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죽고 변선환이 부활했다
작성자
장병선
작성일
2022-11-03 10:53
조회
2333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
변선환 제자들, 변선환 교수 출교조치를 돌아보고 교회의 갈길 제시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소위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지향했던 고(故) 변선환 교수(1927∼1995)가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고 출교당한 지 30년이 흐른 3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그의 제자들과 신학자들이 당시 사건과 그의 신학세계를 조명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를 주제로 연 이번 학술대회는 변선환 교수의 제자들이 만든 ‘변선환아카이브’가 주최하고 ‘여해 강원용 재단’, 엄상현 목사 등이 후원했다. 농목, 새물결, 생명평화마당, 한기연, 크리스찬아카데미 등 30개 단체가 공동주관자로 참여했다.
*공동주관 : 감리교농촌선교목회자회, 감리교목회자모임 ‘새물결’, 고창좋은길벗들, 기독자교수협의회, 다석사상연구회, 다석학회, 동광원, 보인회, 비폭력평화물결,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생명평화기독연대, 생명평화마당, 시튼종교간대화모임, 에큐메니안, 예수더하기, 예수학당, 인문사회연구 백두, 종교평화원, 종교환경회의, 한국기독교연구소, 한국信연구소, 한몸평화, 함석헌평화연구소, 현제(김흥호)사상연구회, 해방신학연구소, 해천우회, 카리스마타수도회, 코리안아쉬람, 크리스챤아카데미,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
학술대회는 변선환아카이브 소장인 김정숙 교수(감신대)가 인사말을 하고 윤병상(연세대 명예교수),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도올 김용옥(한신대 석좌교수) 교수와 정희수 감독(UMC)이 격려사를 하고 나서 1부 “종교재판 30년, 회고와 성찰”, 2부 “종교재판 30년, 그 ‘以後’”을 주제로 한 변선환 제자들의 발제가 있었다.
1부에서 송순재 교수(감신대 은퇴교수)는 “사랑과 열정, 변선환의 신학 여정”을,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원장)는 “죽어야 사는 기독교 ― 타자 부정에서 자기 부정으로”를 주제로 발제하며 당시 사건과 변선환 교수의 신학세계를 돌아보았다.
2부에서는 한인철 교수(연세대 명예교수)가 “불가결의 상호보충 ― 하나의 시도”에 대해, 이호재 교수(전 성균관대 교수)가 “한국 종교와 한국교회의 화해를 위한 ‘풍류 담론’”에 대해, 이은선 교수(한국信연구소 소장)가 “감리교 종교재판, 한국적 ‘보편종교’를 향한 진통과 선취”에 대해 각각 발표하며 한국 교회와 종교계가 나아갈 방향을 짚어 보았다. 이후 질의응답 형식을 빌어 참석자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뒤 마쳤다. 이날 학술대회는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앞서 지난 19일, 이정배 교수는 서울 한 음식점에서 이번 학술대회를 알리는 간담회를 열고 “이번 행사에서 그때 그들은 왜 종교재판을 일으켰고, 주체 세력들은 누구였는지, 종교재판을 통해 한국교회가 어떻게 달라졌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다뤄보려고 한다”면서 “기독교는 자기가 죽어야 사는 종교인데, 그동안 타자를 죽여왔다. 기독교가 이제는 시대와 세상, 가난한 자들, 이웃 종교를 위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언하자는 바람”이라고 대회 취지를 설명했었다.
송순재 교수도 “신학계 선구자였던 변선환 목사에게 가해졌던 종교재판은 한국 교회사와 현대 세계교회사에서 참 부끄러운 일로 남게 됐다”며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감리교회와 한국 교회·세계 교회, 세계 종교가 성숙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한 바 있다.
변교수의 제자들은 일아 변선환 교수의 탄생 100주년(2027)을 맞아 그의 생애, 사상, 제자들을 주제로 한 '변선환 《평전》'을 출판하고자 출판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정배 교수는 학술대회에서 "종교재판에 대한 저항의 뜻을 담아 여러분 모두를 출판위원으로 모시고자 한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 사업에 출판위원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이는 후원모금(농협 302-2410-4679-1 김정숙 변선환 아카이브)에 참여하면 된다. 아울러 아카이브는 감리교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종교재판 《백서》를 준비하고 있음도 알렸다.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
▲ 인사의 말씀 김정숙(감신대 교수, 변선환아카이브 소장)
김정숙 교수는 학술대회를 여는 인사말에서 “충분한 신학적 토론이나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신학적 논리도 없이 마녀사냥처럼 몰아친 당시 교권의 종교재판은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덮고 지나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고 당시 종교재판을 비판하고 “1992년 5월 감리교 종교재판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는 왜 일어났는지, 그래서 무엇을 얻었으며 그 이후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어떠했는지 묻고자 한다”고 학술대회를 여는 이유를 밝혔다.
▲ 격려사 /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주최측을 격려하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17년간 변선환 교수와 같은 대학의 교수였던 민영진 박사(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는 “예수께서는 전혀 이단을 만들지 않 으셨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이단 집단으로 몰리는 혐오와 폭력의 한 가운데에 서 계시기도 했다”는 말로 이단으로 몰린 변교수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을 것을 염려한 예수의 말씀(마13:29b-30)과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그래도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딛 3:10) 했다는 성경 처방을 들려주며 “교회를, 혹은 성도를 이단에게서 보호한다는 구실로 교회가 종교재판을 열고 이단 감별사들이 이단을 솎아낸다는 것은 밀과 가라지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과도 배치된다”고 당시의 종교재판이 비성경적 행위였음을 비판했다.
▲ 격려사 / 도올 김용옥(한신대 석좌교수)
도올 김용옥 교수(한신대 석좌교수)는 변교수와 홍교수의 교수 및 목사 자격을 박탈한 1991년 총회 결의 직후 「TV저널」에 이를 비판하고 유감을 표하는 글을 기고한 사실을 알렸다. 당시 도올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변교수의 주장이 “이미 다원화된 한국 종교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정확한 메시지”이고 “1951년 위팅겐회의가 교회중심주의, 배타주의, 개종주의 선교를 표방하는 제국주의, 즉 서구 식민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이래 꾸준히 진행되어온 국제 기독교 사회의 상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로 변교수의 다원주의적 입장을 옹호했었다.
또 “모든 창조와 완전은 과정일 뿐이며 완결된 것일 수 없다. 기독교의 역사도 완결된 것일 수 없다. 보수 진영이든 진보 진영이든 그 존속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그 양자의 과정은 오로지 공존과 대화의 변증법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말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교회를 강조하고는 “여기에 “세속의 힘”을 빙자하여 같은 하나님의 사도에게 파문이라는 인위적 폭력의 죄악을 부과하려 한다면 그들이야말로 광주사태를 일으킨 5공 세력보다 더 무서운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들이다“라고 배타성에 의존했던 종교재판을 비판했다. 도올은 배타성을 향해 ”배타는 하나님의 적이요 선교의 거부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도올은 ”감리교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특별총회를 열어 변 선생님의 신원을 회복하는 결단을 감행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도올은 일아가 집중했던 ‘토착화’를 거론하기도 했다. 변교수의 ‘토착화’를 ”비인과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역설적이어서 ‘껄끄러운’ 기독교적 삶의 논리를 인과적이고 상식적이고 순리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실존적 고뇌의 과정“이라고 본 도올은 ”그 토착에는 다원적인 심층의 복합구조가 있으며, 그 복합구조 속에는 기독교에 상응하는 신성(Divinity)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자들에게만 다가온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필연적으로 기독교가 기독교를 넘어선 자리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종교의 새지평으로 확대되어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토착화에 천착하게 되면 종교다원주의의 지평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선환의 신학이 토착화와 종교다원주의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지니게 되는 핵심적 이유“라고 설명했다.
윤병상 연세대 명예교수와 정희수 감독(UMC)은 학술대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서면을 통해 변선환 교수를 추억하며 그의 명예회복과 북권을 기원했다.
윤병상 교수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반대했다가 강단에서 쫓겨난 도쿄제국대학의 야나이하라 교수를 소환해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면서 ”변선환 교수는 이 야나이하라 교수 같은 소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변 교수의 감리교 목사 복권이다.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 교리와 신학을 재정립하는 일이다.“라고 역설했다.
정희수 감독도 변교수를 향해 ”얇은 지성으로 신학을 서구 전통 기독교 식민주의를 앵무새식으로 전하는 일을 거부하고, 신학적인 진리를 한국의 토양과 종교적 심성을 통해 고백하신 한국교회 예언자“라고 평가하고는 그를 출교시킨 종교재판에 대해 ”바로 교권과 진리 수호라는 이름으로 감리교회에서 진행된 종교재판은 부끄러운 역사였고, 아름다운 양심과 신학적인 열정을 사대문 밖에 세운 십자가 위에 치켜세우고 공교회의 도리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뜻을 모아서 그릇된 수치의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고, 반추하는 일을 한국교회와 신학을 사랑하는 후학들을 통해서 공론의 장으로 여시니, 수고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고 학술대회 관계자들을 치하했다.
종교재판 30년,교회권력에게 묻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변선환 출교 조치 30년
일시 : 2022년 10월 31일(월) 오후 2:30~5:00
장소 : 프레스센터 20층
주최 : 변선환아카이브
공동주관: 감리교농촌선교목회자회, 감리교목회자모임 ‘새물결’, 고창좋은길벗들, 기독자교수협의회, 다석사상연구회, 다석학회, 동광원, 보인회, 비폭력평화물결,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생명평화기독연대, 생명평화마당, 시튼종교간대화모임, 에큐메니안, 예수더하기, 예수학당, 인문사회연구 백두, 종교평화원, 종교환경회의, 한국기독교연구소, 한국信연구소, 한몸평화, 함석헌평화연구소, 현제(김흥호)사상연구회, 해방신학연구소, 해천우회, 카리스마타수도회, 코리안아쉬람, 크리스챤아카데미,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
인사의 말씀
김정숙(변선환 아카이브 소장)
안녕하십니까?
변선환 아카이브 소장직을 맡은 김정숙입니다.
1992년 5월 감리교 서울연회의 종교재판위원회가 감리교 목사이자 감리교신학대학교의 학장이셨던 변선환 교수를 교단과 학교에서 출교시킨 이후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종교재판이란 그저 중세 유럽에서 교회권력이 저지른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의 유물로만 알고 있었던 당시의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생들은 중세도, 구한말 선교 초기도 아닌 20세기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일어난 초유의 종교재판 사태로 존경하는 학자이자 스승님을 잃었습니다.
