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성의 역사 정확하게 기록한다.
작성자
민관기
작성일
2022-11-09 12:36
조회
1510
협성의 정확한 역사에 대해 기록한다.
1885년 내조선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세운후 지방 여러곳에 학교를 설립하므로
자신을 파견한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의 뜻에 충실하였다.
대부인은 1890년경 협성부인학원을 세웠고, 여기엔 미국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언대학 대한인 최초 문학사인
김란사가 교수하고 헐버트 목사도 교수하였다.
위에서 말한 지방에 세운 여러 학교중 수원에 1902년 삼일학원(여/남학교)이 세워졌고 여기엔 수원유지들인 이하영 목사(3.1혁명 참전, 독립유공자), 임면수(신흥무관학교 교관, 독립유공자), 나중석(수원의 대부호, 나혜석의 오빠)등이 참여하였으며, 이하영 목사는 유력한 한학자이고 독실한 신앙인이며 나라의 국권수호의지를 가진이였으므로,' 내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내가 이 성을 허물고 삼일안에 다시 세우리라'한 성경의 말씀을 받들어 학교의 이름을 삼일학원이라 명명하였다.
협성부인학원은 알벗슨을 거쳐 채핀에 이르러 협성여자신학교로 개명되었고 이 학교는 협성남자신학교와 합동하며 감리교회신학교가 되었다.
1970년대 삼일학원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 삼일학원을 인수한 상동교회 박설봉 목사는 협성신학교를 발기/설립하므로서 70여 년 감리교회 선교학교의 전통을 고수해 온 중고등과정의 삼일학원과 함게하기 시작했다.
곧, 협성대학교는 스크랜턴, 알벗슨, 채핀으로 이어지다가 감리교회신학교와 감리교신학대학을 거치던중 협성신학교로 분화/설립되었고,
이는 1902년부터 경영되던 삼일학원과 합하니 협성대학교는 당당한 민족학교 삼일학원의 수장학교가 되었다.
= 삼일중고등학교 동문은 학원의 이사로 참여 안하나 대학의 동문은 이사로 참여한다.
이로써, 협성대학교는 1970년대에 갑자기 세워진 학교가 아니라 그 역사가 감신과 다를바가 하나도 없는
학교이며, 1902년의 삼일학원과 함께하니 더없는 민족의 유산으로 기리 빛난다.
정리하면,
삼일학원 협성대학교는 1890년의 협성부인학원, 1902년의 삼일여남학교, 1970년대 협성신학교의 완전/결체이다.
1885년 내조선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세운후 지방 여러곳에 학교를 설립하므로
자신을 파견한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부의 뜻에 충실하였다.
대부인은 1890년경 협성부인학원을 세웠고, 여기엔 미국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언대학 대한인 최초 문학사인
김란사가 교수하고 헐버트 목사도 교수하였다.
위에서 말한 지방에 세운 여러 학교중 수원에 1902년 삼일학원(여/남학교)이 세워졌고 여기엔 수원유지들인 이하영 목사(3.1혁명 참전, 독립유공자), 임면수(신흥무관학교 교관, 독립유공자), 나중석(수원의 대부호, 나혜석의 오빠)등이 참여하였으며, 이하영 목사는 유력한 한학자이고 독실한 신앙인이며 나라의 국권수호의지를 가진이였으므로,' 내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내가 이 성을 허물고 삼일안에 다시 세우리라'한 성경의 말씀을 받들어 학교의 이름을 삼일학원이라 명명하였다.
협성부인학원은 알벗슨을 거쳐 채핀에 이르러 협성여자신학교로 개명되었고 이 학교는 협성남자신학교와 합동하며 감리교회신학교가 되었다.
1970년대 삼일학원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을 때 삼일학원을 인수한 상동교회 박설봉 목사는 협성신학교를 발기/설립하므로서 70여 년 감리교회 선교학교의 전통을 고수해 온 중고등과정의 삼일학원과 함게하기 시작했다.
곧, 협성대학교는 스크랜턴, 알벗슨, 채핀으로 이어지다가 감리교회신학교와 감리교신학대학을 거치던중 협성신학교로 분화/설립되었고,
이는 1902년부터 경영되던 삼일학원과 합하니 협성대학교는 당당한 민족학교 삼일학원의 수장학교가 되었다.
= 삼일중고등학교 동문은 학원의 이사로 참여 안하나 대학의 동문은 이사로 참여한다.
이로써, 협성대학교는 1970년대에 갑자기 세워진 학교가 아니라 그 역사가 감신과 다를바가 하나도 없는
학교이며, 1902년의 삼일학원과 함께하니 더없는 민족의 유산으로 기리 빛난다.
정리하면,
삼일학원 협성대학교는 1890년의 협성부인학원, 1902년의 삼일여남학교, 1970년대 협성신학교의 완전/결체이다.
서울신학교의 태생과 존재에 대하여
1974년,총회 김창희감독님 취임(홍현설박사 낙선) 으로 감리교회는 "갱신총회(총회장 마경일목사) 로 분렬 1년여를 경과하는 동안에 복수감독제로
개헌 각 연회감독(중부연회 박설봉감독,동부연회 박대선감독,남부연회 김순경감독)이 취임 후 연회 회원 중 신학 미필 '협동회원'과 서리전도사의 연회허입을 위한 신학교육의 필요성에 따라 각 연회별로 서울신학교,동부신학교,남부신학교를 설립운영하던 중에 정부의 비인가 신학교의 폐쇄조치에 따라 연회신학교는 "서울신학교"(상동교회/새로나백화잠 구내)로 ,통,폐합, 모든 학적이 서울신학교로 이관된바 있었고(갱신/야간/총회신학교는 별도 유지) ....
서울신학교(교장 박설봉감독) 감사로 중부연회 총무 성기백목사, 동부연회 총무 조묘희목사가 2년간 섬긴바 있었습니다. 이후 서울신학교(KMC 유지재단 소속)는 학교법인 삼일학원으로 편입, 협성신학교로,협성대학교 신학대학으로 성장,오늘에 이르고 있음입니다 현재 70,80대 졸업생들이 통상"협성출신"이라 자칭함인데 ......본글에서 서울신학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시기에 의견을 개진합나다 ( 답글이 기록에 의해서 아니라 87세 노년의 기억에 의존하였음을 양해 바람니다 샬롬 !!!
존경하는 조묘희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허나, 이 글은 상세역사가 아니고 큰 줄기만 기록했습니다.
평안하시고 건강하세요~^^
민관기 목사님은 기독교 대한 감리회 역사학자
박목사님 알라뷰~^^
목사님의 긴 여정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안과 건강을 항상 기도합니다.
19070년대의 협성신학교의 완전체이다.
수정해 주세요 목사님~~~
앗~ 이런 10배를 뻥튀기 했네요.
수정할께요. 감사해요.
그리고 민관기넘마~
똑바로 못해~ 퍽퍽퍽~~~
아유~ 아파요~~~~
몇 대 더 맞아라. 찰싹~ 철썩~~
으으윽~ 재성해여 아프론 안그럭께여
협성출신 목사님들게 드리는 부탁의 말씁입니다.
이 글이 가능하면 많은 분들에게 알려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