 것이 필리핀 정도였고 그나마 일본과의 밀약으로 조선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파기까지 하며 겨우 하나 얻은 것이 식민지 필리핀이었다. 어째든, 대한인들은 어느 곳보다 미주에서 훨씬 활동하기가 수월했다.

미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것은 왜의 감시/탄압과 박해로부터 자유로웠던 측면이 강하며, 일본의 위압적 박해와 탄압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하여, 미주 동포들의 독립운동 영역은 최소한 목숨이 위태로운 독립운동이나 활동은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되고, 또한, 거개가 자신들의 일이나 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조직적으로 모금하여(애국공채 등 발행)상하이 임정과 김구의 한인애국단이라는 특공 무공단체에 2,000달러 기부(모금책 안창호 목사-충청지역 활동, 건국포장 추서자)하여 이봉창(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자), 매헌 윤봉길(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자) 의거에 그 재정이 쓰임으로 세상에 이렇게 돈이 귀하게 쓰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크나 큰 기쁨과 환희를 선사했고, 4억의 중국인들에게도 감동을 주어 장제스(장개석) 총통(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자)은 한국인들을 황포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무반을 설치케 했고,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송미령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자)은 우리의 광복활동 지원자금으로 20만 달러를 지원했다 한다.

중국인의 광복지원활동의 특징 : 사실상 중국인들의 우리민족 독립운동 지원활동은 자신들도 왜에 의해 침략을 받고 있던 상태였기에 미국인을 비롯한 서구인들의 우리민족 지원활동과는 그 격이 다르며 낮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로,

18,000여 명의 독립유공자중 외국인은 56명이라는데 그중 중국인이 45명*이고 일본인 1명, 영국인 3명 베델, 스코필드, 쇼우, 캐나다인 그리어슨, 에비슨 2명을 제외하면 미국인은 5명이고 그중 구타펠이란 미 감리교회 여선교사를 제외하면 남성은 4명 헐버트 선교사, 모우리 선교사, 맥큔 선교사, 매켄지 등으로 아주 미약한 숫자(전체 개신교 선교사 약 4,000여 명)가 독립유공자의 반열에 있음을 알 수 있어 중국인들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의 성격 같은 것에 대한 연구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졌나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대한민국 건국훈장 1등급 대한민국장 추서자 31명중 5명이 중국인인데, 손문, 장개석, 송미령 등은 얼추 그 공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여전히 100%는 아님) 진과부, 진기미는 이해가 안간다. 특히, 진기미는 도대체 무슨 공적이 있다고 1등급인 대한민국장인지 이해할 길이 없다.

* 중국인이 45명 : 중국인이라 하지만 사실상은 자유중국이라 불리던 대만인들이다. 박정희정권시절 정권과의 관계 때문에 자유대만인에 대한 훈장 추서가 대규모로 또한 등급이 높게 추서된 것으로 본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선 우리민족 성원중 유일하게 이회영 권사(선생)에게 혁명열사증을 추서했다 한다. 우리 정부는 물론 공산당 계열의 항일운동가에게 독립유공자 포상을 한 경우가 없는 것으로 안다.
굳이 평가하여, 장제스의 황포군관학교 한인 특무반(대한인 100여 명 입학해 군관교육 받았다 전한다) 설치의 공로가 다대한 공헌이라면 신흥무관학교, 한미항공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울라칸(운남관)무관학교 등을 설립하고 독립군 장교들을 양성한 설립한 설립자나 교관들도 그에 합당한 훈격으로 추서하여 예우해야 마땅하다 여기고, 장제스의 그러한 판단/결정은 우리의 청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