종교재판이 있은지 30년, 그동안 심판자의 자리에 앉았던 감리교 목사님들 그리고 피고석의 자리에 앉아야만 했던 변선환 교수님, 종교재판에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이 이제 세상을 떠나시고 안 계시지만 저희의 마음에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와 해소되지 않은 문제들로 남아있습니다. 충분한 신학적 토론이나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신학적 논리도 없이 마녀사냥처럼 몰아친 당시 교권의 종교재판은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덮고 지나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이제 종교재판 30년, 이 자리를 통해 가슴 속에 묻어둔 질문들, 해소되지 않은 문제들을 함께 묻고 대답하며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992년 5월 감리교 종교재판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는 왜 일어났는지, 그래서 무엇을 얻었으며 그 이후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어떠했는지 묻고자 합니다. 그리고 비록 30년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변선환” 이름에 덧씌워진 오도된 사실을 바로 잡기를 원합니다. 이는 변선환의 이름은 단지 교권의 희생당한 과거의 한 인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미래도 계속되는 종교 권력의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모형이 되기 때문이며 인류를 위한 성숙한 기독교의 상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격려사
변선환 교수를 추억하며
윤병상(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변선환 교수는 예언자였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한 대언자였다. 한국 감리교회에 신학과 신앙은 있는가? 신학 없는 신앙은 무속 신앙이다. 무속은 창시자도, 신학도, 교리도 없다. 나는 오늘 일본의 그리스도인이었던 교수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무교회를 창시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는 신문 기자였다. 일과가 끝나면 도쿄제국대학 학생들에게 성서를 강의했다. 그에게 성서를 배우던 학생 중에 경제학부 학생인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 原忠雄, 1893~1961)가 있었다. 그가 성인이 되어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있었다. 그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때 야나이하라 교수는 혼자서 성명서를 냈는데 “이번 전쟁은 일본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니 즉시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일본 문부성은 야나이하라 교수가 성명서를 철회하면 불문에 부치겠지만 철회하지 않으면 파면하겠다고 통보했다. 문부성은 세 번을 종용했지만 그는 파면을 하라고 답변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파면했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후 일본은 패전했고, 도쿄제국 대학은 폐교되었다.
1946년, 도쿄제국대학이 도쿄대학으로 다시 개교하고 초대 총장으로 그를 추천했으나 그는 세 번이나 사양했다. 그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맥아더 사령관은 그의 고향으로 찾아가, “여론 조사에서 일본 국민이 당신을 추천했으니 총장으로 와달라”라고 간청했다. 그때 야나이하라 교수는 총장은 할 수 없으나 평교수로 강의하겠다고 약속하고 개교하는 날 출근했다. 그런데 맥아더 사령관은 그를 그날 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고, 교수와 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동경대학 학생들에게 성서를 강의했다.
변선환 교수는 이 야나이하라 교수 같은 소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변 교수의 감리교 목사 복권이다.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 교리와 신학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자들은 민중신학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신학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국 감리교회의 자랑인 ‘교리적 선언’을 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풀이해서 책으로 출판하는 일이다. 이것이 변선환 교수가 원하는 신학과 신앙의 일치일 것이다.
하늘나라
― 변선환 교수 종교재판 30주년에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변선환 교수 종교재판이 오늘로 30주년입니다. 제가 1971년에 감리교신학대학교 전임강사가 되고,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가 되기까지, 그러다가 대한성서공회의 성경전서 표준새번역(1993) 마무리를 위해 대학을 떠난 1987년 12월까지, 17년을 변선환 교수와 같은 대학의 교수로 있었습니다.
변선환 교수의 종교재판 30년을 생각하다가 문득,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비유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13:31-33)는 이야기와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마13:24-30)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재판이 많은 이단을 만들어 낸 것도 생각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께서는 전혀 이단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이단 집단으로 몰리는 혐오와 폭력의 한 가운데에 서 계시기도 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도(道)”, “그리스도의 도(道)”, 혹은 “기독교”가 이단으로 몰린 경우를 우리는 신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변호사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하면서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행 24:5. 개역),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행 24:5. 개정)”, “나사렛 사람들로 구성된 이단 집단의 주동자”(행 24:5. KJV)라고 고발합니다. 여기에서 “나사렛 이단”이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단”이란 말입니다.
고발자가 이렇게 고소하니까,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 반론을 펼칠 소명(疏明)의 기회를 줍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기를 고발한 자들이 “이단”(하이레시스)이라고 하는 그 ‘도(道)’를 따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고발자들이 믿는 바로 그 하나님이고, 자기가 읽는 성경이 바로 고발자들이 읽는 것과 같은 성경이고, 따라서 자기는 자기를 고발한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道)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행24:14. 새번역)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도(道)”는 예수의 도, 곧 기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당신의 생각[혹은 계획]이 사람의 생각[혹은 계획] 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사 55:8). 종교재판의 역사를 회고할 때마다 떠오르는 본문 말씀입니다.
초림(初臨)에서도 그리고 예상되는 재림(再臨)에서도 그러할 것이 예상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유대교 당국 자들에게서 믿음이라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異邦 人)에게서, 이스라엘에게서는 보지 못한 “큰 믿음”, “많은 믿음”, “도타운 믿음”을 보시고서 놀라시는 예수를 우리는 복음서에서 만납니다.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로마의]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6 말하였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8 백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10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 8:5-10). [번역에 따라서는 “이렇게 큰 믿음” “이렇게 도타운 믿음”(“so great faith” KJV, ASV; “such great faith” NIV; “this much faith!” CEV)”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또 예수께서는 재림 때,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 당신이 세상에서 “믿음”(faith)을 혹은 “믿음 가진 사람”(“anyone with faith”. CEV)을 만나볼 수 있겠느냐며,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 믿음을 신뢰할 수 없는 당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셨습니다. “인자(人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눅 18:8b. 새번역). 당신께서 오셔서 “믿음”을 혹은 “믿음 가진 사람”을 보시지는 못하셔도 이단 심문관들과 그들이 감별해 낸 이단은 많이 보실 것 같습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를 대비해서라도 우리끼리는 제발 서로 다른 점 부풀려 나뉘지 말고,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서로 소중히 여겨, 그 씨가,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로 자라게 하는 것, 이것이 성숙한 믿음일 것 같습니다. 누가 이단이면 한두 번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는 것이 사도의 권면입니다(딛 3:10). 혐오를 선동하는 것이 믿음일 수 없지요. 폭력을 경쟁하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일 수도 없지요.
31b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13:31b-32. 새번역).
교회를, 혹은 성도를 이단에게서 보호한다는 구실로 교회가 종교재판을 열고 이단 감별사들이 이단을 솎아낸다는 것은 밀과 가라지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과도 배치됩니다. 종들은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내자고 했지만, 주인은 생각이 종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29b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마13:29b-30. 새번역).
하늘나라가 그렇게 오니까요, 가라지 걸러내는 건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할 일이니까요, 바울의 관심은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를 구분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그래도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는 처방을 내린 바 있습니다(딛 3:10. 개정).
졸시, 산문시 한 편 낭독합니다.
하늘나라
예수는 하늘나라가 겨자씨와 같다 하였다 예수는 이단으로 처형을 받으면서도 누구를 이단으로 단죄한 일이 없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믿음을 못 본 초림(初臨) 예수, 오히려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못 본 믿음을 보고서 놀란 예수, 예상되는 재림(再臨)에서도, 인자(人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는 자를 만나 볼 수 있겠느냐며 미래의 신자가 지닌 믿음마저 지레 신뢰하지 못하는 예수,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이단이면 한두 번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는 것이 사도의 권면이다. 혐오를 선동하는 것이 믿음 아니다 폭력을 경쟁하는 것이 거룩함 아니다 서로 다른 점 부풀려 갈라지지 말고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서로 소중히 여겨 그 씨 새들 깃들이는 나무로 자라게 할 일이다 하늘나라가 그렇게 오니까 가라지 갈라내는 건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할 일이라니까
_ 민영진
도올, 변선환을 말한다
도올 김용옥
1991년 11월 22일자 「TV저널」 이라는 연예잡지의 표지에 김완선이라는 가수가 매혹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실려있고, 그 한 귀퉁이에는 내 사진과 함께 “김용옥 칼럼 ─ 구원은 어디에 있나?”라는 표제가 실려있다. 지금은 김훈(金薰) 하면 지고의 소설가로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있지만 그 당시는 한국일보 기자 생활을 청산한 후 TV저널의 편집부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사정사정 애걸하여 “도올유예”(檮杌遊藝) 라는 두 페이지짜리 고정 칼럼을 써달라고 하여 나는 그의 청탁을 받아들였다. 그 네 번째 칼럼이 “배타(排他)는 하나님의 적(敵)”이라는 제하에 쓴 글이다. 여기 그 전문을 옮길 수는 없겠으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글이므로 간략히 인용하고자 한다.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천하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4장 12절의 말씀이다. 과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주체가 예수 하나뿐일까?
구약적 세계관이든 신약적 세계관이든 서양의 종교 전통이 말하는 하나님에게는 서로 공존키 어려운 두 모습이 겹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끈질기게 교회사를 괴롭혀왔다. 하나는 배타적인 질투의 하나님이요, 또 하나는 포용적인 사랑의 하나님이다. 전자는 구약의 하나님이요, 후자는 신약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예수의 하나님도 구약적 하나님으로 해석되어 모든 그리스도론을 장악했다. 우리 인간의 일상적 정리를 보아도 질투(배타)와 사랑(포용)은 동일한 감정의 두 모습인 것 같다. 남녀의 사랑도 시시각각 무서운 질투로 변한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과연 인간을 “구원” 받아야 할 존재로 설정해야만 하는가라는 주제와 걸리고 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어떠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구원을 한다는 것이냐? 교회만 나가면 구원이냐?
라오쯔(老子)는 아예 신, 즉 궁극자가 궁극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면 안 된다(天地不仁)라고 갈파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만들어주고 베풂이 있고 은혜가 있고 함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仁者, 必造立施化, 有恩有爲). 만들어주고 베풂이 있으면 만물이 그 본래 모습을 잃어버릴 것이요, 은혜가 있고 함이 있으면 선택함이 있게 되어 만물이 다 같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造立施化, 則物失其眞; 有恩有爲, 則物不具存). 마치 구약의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기 때문에 궁극자는 스스로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따라서 만물은 스스로 서로 질서 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天地任自然, 萬物自相治理). 이러한 라오쯔의 생각에는 “구원”이라는 문제가 근원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라오쯔의 생각은 동아시아 문명 전체의 기저이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불교는 인간의 궁극적 조건인 신성, 즉 불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멸절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애착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멸집(滅執)이며, 멸집이야말로 해탈, 진정한 자유의 조건인 것이다.
최근 감리교단 특별총회에서 감리교 신학의 원로이며 한국기독교의 리버럴한 전통의 존경받는 기수이며 탁월한 학자인 변선환 학장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육체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홍정수 교수의 교수 및 목사 자격 박탈 건의를 가결한 것은,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 아펜젤러가 인천항에 첫발을 디딘 이래 처음 있는 일이며, 또 기독교 내·외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의 보수화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게 하는 심히 유감스러운 사태이다.
감리교는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중심이 된 옥스퍼드대학 학생운동으로서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힘에 의하여 신앙인의 개인적 삶에 근원적 변화가 일어나게 만드는 다양한 방법을 제창하면서 일어난 영적인 부흥운동이었다. 이들은 성령주의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산업혁명 초기로부터 발생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장의 설교(open-air preaching)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 주체세력이 매우 엘리트 그룹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리버럴한 신학 전통을 성령주의와 동시에 성립시켰다.
성령이란 본시 조직이나 형식, 이론이 고착되었을 때 그를 파괴하는 신선한 래디컬리즘으로 등장한다. 성령 그 자체가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 아펜젤러 사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정동교회 담임목사가 된 최병헌(崔炳憲, 1858~1927. 1902년 담임목사가 되어 12년 재직)은 훌륭한 유학자였으며 끝내 유학자이기를 버리지 않았다. 서양지천(西洋之天)과 동양지천(東洋之天)이 결국 같은 하나님(天)이라고 생각했으며, 동양지천에는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인격성이 좀 부족할 뿐이지만, 공자가 말하는 모든 세속 윤리는 기독교인의 신앙체계 즉 삶의 체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편협한 배타주의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각 종교의 역사와 교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변선환 선생이 주장하는 바, 기독교(교회) 밖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은, 지금 새삼스럽게 거론된 바도 아니요, 또 이설을 세우기 좋아해서 외쳐대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원화된 한국 종교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정확한 메시지이며, 1951년 위팅겐회의가 교회중심주의, 배타주의, 개종주의 선교를 표방하는 제국주의, 즉 서구 식민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이래 꾸준히 진행되어온 국제 기독교 사회의 상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1968년 WCC는 다이얼로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으며 카톨릭에서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Second Vatican Council, 1962~1965)는 맑시스트·무신론자를 포함하여 선의를 가진 다른 종교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언했다. 1990년 6월, 취리히 옆의 소도시에서 신학자들이 모여 선언한 바아르 스테이트먼트(Baar Statement)는 포괄주의를 지양하고 다원주의로 그 패러다임을 이전시켰다. … 이제 인류의 종교사는 교회 중심 선교에서 하나님 중심 선교(Missio Dei)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한다면 이 세계 또한 하나님을 창조한다. 하나님이 완전하고 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면, 이 세계 또한 완전하고 하나님이 불완전하다. 모든 창조와 완전은 과정일 뿐이며 완결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역사도 완결된 것일 수 없다. 보수 진영이든 진보 진영이든 그 존속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그 양자의 과정은 오로지 공존과 대화의 변증법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여기에 “세속의 힘”을 빙자하여 같은 하나님의 사도에게 파문이라는 인위적 폭력의 죄악을 부과하려 한다면 그들이야말로 광주사태를 일으킨 5공 세력보다 더 무서운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들이다. 이러한 폭력을 우리는 묵과해서는 안 된다. 변선환 목사와 같은 우리 교계의 양심과 양식이 그 날카로운 목소리를 오늘날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를 지지하는 젊은 학도들 그리고 그의 트인 생각과 인간됨을 존중하는 우리 사회의 모든 휴머니스트들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유대감과 사랑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실에 도전하는 모든 죄악은 결국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괴멸될 것이다. 배타는 하나님의 적이요 선교의 거부다!
이 글을 몇 사람이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감리교회 교단 특별총회에서 변선환 선생님의 목사 직을 박탈한 것이 1991년 10월 31일의 사건이므로, 그 사건이 있은 지 불과 열흘 만에 나온 이 글은 공적인 사회적 매체를 통하여 일반에게 공개된 글로서는 아마도 최초의 글일 가능성이 높다.
대중매체의 잡지 글이라는 것이 매우 촉박한 시간 내에 완성되어야 하므로 충분한 정보수집과 검토와 숙고의 여백이 모자라는 가운데 쓰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면 두 페이지라는 문자 공간을 확보하여 사태의 전체적인 의미를 대중에게 전달하는데는 과히 부족함이 없었다고 확신한다. 무엇보다도 당시 이런 글이 즉각적으로 사회평론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김훈이라는 탁월한 식견을 지닌 편집부장이 잡지를 장악하고 있었고, 또 김훈 부장은 나에게 내 컬럼 공간에 대한 전권을 부여해주었고, 일체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 글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졌다. 내가 평소 존경하는 사상가에게 부과된 터무니없는 정죄의 죄악에 대해 소신껏 항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때는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으니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고 있다는 조짐을 조금이나마 느끼기 시작할 때였다. 그러나 감리교단의 행동은 몰상식의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변선환 선생의 주변의 인물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변선환 문하에서 자라난 이정배와 같은 동량과 개인적 연락이 없었다. 결국 몇 달 후, 1992년 5월 7일, 감리교 서울연회 재판위원회는 다시 종교재판을 열어 변선환의 출교를 결정하였다. 파문이었다! 파문이 그의 학문적 입장이나 정신세계에 어떤 본질적인 파문을 던졌을리 없지마는 불과 3년 후, 1995년 8월 8일, 그는 홀로 그의 서재에서 원고를 쓰시다가 소천하시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나이 불과 68세, 지금 나의 처지를 비추어 보아도, 너무 일찍 세상을 뜨셨다는 안타까움이 새삼 분노로 치밀어 오른다. 파문의 충격이 없을 리 없다. 단지 주희(朱熹, 1130~1200)처럼 글을 쓰시다가 책상에서 좌탈하셨다는 소식은 한없이 부럽게 느껴진다. 주희는 『대학장구』를 매만지고 있었다는데, 우리 선생님은 한국 역사의 미래를 걱정하는 논문을 쓰고 계셨다:
“오늘의 한국은 서구 근대화를 피상적으로 모방하지 말고, 한국 종교 속에 움트고 있었던 적극적인 요소들과 만나면서 참으로 알찬 한국적으로 토착화된 근대화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의 최후 일언은 역시 신학함의 주체성을 강조하던 대인(大人)의 우환의식의 정면(正面)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우리 역사는 그가 외치던 “토착화된 근대화 모델”로부터 염치없이 멀어만 가고 있다.
나의 고전 강독 집회에 열심히 나오시던 감리교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 분은 매우 폭넓은 사고와 깊은 지식과 경건한 신앙을 구유하신 분이었다. 이 목사님은 말년에 변선환 선생님과 가깝게 왕래를 하셨다. 그 목사님이 전해주는 한 일화는 변 선생님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변선환 하면, 그 인간을 말해주는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유모어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웃긴다는 것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의 껄끄러움을 유모어로 매끄럽게 다듬고 넘어가는 것이 그의 인생역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변선환과 강 목사는 강화도 어느 곳을 지나고 있었다. 강 목사의 목회 장소가 강화도였다. 거대한 감나무 고목 밑에서 쉬어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감나무 속이 썩어 텅빈 것을 보자 정색을 하고 몇 발치 떨어져서 나무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무! 네 이놈! 넌 어찌 목회도 안 해본 놈이 속이 그렇게 썩었느냐?”
참 기발한 유모어라 하겠으나 변 선생님의 썩은 속을 보여주는 일화라고도 하겠다. 나는 말한다. 감리교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특별총회를 열어 변 선생님의 신원을 회복하는 결단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퇴계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퇴계 학문에 못지않은 독특한 일가를 형성한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수제자 래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인조반정으로 참수당함으로써 남명의 학맥도 다 끝나버렸다. 정인홍의 관작이 회복이 안되었기에 남명도 잊혀졌다. 결국 정인홍은 구한말에 이르러서야 (1908) 신원되었는데, 하여튼 20세기 말에 이르러서 남명학은 크게 부흥되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사상적 성향의 차이 때문에 파문의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감리교 교단의 자체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감리교 신학의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일아(一雅) 변선환의 정위치를 회복시키는 작업을 언젠가는 반드시 실행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나의 말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언젠가는 나의 말대로 행하게 될 것이다. 복(復)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본다라는 역(易)의 언어를 되씹게 될 것이다.
나는 1982년에 하바드대학에서 학위를 끝낸 후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그 때 안병무 선생님은 내가 동방 고전에 관한 필로로기의 탄탄한 기초를 지닌 학자로서 기독교 신학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인지하시고 당신이 발행하는 「신학사상」의 편집위원으로 초대하여 주셨다. 그때 편집위원 중의 한 분이 변선환 선생님이었다. 덕분에 편집회의에서 신학자 선생님 여러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여러 주제에 관해 토론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나는 고려대학을 떠났고, 또 1990년부터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생이 되었는데, 그 시절에 변선환 선생님은 원광대학교 교학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셨기 때문에 가끔 열차간에서 선생님을 뵈올 수 있었다.
그러나 변 선생님과 학문적 토론을 깊게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기억은 별로 없다. 선생님께서는 동양철학에 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지만, 나와는 관심 분야가 일치하지 않았고 언어의 질감이 좀 달랐다. 선생님의 동방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 담론 속의 동방학이며, 신학적 개념의 필터를 거친 철리의 세계이다. 나는 원칙적으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필터를 전제하지 않는다. 선생님의 언어는 매우 제너럴하고 화려하다. 그런데 비하면 나의 언어는 매우 스페시픽하고 드라이하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언어는 매우 계발적이다.
내가 감히 선생님의 정신세계에 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보냐마는 내가 느낀 인상을 간략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안병무의 신학세계는 매우 구체적인 하나의 텍스트가 있다. 그 텍스트는 성서이며, 성서중에서도 신약이며, 신약 중에서도 예수의 삶을 담은 복음서이며, 복음서 중에서도 케리그마화 되기 이전의 갈릴래아 황토흙이 배인 “사람이야기”같은 것이다. 불트만은 초대교회의 담론이 아닌, 그 이전의 역사적 담론은 복음서에 남아있지 않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담론에 관해서는 불가지론적인 인식론적 입장을 취한다. 안병무는 그러한 불가지론을 뚫고 갈릴래아 황토흙 배면을 쑤셔댄다. 그리고 그곳에서 민중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발견된 민중은 “실체”(Substanz)가 아닌 “사건”(Ereignis)이다. 그러니까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복음서를 철저히 분해하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도달한 결론이다. 그 해체 방법의 방법론에는 유니크한 안병무의 실존이 자리잡고 있다. 안병무는 매우 독창적인 사상가이다. 그의 성서는 지구상에 용케 살아남은 희랍어 파편들일 뿐 아니라, 청계천의 전태일의 삶, 북간도 하늬바람의 고난을 홀로 이겨내는 선천댁,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진짜 그의 성경이다.
이에 비하면 변선환은 텍스트가 다르다. 변선환의 텍스트는 성서라고 말하기보다는 (물론 성서를 텍스트로 하지 않은 신학자는 없다), 신학 그 자체이다. 그가 그의 삶을 통하여 탐구로 삼은 것은 모든 유형의 신학적 디스꾸르이다. 그는 지구상에 존재한 모든 유형의 신학적 사고, 신학적 체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민중신학이 성서를 바라보는 하나의 유니크한 시각이라고 한다면, 인간세의 시공을 통하여 제기된 그와 같은 모든 유니크한 시각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변선환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가 끝나갈 때까지 활발하게 진행된 모든 신학 담론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모든 것에 안테나 역할을 했다. “올꾼이”라는 말에 “바보스럽다”는 의미가 전면에 드러난다지만, 그 배면에는 그야말로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 떠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배어있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안병무는 철저히 성서 속으로 파고 들었지만 변선환은 신학 담론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즉, 신학 담론을 생산해내고 있는 “세계”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한 사상가의 생애에 있어서 그 사상 성향을 지배하는 것은 역시 최초로 자기 삶의 지향점을 발견하는 순간의 영감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 사상가의 현존의 줄기에 매우 지속적인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그 영감의 원천은 그가 18세 때 만난 늙은 백발의 한 목사님이었다. 3.1독립만세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한 사람으로, 끝내 6.25전쟁통에 총살당하기까지 신앙의 절개를 한 번도 잃지 않은 순결한 영혼이었다. 변선환은 말한다: “그의 위대성은 복음을 동양 종교의 콘텍스트 속에서 해석하여 변증하려고 하였던 데 있었다. 동양 종교와의 대화 속에서 증거되는 그의 설교는 동양적 신학 또한 한국적으로 토착화한 신학의 원형이다.”
여기 변선환의 신학 세계를 대표적으로 이름지우는 “토착화”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내가 신학대학을 다닐 때 즈음, 신학계는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말이 매우 유행하고 있었다. 토착화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적 삶과 한국인의 토착적 삶이 매우 다른 양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를 일자가 타자를 묵살하고 지나가면 그뿐이겠지만, 도저히 그런 묵살이 불가능할 정도로 양자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거나 객관적으로 대등한 가치가 인정될 때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소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류문명사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이다. 어느 시공에 떨어지든지 자기만이 옳고 타자는 무조건 개종이나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폭압적으로 강요하는 십자군 신학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기독교 신앙을 수용한 이들은 느끼지 못한다. 은재(殷哉) 신석구(申錫九, 1875~1950) 목사는 깊은 유학자의 소양 속에서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감지한 심오한 신앙인이었다.
기독교적 삶의 논리는 하여튼 껄끄럽다. 껄끄럽다라는 것은 비인과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토착적인 삶은 인과적이고 상식적이고 순리적이라는 것이다. 어린 변선환은 그 껄끄러운 역설들을 삶의 지향처로서 인지하였을 때, 그 파라독스의 강렬함과 과제성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그의 신학 여정은 그러한 껄끄러움을 해결해나가는 실존적 고뇌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토착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나는 신학을 토착화하는 수고 속에 내 인생을 바치지 않겠다 하고, 토착화할 것이 아니라 내가 “토착”이 되어버리겠다 하고 신학대학을 나와버렸다. 그러나 나의 시대와 변선환의 시대는 패러다임이 다르다. 나에게는 “토착”이라는 세계가 전 인류의 새로운 비전으로서 당당한 개벽의 서광을 발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내가 기독교에 충성심을 지켜야 할 만큼 기독교는 순결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토착화를 외친 신학자들에게 기독교는 애착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개화기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전한 정신적 자산이었다. 기독교의 토착화는 그들에게는 성실한 의무였다. 토착화의 토착이라는 문제의식은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에 의하여 말살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독자적으로 지닌다는 생각을 지닌 자들에게만 다가온다. 그리고 그 토착에는 다원적인 심층의 복합구조가 있으며, 그 복합구조 속에는 기독교에 상응하는 신성(Divinity)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자들에게만 다가온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필연적으로 기독교가 기독교를 넘어선 자리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종교의 새지평으로 확대되어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토착화에 천착하게 되면 종교다원주의의 지평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선환의 신학이 토착화와 종교다원주의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지니게 되는 핵심적 이유이다.
다원주의는 비빔밥이 아니다. 비빔밥 속에 포함되는 모든 요소를 그 나름대로의 생성의 논리를 따라 정확하게 독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원주의는 제국주의적 폭력을 철저히 배격할 때만이 시작될 수 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비교”라는 말이 유행했다. 동서 문화 비교론이니 비교종교학이니 비교철학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유행했다. 나도 한때 비교철학에 심취했다가, 곧 비교는 할 짓이 아니라고 판결을 내렸다. A와 B를 비교하는 것, 비교 그 자체가 학문이 될 수는 없다. A와 B를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A를 공부하고 B를 공부해야 한다. A와 B는 따로따로 연구되어야 한다.
변선환에 대한 나의 추억은 한없이 유머러스한 사람인데, 그의 유모어는 그의 존재의 겸손으로 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를 개방하고 자기를 끝없이 낮추는 것이다. 변선환은 아상(我相)을 철저히 버렸다. 타 종교를 대할 때에 철저히 나를 버렸다. 그의 낮춤과 개방은 바닥이 없었다. 노자가 말하는 “무”(無)나 불교가 말하는 “무아”(An ā tman)를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종교다원주의적 삶의 실천 속에서 구현하였다. 그는 그 많은 신학자 속의 민중이었다. 천대받고 이단시되고 그러면서도 철저히 봉사하는 개방된 고도의 지성이었다.
그의 웃음과 비애와 낮춤은 “20세기의 낭만”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새삼 변선환이 그리워진다.
人無孔子意如同
衆非基督自求脫
南浦書香抱四海
上下攝通易生活
사람이 공자가 아니더라도 그 뜻이
공자와 같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수운의 말이다.
민중은 그리스도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구원을 추구할 수 있다.
진남포의 서향 속에서 자란 一雅는
사해의 모든 사유를 가슴에 품었다.
초월과 내재가 하나로 다 통해버리니
生生하는 易의 세계가 생명으로 가득하다.
2022년 10월 11일
이정배 교수의 부탁으로 낙송함에서 붓을 옮기다.
변선환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에게 이 소론(小論)을 바친다.
믿음의 신화적인 스승 변선환을 기리며
정희수(전 감리교 감독)
부끄러운 역사를 회자하는 일은 우리들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됩니다. 진리와 부정이 전도된 공적인 사건은 시간이 갈수록 원죄처럼 부끄러운 민낯으로 기억되고 비판적인 자성을 하게 합니다.
바로 교권과 진리 수호라는 이름으로 감리교회에서 진행된 종교재판은 부끄러운 역사였고, 아름다운 양심과 신학적인 열정을 사대문 밖에 세운 십자가 위에 치켜세우고 공교회의 도리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의 교사였던 변선환 선생님은 한국 교회사에서 세기적으로 쉽게 뵈울 수 있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신학 강단과 신학 교육에 환한 빛을 가져오셨던 올꾼이 선생님, 변선환을 세계교회는 지성과 영성의 광맥으로 회고하고, 그 어른의 학문과 신앙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크신 어른이었습니다. 신학적인 비전과 세계 종교계에 던지신 믿음의 고백과 삶의 실존은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가슴에 멈추지 않는 파도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얇은 지성으로 신학을 서구 전통 기독교 식민주의를 앵무새식으로 전하는 일을 거부하고, 신학적인 진리를 한국의 토양과 종교적 심성을 통해 고백하신 한국교회 예언자이셨습니다. 제자 사랑의 큰 산이셨던 어른을 우리 생에 모시고 산 것만으로도 우린 감사와 은혜의 덕을 누리었고, 뜨거운 열정의 가르침을 받은 시간들이 영원의 문을 열어 주셨기에 믿음의 신화적인 스승으로 늘 그리워하게 됩니다.
다시 뜻을 모아서 그릇된 수치의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고, 반추하는 일을 한국교회와 신학을 사랑하는 후학들을 통해서 공론의 장으로 여시니, 수고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더 선한 길로, 더 포용과 환대의 길로, 신학적인 광맥을 더욱 깊이 파내는 신학계와 한국교회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길 자비하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때 길들여진 통속과 교권이 세속의 영예와 교회 부흥의 이름을 치켜들고, 안타깝게 진리의 교사를 종교재판의 이름으로 심판하였으나, 그것이 한국교회 목줄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아직 우리 목에 걸려서 생명과 복음의 순구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교회를 여전히 속박하고 옥죄고 있습니다.
수천 년 교회사 속에서 이단 정죄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저주, 화형, 종교재판, 마녀사냥, 식민주의, 반문화적 편견과 종교 제국주의는 오늘 공교회 속에서 거절되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 열린 교회가 되지 못하면 우린 과거사의 부정을 작게 크게 여전히 현재에서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고, 이사야의 담론이 지적한 바리새인의 모습,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2:39-40). 그 길을 혼돈과 무지 속에서 반복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분명 열린 담론이라고 믿습니다.
벌써 뒤돌아보기 싫었던 현대판 종교재판이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는 사실은 잊고 싶은 종교 권력의 편견과 독선이었습니다. 복음 수호의 근본주의는 우주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광대한 빛에 허물어져야 하고, 이제 화해와 평화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만방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합니다.
썩는 밀알로 제자의 삶을 사신 우리의 스승 변선환 선생님, 예언자적인 신앙과 넓은 가슴의 신학적인 열정으로 지금도 우리를 보우하시는 선생님의 영을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위스콘신에서
정희수
1부 / 종교재판 30년, 회고와 성찰
발표 1 송순재(감신대 은퇴교수)
“사랑과 열정, 변선환의 신학 여정”
발표 2 이정배(현장아카데미 원장)
“죽어야 사는 기독교 ― 타자 부정에서 자기 부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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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_ 종교재판 30년, 회고와 성찰 / 송순재(감신대 은퇴교수), 이정배(현장아카데미 원장)
2부 / 종교재판 30년, 그 ‘以後’
사회 장왕식(감신대 은퇴교수)
발표 1 한인철(연세대 명예교수)
“불가결의 상호보충 ― 하나의 시도”
발표 2 이호재(전 성균관대 교수)
“한국 종교와 한국교회의 화해를 위한 ‘풍류 담론’”
발표 3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소장)
“감리교 종교재판, 한국적 ‘보편종교’를 향한 진통과 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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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종교재판 30년, 그 ‘以後’ / 사회: 장왕식(감신대 은퇴교수). 발표: 한인철(연세대 명예교수), 이호재(전 성균관대 교수),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소장)
변선환 교수 종교재판 경과
1. 1990년 11월 24일 가톨릭 문화원 주최, “기독교, 불교, 천주교 대화모임” 중, 변선환 교수 “불타와 그리스도” 논문 발표.
2. 1990년 12월 8일 「크리스챤신문」에서 “기독교 배타적 사고서 벗어나야”라는 제하에 변선환 교수의 “불타와 그리스도” 요약 게재.
3. 1991년 3월 18일 서울남연회에서, 박기창, 이성국, 김순태, 정동광 등 4명의 목사 이름으로 된 건의안 상정됐는데, 여기에는 변선환 교수가 “불타와 그리스도”에서 논했던 주장을 전체 논문의 맥락에서 논의 ‧ 이해한 것이 아니라, 6개 항으로 앞뒤 잘라내고 문제제기 함(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신학적 모색이 요청된다 … , 요단강 중심의 유대문화에서부터 다원주의를 상징하 는 태평양 한강 중심의 신학이 개발 되어야 한다 … ,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해야 한다 … ,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 천동설에 불과하다 … , 종교는 익명의 기독교이다 … , 예수 를 절대화 우상화시켜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 인물로 보려는 기독교 도그 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서울남연회는 총회실행위원회에 신학심의회를 두어 감리교 신학에 대해 심의할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
4. 1991년 10월 감리교 특별 총회, 회원수 1,385명 중 301명이 참석하여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신학의 입장은 감리교회 신앙과 교리에 위배되는 것임을 결의”.
5.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신학을 주장하는 변선환 목사와 홍정수 목사에 대하여 제재 조 처 방안을 논의하매 해당 기관 재단이사회에 면직하도록 하는 총회 결의를 통보하고, 당해자 가 소속한 연회의 감독은 장정 199단 제8조에 의거하여 심사위원회에 회부케 하자는 리승수 목사의 동의와 임덕숙 장로의 재청을 찬성(찬성 299, 반대2), 가결하다.”
6. 1991년 11월 21일 힐튼호텔에서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 조직, 공동회장으로 김홍도 목사와 유상렬 장로 선출.
7. 1991년 12월 2일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는 서울연회 감독과 심사위원 앞에서 “변선환과 홍정수 두 목사는 이단 사상을 교수하고, 통일교 거물급 인사를 5년 동안 비호, 졸업시켰다”고 고소.
8.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는 「 조선일보 」 1992년 1월 26일자에 “변선환, 홍정수 교수의 이 단 사상 및 통일교 연루 사실을 폭로한다”라는 광고에서 “감신대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 의 주장은 적그리스도 또는 사탄의 역사이므로 반드시 추방해야 하며, 만일 이것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교단 분열도 불사할 것이다”라고 위협하며 여론 형성.
9. 1992년 2월 24일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위원장 나정희, 서기 조창식, 위원 이동우) 이름으로 변선환, 홍정수 교수를 서울연회에 기소
10. 1992년 4월 23일 감신대 교수들(김득중, 선한용, 이기춘, 김재은, 박창건, 이원규, 방석종, 장종철, 김외식, 타이스, 이정배, 박종천, 서현석, 왕대일, 김영민, 이후정, 송순재) 기독교대 한감리회 서울연회재판위원회에 두 신학자의 재판이 신학적으로 신중히 결정되기를 촉구하 는 성명 발표.
11. 1992년 5월 7일 금란교회에서 열린 종교재판(재판위원 15명 중 13인이 감리교교리수호대 책위원회 위원으로 구성: 최홍석 목사, 고재영 목사, 민선규 목사, 홍형순 목사, 임흥빈 목사, 금성호 목사, 박을희 장로, 김재민 장로, 곽노흥 장로, 신원보 장로, 이강모 장로, 김재국 장 로, 박완혁 장로)에서 변선환, 홍정수 교수 출교 선고.
12. 1992년 5월 28일 “감리교단을 염려하는 기도 모임” 발족하여 재판 결과에 문제 제기하고, “한국 감리교회의 전통과 웨슬리의 정신을 완전히 망각한 신학의 획일성과 배타주의가 지 배”하였다고 하면서, “교리와 신학을 토론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무시한 채 일부 임의단체의 힘이 교단 위에 군림하여 재판을 좌우하여 교단의 권위를 실추시켰음을 통탄”한다고 하면 서, 1992년 6월 1일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에 상고.
13. 그러나 1992년 10월 24일 감리회 총회에서 변선환, 홍정수 두 교수의 출교를 최종적으로 결정.
14. 1992년 10월 26일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는 「 국민일보 」 광고란에 “기독교대한 감리회 변선환, 홍정수 사건의 종결에 즈음한 성명”에서, “감리회 교역자들과 감리회 소속 대학의 교수들과 신학생들은 위의 사건(변선환 교수, 홍정수 교수 출교)과 관련하여 문제된 신학을 지지 및 옹호하는 경우에는 위와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됨을 명시”한다고 하면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신학생 등을 협박.
작성: 최대광 목사(감신대 객원교수, 공덕교회 담임목사)
변선환 제자들, 변선환 교수 출교조치를 돌아보고 교회의 갈길 제시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소위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지향했던 고(故) 변선환 교수(1927∼1995)가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고 출교당한 지 30년이 흐른 31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그의 제자들과 신학자들이 당시 사건과 그의 신학세계를 조명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를 주제로 연 이번 학술대회는 변선환 교수의 제자들이 만든 ‘변선환아카이브’가 주최하고 ‘여해 강원용 재단’, 엄상현 목사 등이 후원했다. 농목, 새물결, 생명평화마당, 한기연, 크리스찬아카데미 등 30개 단체가 공동주관자로 참여했다.
*공동주관 : 감리교농촌선교목회자회, 감리교목회자모임 ‘새물결’, 고창좋은길벗들, 기독자교수협의회, 다석사상연구회, 다석학회, 동광원, 보인회, 비폭력평화물결,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생명평화기독연대, 생명평화마당, 시튼종교간대화모임, 에큐메니안, 예수더하기, 예수학당, 인문사회연구 백두, 종교평화원, 종교환경회의, 한국기독교연구소, 한국信연구소, 한몸평화, 함석헌평화연구소, 현제(김흥호)사상연구회, 해방신학연구소, 해천우회, 카리스마타수도회, 코리안아쉬람, 크리스챤아카데미,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
학술대회는 변선환아카이브 소장인 김정숙 교수(감신대)가 인사말을 하고 윤병상(연세대 명예교수),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도올 김용옥(한신대 석좌교수) 교수와 정희수 감독(UMC)이 격려사를 하고 나서 1부 “종교재판 30년, 회고와 성찰”, 2부 “종교재판 30년, 그 ‘以後’”을 주제로 한 변선환 제자들의 발제가 있었다.
1부에서 송순재 교수(감신대 은퇴교수)는 “사랑과 열정, 변선환의 신학 여정”을, 이정배 교수(현장아카데미 원장)는 “죽어야 사는 기독교 ― 타자 부정에서 자기 부정으로”를 주제로 발제하며 당시 사건과 변선환 교수의 신학세계를 돌아보았다.
2부에서는 한인철 교수(연세대 명예교수)가 “불가결의 상호보충 ― 하나의 시도”에 대해, 이호재 교수(전 성균관대 교수)가 “한국 종교와 한국교회의 화해를 위한 ‘풍류 담론’”에 대해, 이은선 교수(한국信연구소 소장)가 “감리교 종교재판, 한국적 ‘보편종교’를 향한 진통과 선취”에 대해 각각 발표하며 한국 교회와 종교계가 나아갈 방향을 짚어 보았다. 이후 질의응답 형식을 빌어 참석자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뒤 마쳤다. 이날 학술대회는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앞서 지난 19일, 이정배 교수는 서울 한 음식점에서 이번 학술대회를 알리는 간담회를 열고 “이번 행사에서 그때 그들은 왜 종교재판을 일으켰고, 주체 세력들은 누구였는지, 종교재판을 통해 한국교회가 어떻게 달라졌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다뤄보려고 한다”면서 “기독교는 자기가 죽어야 사는 종교인데, 그동안 타자를 죽여왔다. 기독교가 이제는 시대와 세상, 가난한 자들, 이웃 종교를 위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선언하자는 바람”이라고 대회 취지를 설명했었다.
송순재 교수도 “신학계 선구자였던 변선환 목사에게 가해졌던 종교재판은 한국 교회사와 현대 세계교회사에서 참 부끄러운 일로 남게 됐다”며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감리교회와 한국 교회·세계 교회, 세계 종교가 성숙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한 바 있다.
변교수의 제자들은 일아 변선환 교수의 탄생 100주년(2027)을 맞아 그의 생애, 사상, 제자들을 주제로 한 '변선환 《평전》'을 출판하고자 출판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정배 교수는 학술대회에서 "종교재판에 대한 저항의 뜻을 담아 여러분 모두를 출판위원으로 모시고자 한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 사업에 출판위원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이는 후원모금(농협 302-2410-4679-1 김정숙 변선환 아카이브)에 참여하면 된다. 아울러 아카이브는 감리교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종교재판 《백서》를 준비하고 있음도 알렸다.
종교재판 30년, 교회권력에게 묻다
▲ 인사의 말씀 김정숙(감신대 교수, 변선환아카이브 소장)
김정숙 교수는 학술대회를 여는 인사말에서 “충분한 신학적 토론이나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신학적 논리도 없이 마녀사냥처럼 몰아친 당시 교권의 종교재판은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덮고 지나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고 당시 종교재판을 비판하고 “1992년 5월 감리교 종교재판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는 왜 일어났는지, 그래서 무엇을 얻었으며 그 이후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어떠했는지 묻고자 한다”고 학술대회를 여는 이유를 밝혔다.
▲ 격려사 /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주최측을 격려하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17년간 변선환 교수와 같은 대학의 교수였던 민영진 박사(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는 “예수께서는 전혀 이단을 만들지 않 으셨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이단 집단으로 몰리는 혐오와 폭력의 한 가운데에 서 계시기도 했다”는 말로 이단으로 몰린 변교수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을 것을 염려한 예수의 말씀(마13:29b-30)과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그래도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딛 3:10) 했다는 성경 처방을 들려주며 “교회를, 혹은 성도를 이단에게서 보호한다는 구실로 교회가 종교재판을 열고 이단 감별사들이 이단을 솎아낸다는 것은 밀과 가라지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과도 배치된다”고 당시의 종교재판이 비성경적 행위였음을 비판했다.
▲ 격려사 / 도올 김용옥(한신대 석좌교수)
도올 김용옥 교수(한신대 석좌교수)는 변교수와 홍교수의 교수 및 목사 자격을 박탈한 1991년 총회 결의 직후 「TV저널」에 이를 비판하고 유감을 표하는 글을 기고한 사실을 알렸다. 당시 도올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변교수의 주장이 “이미 다원화된 한국 종교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정확한 메시지”이고 “1951년 위팅겐회의가 교회중심주의, 배타주의, 개종주의 선교를 표방하는 제국주의, 즉 서구 식민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이래 꾸준히 진행되어온 국제 기독교 사회의 상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로 변교수의 다원주의적 입장을 옹호했었다.
또 “모든 창조와 완전은 과정일 뿐이며 완결된 것일 수 없다. 기독교의 역사도 완결된 것일 수 없다. 보수 진영이든 진보 진영이든 그 존속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그 양자의 과정은 오로지 공존과 대화의 변증법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말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교회를 강조하고는 “여기에 “세속의 힘”을 빙자하여 같은 하나님의 사도에게 파문이라는 인위적 폭력의 죄악을 부과하려 한다면 그들이야말로 광주사태를 일으킨 5공 세력보다 더 무서운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들이다“라고 배타성에 의존했던 종교재판을 비판했다. 도올은 배타성을 향해 ”배타는 하나님의 적이요 선교의 거부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도올은 ”감리교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특별총회를 열어 변 선생님의 신원을 회복하는 결단을 감행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도올은 일아가 집중했던 ‘토착화’를 거론하기도 했다. 변교수의 ‘토착화’를 ”비인과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역설적이어서 ‘껄끄러운’ 기독교적 삶의 논리를 인과적이고 상식적이고 순리적으로 해결해나가는 실존적 고뇌의 과정“이라고 본 도올은 ”그 토착에는 다원적인 심층의 복합구조가 있으며, 그 복합구조 속에는 기독교에 상응하는 신성(Divinity)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자들에게만 다가온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필연적으로 기독교가 기독교를 넘어선 자리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종교의 새지평으로 확대되어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토착화에 천착하게 되면 종교다원주의의 지평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선환의 신학이 토착화와 종교다원주의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지니게 되는 핵심적 이유“라고 설명했다.
윤병상 연세대 명예교수와 정희수 감독(UMC)은 학술대회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서면을 통해 변선환 교수를 추억하며 그의 명예회복과 북권을 기원했다.
윤병상 교수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반대했다가 강단에서 쫓겨난 도쿄제국대학의 야나이하라 교수를 소환해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면서 ”변선환 교수는 이 야나이하라 교수 같은 소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변 교수의 감리교 목사 복권이다.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 교리와 신학을 재정립하는 일이다.“라고 역설했다.
정희수 감독도 변교수를 향해 ”얇은 지성으로 신학을 서구 전통 기독교 식민주의를 앵무새식으로 전하는 일을 거부하고, 신학적인 진리를 한국의 토양과 종교적 심성을 통해 고백하신 한국교회 예언자“라고 평가하고는 그를 출교시킨 종교재판에 대해 ”바로 교권과 진리 수호라는 이름으로 감리교회에서 진행된 종교재판은 부끄러운 역사였고, 아름다운 양심과 신학적인 열정을 사대문 밖에 세운 십자가 위에 치켜세우고 공교회의 도리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시 뜻을 모아서 그릇된 수치의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고, 반추하는 일을 한국교회와 신학을 사랑하는 후학들을 통해서 공론의 장으로 여시니, 수고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고 학술대회 관계자들을 치하했다.
종교재판 30년,교회권력에게 묻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변선환 출교 조치 30년
일시 : 2022년 10월 31일(월) 오후 2:30~5:00
장소 : 프레스센터 20층
주최 : 변선환아카이브
공동주관: 감리교농촌선교목회자회, 감리교목회자모임 ‘새물결’, 고창좋은길벗들, 기독자교수협의회, 다석사상연구회, 다석학회, 동광원, 보인회, 비폭력평화물결,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생명평화기독연대, 생명평화마당, 시튼종교간대화모임, 에큐메니안, 예수더하기, 예수학당, 인문사회연구 백두, 종교평화원, 종교환경회의, 한국기독교연구소, 한국信연구소, 한몸평화, 함석헌평화연구소, 현제(김흥호)사상연구회, 해방신학연구소, 해천우회, 카리스마타수도회, 코리안아쉬람, 크리스챤아카데미,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
인사의 말씀
김정숙(변선환 아카이브 소장)
안녕하십니까?
변선환 아카이브 소장직을 맡은 김정숙입니다.
1992년 5월 감리교 서울연회의 종교재판위원회가 감리교 목사이자 감리교신학대학교의 학장이셨던 변선환 교수를 교단과 학교에서 출교시킨 이후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종교재판이란 그저 중세 유럽에서 교회권력이 저지른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의 유물로만 알고 있었던 당시의 감리교신학대학교 학생들은 중세도, 구한말 선교 초기도 아닌 20세기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일어난 초유의 종교재판 사태로 존경하는 학자이자 스승님을 잃었습니다.
종교재판이 있은지 30년, 그동안 심판자의 자리에 앉았던 감리교 목사님들 그리고 피고석의 자리에 앉아야만 했던 변선환 교수님, 종교재판에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이 이제 세상을 떠나시고 안 계시지만 저희의 마음에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와 해소되지 않은 문제들로 남아있습니다. 충분한 신학적 토론이나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신학적 논리도 없이 마녀사냥처럼 몰아친 당시 교권의 종교재판은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덮고 지나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이제 종교재판 30년, 이 자리를 통해 가슴 속에 묻어둔 질문들, 해소되지 않은 문제들을 함께 묻고 대답하며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992년 5월 감리교 종교재판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는 왜 일어났는지, 그래서 무엇을 얻었으며 그 이후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어떠했는지 묻고자 합니다. 그리고 비록 30년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변선환” 이름에 덧씌워진 오도된 사실을 바로 잡기를 원합니다. 이는 변선환의 이름은 단지 교권의 희생당한 과거의 한 인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미래도 계속되는 종교 권력의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모형이 되기 때문이며 인류를 위한 성숙한 기독교의 상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격려사
변선환 교수를 추억하며
윤병상(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변선환 교수는 예언자였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한 대언자였다. 한국 감리교회에 신학과 신앙은 있는가? 신학 없는 신앙은 무속 신앙이다. 무속은 창시자도, 신학도, 교리도 없다. 나는 오늘 일본의 그리스도인이었던 교수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무교회를 창시한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는 신문 기자였다. 일과가 끝나면 도쿄제국대학 학생들에게 성서를 강의했다. 그에게 성서를 배우던 학생 중에 경제학부 학생인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 原忠雄, 1893~1961)가 있었다. 그가 성인이 되어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있었다. 그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때 야나이하라 교수는 혼자서 성명서를 냈는데 “이번 전쟁은 일본이 일으킨 침략 전쟁이니 즉시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일본 문부성은 야나이하라 교수가 성명서를 철회하면 불문에 부치겠지만 철회하지 않으면 파면하겠다고 통보했다. 문부성은 세 번을 종용했지만 그는 파면을 하라고 답변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파면했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후 일본은 패전했고, 도쿄제국 대학은 폐교되었다.
1946년, 도쿄제국대학이 도쿄대학으로 다시 개교하고 초대 총장으로 그를 추천했으나 그는 세 번이나 사양했다. 그 당시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맥아더 사령관은 그의 고향으로 찾아가, “여론 조사에서 일본 국민이 당신을 추천했으니 총장으로 와달라”라고 간청했다. 그때 야나이하라 교수는 총장은 할 수 없으나 평교수로 강의하겠다고 약속하고 개교하는 날 출근했다. 그런데 맥아더 사령관은 그를 그날 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고, 교수와 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동경대학 학생들에게 성서를 강의했다.
변선환 교수는 이 야나이하라 교수 같은 소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변 교수의 감리교 목사 복권이다.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 교리와 신학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신학자들은 민중신학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신학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국 감리교회의 자랑인 ‘교리적 선언’을 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풀이해서 책으로 출판하는 일이다. 이것이 변선환 교수가 원하는 신학과 신앙의 일치일 것이다.
하늘나라
― 변선환 교수 종교재판 30주년에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변선환 교수 종교재판이 오늘로 30주년입니다. 제가 1971년에 감리교신학대학교 전임강사가 되고,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가 되기까지, 그러다가 대한성서공회의 성경전서 표준새번역(1993) 마무리를 위해 대학을 떠난 1987년 12월까지, 17년을 변선환 교수와 같은 대학의 교수로 있었습니다.
변선환 교수의 종교재판 30년을 생각하다가 문득,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비유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13:31-33)는 이야기와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마13:24-30)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재판이 많은 이단을 만들어 낸 것도 생각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께서는 전혀 이단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이단 집단으로 몰리는 혐오와 폭력의 한 가운데에 서 계시기도 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도(道)”, “그리스도의 도(道)”, 혹은 “기독교”가 이단으로 몰린 경우를 우리는 신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변호사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하면서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행 24:5. 개역),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행 24:5. 개정)”, “나사렛 사람들로 구성된 이단 집단의 주동자”(행 24:5. KJV)라고 고발합니다. 여기에서 “나사렛 이단”이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단”이란 말입니다.
고발자가 이렇게 고소하니까, 총독 벨릭스가 바울에게 반론을 펼칠 소명(疏明)의 기회를 줍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기를 고발한 자들이 “이단”(하이레시스)이라고 하는 그 ‘도(道)’를 따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고발자들이 믿는 바로 그 하나님이고, 자기가 읽는 성경이 바로 고발자들이 읽는 것과 같은 성경이고, 따라서 자기는 자기를 고발한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道)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행24:14. 새번역)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 도(道)”는 예수의 도, 곧 기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 당신의 생각[혹은 계획]이 사람의 생각[혹은 계획] 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사 55:8). 종교재판의 역사를 회고할 때마다 떠오르는 본문 말씀입니다.
초림(初臨)에서도 그리고 예상되는 재림(再臨)에서도 그러할 것이 예상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유대교 당국 자들에게서 믿음이라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異邦 人)에게서, 이스라엘에게서는 보지 못한 “큰 믿음”, “많은 믿음”, “도타운 믿음”을 보시고서 놀라시는 예수를 우리는 복음서에서 만납니다.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로마의]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6 말하였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8 백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10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 8:5-10). [번역에 따라서는 “이렇게 큰 믿음” “이렇게 도타운 믿음”(“so great faith” KJV, ASV; “such great faith” NIV; “this much faith!” CEV)”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또 예수께서는 재림 때,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 당신이 세상에서 “믿음”(faith)을 혹은 “믿음 가진 사람”(“anyone with faith”. CEV)을 만나볼 수 있겠느냐며,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 믿음을 신뢰할 수 없는 당신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셨습니다. “인자(人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눅 18:8b. 새번역). 당신께서 오셔서 “믿음”을 혹은 “믿음 가진 사람”을 보시지는 못하셔도 이단 심문관들과 그들이 감별해 낸 이단은 많이 보실 것 같습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를 대비해서라도 우리끼리는 제발 서로 다른 점 부풀려 나뉘지 말고,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서로 소중히 여겨, 그 씨가,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로 자라게 하는 것, 이것이 성숙한 믿음일 것 같습니다. 누가 이단이면 한두 번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는 것이 사도의 권면입니다(딛 3:10). 혐오를 선동하는 것이 믿음일 수 없지요. 폭력을 경쟁하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일 수도 없지요.
31b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13:31b-32. 새번역).
교회를, 혹은 성도를 이단에게서 보호한다는 구실로 교회가 종교재판을 열고 이단 감별사들이 이단을 솎아낸다는 것은 밀과 가라지 비유가 가르치는 교훈과도 배치됩니다. 종들은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내자고 했지만, 주인은 생각이 종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29b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마13:29b-30. 새번역).
하늘나라가 그렇게 오니까요, 가라지 걸러내는 건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할 일이니까요, 바울의 관심은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를 구분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그래도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는 처방을 내린 바 있습니다(딛 3:10. 개정).
졸시, 산문시 한 편 낭독합니다.
하늘나라
예수는 하늘나라가 겨자씨와 같다 하였다 예수는 이단으로 처형을 받으면서도 누구를 이단으로 단죄한 일이 없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믿음을 못 본 초림(初臨) 예수, 오히려 이방인에게서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못 본 믿음을 보고서 놀란 예수, 예상되는 재림(再臨)에서도, 인자(人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는 자를 만나 볼 수 있겠느냐며 미래의 신자가 지닌 믿음마저 지레 신뢰하지 못하는 예수,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이단이면 한두 번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멀리하라는 것이 사도의 권면이다. 혐오를 선동하는 것이 믿음 아니다 폭력을 경쟁하는 것이 거룩함 아니다 서로 다른 점 부풀려 갈라지지 말고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서로 소중히 여겨 그 씨 새들 깃들이는 나무로 자라게 할 일이다 하늘나라가 그렇게 오니까 가라지 갈라내는 건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할 일이라니까
_ 민영진
도올, 변선환을 말한다
도올 김용옥
1991년 11월 22일자 「TV저널」 이라는 연예잡지의 표지에 김완선이라는 가수가 매혹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실려있고, 그 한 귀퉁이에는 내 사진과 함께 “김용옥 칼럼 ─ 구원은 어디에 있나?”라는 표제가 실려있다. 지금은 김훈(金薰) 하면 지고의 소설가로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있지만 그 당시는 한국일보 기자 생활을 청산한 후 TV저널의 편집부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사정사정 애걸하여 “도올유예”(檮杌遊藝) 라는 두 페이지짜리 고정 칼럼을 써달라고 하여 나는 그의 청탁을 받아들였다. 그 네 번째 칼럼이 “배타(排他)는 하나님의 적(敵)”이라는 제하에 쓴 글이다. 여기 그 전문을 옮길 수는 없겠으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글이므로 간략히 인용하고자 한다.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천하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4장 12절의 말씀이다. 과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주체가 예수 하나뿐일까?
구약적 세계관이든 신약적 세계관이든 서양의 종교 전통이 말하는 하나님에게는 서로 공존키 어려운 두 모습이 겹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끈질기게 교회사를 괴롭혀왔다. 하나는 배타적인 질투의 하나님이요, 또 하나는 포용적인 사랑의 하나님이다. 전자는 구약의 하나님이요, 후자는 신약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예수의 하나님도 구약적 하나님으로 해석되어 모든 그리스도론을 장악했다. 우리 인간의 일상적 정리를 보아도 질투(배타)와 사랑(포용)은 동일한 감정의 두 모습인 것 같다. 남녀의 사랑도 시시각각 무서운 질투로 변한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과연 인간을 “구원” 받아야 할 존재로 설정해야만 하는가라는 주제와 걸리고 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어떠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구원을 한다는 것이냐? 교회만 나가면 구원이냐?
라오쯔(老子)는 아예 신, 즉 궁극자가 궁극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면 안 된다(天地不仁)라고 갈파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만들어주고 베풂이 있고 은혜가 있고 함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仁者, 必造立施化, 有恩有爲). 만들어주고 베풂이 있으면 만물이 그 본래 모습을 잃어버릴 것이요, 은혜가 있고 함이 있으면 선택함이 있게 되어 만물이 다 같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造立施化, 則物失其眞; 有恩有爲, 則物不具存). 마치 구약의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기 때문에 궁극자는 스스로 그러할 수밖에 없는 것이요, 따라서 만물은 스스로 서로 질서 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天地任自然, 萬物自相治理). 이러한 라오쯔의 생각에는 “구원”이라는 문제가 근원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라오쯔의 생각은 동아시아 문명 전체의 기저이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불교는 인간의 궁극적 조건인 신성, 즉 불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멸절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애착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멸집(滅執)이며, 멸집이야말로 해탈, 진정한 자유의 조건인 것이다.
최근 감리교단 특별총회에서 감리교 신학의 원로이며 한국기독교의 리버럴한 전통의 존경받는 기수이며 탁월한 학자인 변선환 학장 그리고 예수의 부활을 육체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홍정수 교수의 교수 및 목사 자격 박탈 건의를 가결한 것은,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 아펜젤러가 인천항에 첫발을 디딘 이래 처음 있는 일이며, 또 기독교 내·외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의 보수화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게 하는 심히 유감스러운 사태이다.
감리교는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중심이 된 옥스퍼드대학 학생운동으로서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힘에 의하여 신앙인의 개인적 삶에 근원적 변화가 일어나게 만드는 다양한 방법을 제창하면서 일어난 영적인 부흥운동이었다. 이들은 성령주의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산업혁명 초기로부터 발생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장의 설교(open-air preaching)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 주체세력이 매우 엘리트 그룹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리버럴한 신학 전통을 성령주의와 동시에 성립시켰다.
성령이란 본시 조직이나 형식, 이론이 고착되었을 때 그를 파괴하는 신선한 래디컬리즘으로 등장한다. 성령 그 자체가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 아펜젤러 사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정동교회 담임목사가 된 최병헌(崔炳憲, 1858~1927. 1902년 담임목사가 되어 12년 재직)은 훌륭한 유학자였으며 끝내 유학자이기를 버리지 않았다. 서양지천(西洋之天)과 동양지천(東洋之天)이 결국 같은 하나님(天)이라고 생각했으며, 동양지천에는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인격성이 좀 부족할 뿐이지만, 공자가 말하는 모든 세속 윤리는 기독교인의 신앙체계 즉 삶의 체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편협한 배타주의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각 종교의 역사와 교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변선환 선생이 주장하는 바, 기독교(교회) 밖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것은, 지금 새삼스럽게 거론된 바도 아니요, 또 이설을 세우기 좋아해서 외쳐대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원화된 한국 종교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는 정확한 메시지이며, 1951년 위팅겐회의가 교회중심주의, 배타주의, 개종주의 선교를 표방하는 제국주의, 즉 서구 식민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이래 꾸준히 진행되어온 국제 기독교 사회의 상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1968년 WCC는 다이얼로그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으며 카톨릭에서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Second Vatican Council, 1962~1965)는 맑시스트·무신론자를 포함하여 선의를 가진 다른 종교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언했다. 1990년 6월, 취리히 옆의 소도시에서 신학자들이 모여 선언한 바아르 스테이트먼트(Baar Statement)는 포괄주의를 지양하고 다원주의로 그 패러다임을 이전시켰다. … 이제 인류의 종교사는 교회 중심 선교에서 하나님 중심 선교(Missio Dei)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한다면 이 세계 또한 하나님을 창조한다. 하나님이 완전하고 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면, 이 세계 또한 완전하고 하나님이 불완전하다. 모든 창조와 완전은 과정일 뿐이며 완결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역사도 완결된 것일 수 없다. 보수 진영이든 진보 진영이든 그 존속 이유가 있는 것이라면, 그 양자의 과정은 오로지 공존과 대화의 변증법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여기에 “세속의 힘”을 빙자하여 같은 하나님의 사도에게 파문이라는 인위적 폭력의 죄악을 부과하려 한다면 그들이야말로 광주사태를 일으킨 5공 세력보다 더 무서운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들이다. 이러한 폭력을 우리는 묵과해서는 안 된다. 변선환 목사와 같은 우리 교계의 양심과 양식이 그 날카로운 목소리를 오늘날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를 지지하는 젊은 학도들 그리고 그의 트인 생각과 인간됨을 존중하는 우리 사회의 모든 휴머니스트들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유대감과 사랑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실에 도전하는 모든 죄악은 결국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괴멸될 것이다. 배타는 하나님의 적이요 선교의 거부다!
이 글을 몇 사람이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감리교회 교단 특별총회에서 변선환 선생님의 목사 직을 박탈한 것이 1991년 10월 31일의 사건이므로, 그 사건이 있은 지 불과 열흘 만에 나온 이 글은 공적인 사회적 매체를 통하여 일반에게 공개된 글로서는 아마도 최초의 글일 가능성이 높다.
대중매체의 잡지 글이라는 것이 매우 촉박한 시간 내에 완성되어야 하므로 충분한 정보수집과 검토와 숙고의 여백이 모자라는 가운데 쓰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면 두 페이지라는 문자 공간을 확보하여 사태의 전체적인 의미를 대중에게 전달하는데는 과히 부족함이 없었다고 확신한다. 무엇보다도 당시 이런 글이 즉각적으로 사회평론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김훈이라는 탁월한 식견을 지닌 편집부장이 잡지를 장악하고 있었고, 또 김훈 부장은 나에게 내 컬럼 공간에 대한 전권을 부여해주었고, 일체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 글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졌다. 내가 평소 존경하는 사상가에게 부과된 터무니없는 정죄의 죄악에 대해 소신껏 항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때는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으니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고 있다는 조짐을 조금이나마 느끼기 시작할 때였다. 그러나 감리교단의 행동은 몰상식의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변선환 선생의 주변의 인물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변선환 문하에서 자라난 이정배와 같은 동량과 개인적 연락이 없었다. 결국 몇 달 후, 1992년 5월 7일, 감리교 서울연회 재판위원회는 다시 종교재판을 열어 변선환의 출교를 결정하였다. 파문이었다! 파문이 그의 학문적 입장이나 정신세계에 어떤 본질적인 파문을 던졌을리 없지마는 불과 3년 후, 1995년 8월 8일, 그는 홀로 그의 서재에서 원고를 쓰시다가 소천하시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나이 불과 68세, 지금 나의 처지를 비추어 보아도, 너무 일찍 세상을 뜨셨다는 안타까움이 새삼 분노로 치밀어 오른다. 파문의 충격이 없을 리 없다. 단지 주희(朱熹, 1130~1200)처럼 글을 쓰시다가 책상에서 좌탈하셨다는 소식은 한없이 부럽게 느껴진다. 주희는 『대학장구』를 매만지고 있었다는데, 우리 선생님은 한국 역사의 미래를 걱정하는 논문을 쓰고 계셨다:
“오늘의 한국은 서구 근대화를 피상적으로 모방하지 말고, 한국 종교 속에 움트고 있었던 적극적인 요소들과 만나면서 참으로 알찬 한국적으로 토착화된 근대화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의 최후 일언은 역시 신학함의 주체성을 강조하던 대인(大人)의 우환의식의 정면(正面)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우리 역사는 그가 외치던 “토착화된 근대화 모델”로부터 염치없이 멀어만 가고 있다.
나의 고전 강독 집회에 열심히 나오시던 감리교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 분은 매우 폭넓은 사고와 깊은 지식과 경건한 신앙을 구유하신 분이었다. 이 목사님은 말년에 변선환 선생님과 가깝게 왕래를 하셨다. 그 목사님이 전해주는 한 일화는 변 선생님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변선환 하면, 그 인간을 말해주는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유모어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웃긴다는 것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의 껄끄러움을 유모어로 매끄럽게 다듬고 넘어가는 것이 그의 인생역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변선환과 강 목사는 강화도 어느 곳을 지나고 있었다. 강 목사의 목회 장소가 강화도였다. 거대한 감나무 고목 밑에서 쉬어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감나무 속이 썩어 텅빈 것을 보자 정색을 하고 몇 발치 떨어져서 나무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무! 네 이놈! 넌 어찌 목회도 안 해본 놈이 속이 그렇게 썩었느냐?”
참 기발한 유모어라 하겠으나 변 선생님의 썩은 속을 보여주는 일화라고도 하겠다. 나는 말한다. 감리교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특별총회를 열어 변 선생님의 신원을 회복하는 결단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퇴계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퇴계 학문에 못지않은 독특한 일가를 형성한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수제자 래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인조반정으로 참수당함으로써 남명의 학맥도 다 끝나버렸다. 정인홍의 관작이 회복이 안되었기에 남명도 잊혀졌다. 결국 정인홍은 구한말에 이르러서야 (1908) 신원되었는데, 하여튼 20세기 말에 이르러서 남명학은 크게 부흥되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사상적 성향의 차이 때문에 파문의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감리교 교단의 자체의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감리교 신학의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일아(一雅) 변선환의 정위치를 회복시키는 작업을 언젠가는 반드시 실행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나의 말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언젠가는 나의 말대로 행하게 될 것이다. 복(復)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본다라는 역(易)의 언어를 되씹게 될 것이다.
나는 1982년에 하바드대학에서 학위를 끝낸 후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그 때 안병무 선생님은 내가 동방 고전에 관한 필로로기의 탄탄한 기초를 지닌 학자로서 기독교 신학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인지하시고 당신이 발행하는 「신학사상」의 편집위원으로 초대하여 주셨다. 그때 편집위원 중의 한 분이 변선환 선생님이었다. 덕분에 편집회의에서 신학자 선생님 여러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여러 주제에 관해 토론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나는 고려대학을 떠났고, 또 1990년부터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생이 되었는데, 그 시절에 변선환 선생님은 원광대학교 교학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셨기 때문에 가끔 열차간에서 선생님을 뵈올 수 있었다.
그러나 변 선생님과 학문적 토론을 깊게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기억은 별로 없다. 선생님께서는 동양철학에 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지만, 나와는 관심 분야가 일치하지 않았고 언어의 질감이 좀 달랐다. 선생님의 동방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 담론 속의 동방학이며, 신학적 개념의 필터를 거친 철리의 세계이다. 나는 원칙적으로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필터를 전제하지 않는다. 선생님의 언어는 매우 제너럴하고 화려하다. 그런데 비하면 나의 언어는 매우 스페시픽하고 드라이하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언어는 매우 계발적이다.
내가 감히 선생님의 정신세계에 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보냐마는 내가 느낀 인상을 간략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안병무의 신학세계는 매우 구체적인 하나의 텍스트가 있다. 그 텍스트는 성서이며, 성서중에서도 신약이며, 신약 중에서도 예수의 삶을 담은 복음서이며, 복음서 중에서도 케리그마화 되기 이전의 갈릴래아 황토흙이 배인 “사람이야기”같은 것이다. 불트만은 초대교회의 담론이 아닌, 그 이전의 역사적 담론은 복음서에 남아있지 않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한 담론에 관해서는 불가지론적인 인식론적 입장을 취한다. 안병무는 그러한 불가지론을 뚫고 갈릴래아 황토흙 배면을 쑤셔댄다. 그리고 그곳에서 민중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발견된 민중은 “실체”(Substanz)가 아닌 “사건”(Ereignis)이다. 그러니까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복음서를 철저히 분해하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도달한 결론이다. 그 해체 방법의 방법론에는 유니크한 안병무의 실존이 자리잡고 있다. 안병무는 매우 독창적인 사상가이다. 그의 성서는 지구상에 용케 살아남은 희랍어 파편들일 뿐 아니라, 청계천의 전태일의 삶, 북간도 하늬바람의 고난을 홀로 이겨내는 선천댁,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진짜 그의 성경이다.
이에 비하면 변선환은 텍스트가 다르다. 변선환의 텍스트는 성서라고 말하기보다는 (물론 성서를 텍스트로 하지 않은 신학자는 없다), 신학 그 자체이다. 그가 그의 삶을 통하여 탐구로 삼은 것은 모든 유형의 신학적 디스꾸르이다. 그는 지구상에 존재한 모든 유형의 신학적 사고, 신학적 체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민중신학이 성서를 바라보는 하나의 유니크한 시각이라고 한다면, 인간세의 시공을 통하여 제기된 그와 같은 모든 유니크한 시각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변선환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가 끝나갈 때까지 활발하게 진행된 모든 신학 담론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모든 것에 안테나 역할을 했다. “올꾼이”라는 말에 “바보스럽다”는 의미가 전면에 드러난다지만, 그 배면에는 그야말로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 떠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배어있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안병무는 철저히 성서 속으로 파고 들었지만 변선환은 신학 담론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즉, 신학 담론을 생산해내고 있는 “세계”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한 사상가의 생애에 있어서 그 사상 성향을 지배하는 것은 역시 최초로 자기 삶의 지향점을 발견하는 순간의 영감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 사상가의 현존의 줄기에 매우 지속적인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그 영감의 원천은 그가 18세 때 만난 늙은 백발의 한 목사님이었다. 3.1독립만세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한 사람으로, 끝내 6.25전쟁통에 총살당하기까지 신앙의 절개를 한 번도 잃지 않은 순결한 영혼이었다. 변선환은 말한다: “그의 위대성은 복음을 동양 종교의 콘텍스트 속에서 해석하여 변증하려고 하였던 데 있었다. 동양 종교와의 대화 속에서 증거되는 그의 설교는 동양적 신학 또한 한국적으로 토착화한 신학의 원형이다.”
여기 변선환의 신학 세계를 대표적으로 이름지우는 “토착화”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내가 신학대학을 다닐 때 즈음, 신학계는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말이 매우 유행하고 있었다. 토착화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적 삶과 한국인의 토착적 삶이 매우 다른 양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를 일자가 타자를 묵살하고 지나가면 그뿐이겠지만, 도저히 그런 묵살이 불가능할 정도로 양자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거나 객관적으로 대등한 가치가 인정될 때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소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류문명사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이다. 어느 시공에 떨어지든지 자기만이 옳고 타자는 무조건 개종이나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폭압적으로 강요하는 십자군 신학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기독교 신앙을 수용한 이들은 느끼지 못한다. 은재(殷哉) 신석구(申錫九, 1875~1950) 목사는 깊은 유학자의 소양 속에서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감지한 심오한 신앙인이었다.
기독교적 삶의 논리는 하여튼 껄끄럽다. 껄끄럽다라는 것은 비인과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토착적인 삶은 인과적이고 상식적이고 순리적이라는 것이다. 어린 변선환은 그 껄끄러운 역설들을 삶의 지향처로서 인지하였을 때, 그 파라독스의 강렬함과 과제성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그의 신학 여정은 그러한 껄끄러움을 해결해나가는 실존적 고뇌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토착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나는 신학을 토착화하는 수고 속에 내 인생을 바치지 않겠다 하고, 토착화할 것이 아니라 내가 “토착”이 되어버리겠다 하고 신학대학을 나와버렸다. 그러나 나의 시대와 변선환의 시대는 패러다임이 다르다. 나에게는 “토착”이라는 세계가 전 인류의 새로운 비전으로서 당당한 개벽의 서광을 발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내가 기독교에 충성심을 지켜야 할 만큼 기독교는 순결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토착화를 외친 신학자들에게 기독교는 애착을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개화기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전한 정신적 자산이었다. 기독교의 토착화는 그들에게는 성실한 의무였다. 토착화의 토착이라는 문제의식은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에 의하여 말살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독자적으로 지닌다는 생각을 지닌 자들에게만 다가온다. 그리고 그 토착에는 다원적인 심층의 복합구조가 있으며, 그 복합구조 속에는 기독교에 상응하는 신성(Divinity)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자들에게만 다가온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필연적으로 기독교가 기독교를 넘어선 자리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종교의 새지평으로 확대되어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토착화에 천착하게 되면 종교다원주의의 지평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선환의 신학이 토착화와 종교다원주의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지니게 되는 핵심적 이유이다.
다원주의는 비빔밥이 아니다. 비빔밥 속에 포함되는 모든 요소를 그 나름대로의 생성의 논리를 따라 정확하게 독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원주의는 제국주의적 폭력을 철저히 배격할 때만이 시작될 수 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비교”라는 말이 유행했다. 동서 문화 비교론이니 비교종교학이니 비교철학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이 유행했다. 나도 한때 비교철학에 심취했다가, 곧 비교는 할 짓이 아니라고 판결을 내렸다. A와 B를 비교하는 것, 비교 그 자체가 학문이 될 수는 없다. A와 B를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A를 공부하고 B를 공부해야 한다. A와 B는 따로따로 연구되어야 한다.
변선환에 대한 나의 추억은 한없이 유머러스한 사람인데, 그의 유모어는 그의 존재의 겸손으로 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를 개방하고 자기를 끝없이 낮추는 것이다. 변선환은 아상(我相)을 철저히 버렸다. 타 종교를 대할 때에 철저히 나를 버렸다. 그의 낮춤과 개방은 바닥이 없었다. 노자가 말하는 “무”(無)나 불교가 말하는 “무아”(An ā tman)를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종교다원주의적 삶의 실천 속에서 구현하였다. 그는 그 많은 신학자 속의 민중이었다. 천대받고 이단시되고 그러면서도 철저히 봉사하는 개방된 고도의 지성이었다.
그의 웃음과 비애와 낮춤은 “20세기의 낭만”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새삼 변선환이 그리워진다.
人無孔子意如同
衆非基督自求脫
南浦書香抱四海
上下攝通易生活
사람이 공자가 아니더라도 그 뜻이
공자와 같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수운의 말이다.
민중은 그리스도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구원을 추구할 수 있다.
진남포의 서향 속에서 자란 一雅는
사해의 모든 사유를 가슴에 품었다.
초월과 내재가 하나로 다 통해버리니
生生하는 易의 세계가 생명으로 가득하다.
2022년 10월 11일
이정배 교수의 부탁으로 낙송함에서 붓을 옮기다.
변선환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에게 이 소론(小論)을 바친다.
믿음의 신화적인 스승 변선환을 기리며
정희수(전 감리교 감독)
부끄러운 역사를 회자하는 일은 우리들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됩니다. 진리와 부정이 전도된 공적인 사건은 시간이 갈수록 원죄처럼 부끄러운 민낯으로 기억되고 비판적인 자성을 하게 합니다.
바로 교권과 진리 수호라는 이름으로 감리교회에서 진행된 종교재판은 부끄러운 역사였고, 아름다운 양심과 신학적인 열정을 사대문 밖에 세운 십자가 위에 치켜세우고 공교회의 도리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우리의 교사였던 변선환 선생님은 한국 교회사에서 세기적으로 쉽게 뵈울 수 있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신학 강단과 신학 교육에 환한 빛을 가져오셨던 올꾼이 선생님, 변선환을 세계교회는 지성과 영성의 광맥으로 회고하고, 그 어른의 학문과 신앙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크신 어른이었습니다. 신학적인 비전과 세계 종교계에 던지신 믿음의 고백과 삶의 실존은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가슴에 멈추지 않는 파도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얇은 지성으로 신학을 서구 전통 기독교 식민주의를 앵무새식으로 전하는 일을 거부하고, 신학적인 진리를 한국의 토양과 종교적 심성을 통해 고백하신 한국교회 예언자이셨습니다. 제자 사랑의 큰 산이셨던 어른을 우리 생에 모시고 산 것만으로도 우린 감사와 은혜의 덕을 누리었고, 뜨거운 열정의 가르침을 받은 시간들이 영원의 문을 열어 주셨기에 믿음의 신화적인 스승으로 늘 그리워하게 됩니다.
다시 뜻을 모아서 그릇된 수치의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고, 반추하는 일을 한국교회와 신학을 사랑하는 후학들을 통해서 공론의 장으로 여시니, 수고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더 선한 길로, 더 포용과 환대의 길로, 신학적인 광맥을 더욱 깊이 파내는 신학계와 한국교회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길 자비하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때 길들여진 통속과 교권이 세속의 영예와 교회 부흥의 이름을 치켜들고, 안타깝게 진리의 교사를 종교재판의 이름으로 심판하였으나, 그것이 한국교회 목줄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아직 우리 목에 걸려서 생명과 복음의 순구한 책임을 다해야 하는 교회를 여전히 속박하고 옥죄고 있습니다.
수천 년 교회사 속에서 이단 정죄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저주, 화형, 종교재판, 마녀사냥, 식민주의, 반문화적 편견과 종교 제국주의는 오늘 공교회 속에서 거절되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 열린 교회가 되지 못하면 우린 과거사의 부정을 작게 크게 여전히 현재에서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고, 이사야의 담론이 지적한 바리새인의 모습,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2:39-40). 그 길을 혼돈과 무지 속에서 반복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분명 열린 담론이라고 믿습니다.
벌써 뒤돌아보기 싫었던 현대판 종교재판이 30년 전의 일이 되었다는 사실은 잊고 싶은 종교 권력의 편견과 독선이었습니다. 복음 수호의 근본주의는 우주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광대한 빛에 허물어져야 하고, 이제 화해와 평화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만방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합니다.
썩는 밀알로 제자의 삶을 사신 우리의 스승 변선환 선생님, 예언자적인 신앙과 넓은 가슴의 신학적인 열정으로 지금도 우리를 보우하시는 선생님의 영을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위스콘신에서
정희수
1부 / 종교재판 30년, 회고와 성찰
발표 1 송순재(감신대 은퇴교수)
“사랑과 열정, 변선환의 신학 여정”
발표 2 이정배(현장아카데미 원장)
“죽어야 사는 기독교 ― 타자 부정에서 자기 부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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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_ 종교재판 30년, 회고와 성찰 / 송순재(감신대 은퇴교수), 이정배(현장아카데미 원장)
2부 / 종교재판 30년, 그 ‘以後’
사회 장왕식(감신대 은퇴교수)
발표 1 한인철(연세대 명예교수)
“불가결의 상호보충 ― 하나의 시도”
발표 2 이호재(전 성균관대 교수)
“한국 종교와 한국교회의 화해를 위한 ‘풍류 담론’”
발표 3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소장)
“감리교 종교재판, 한국적 ‘보편종교’를 향한 진통과 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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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종교재판 30년, 그 ‘以後’ / 사회: 장왕식(감신대 은퇴교수). 발표: 한인철(연세대 명예교수), 이호재(전 성균관대 교수),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소장)
변선환 교수 종교재판 경과
1. 1990년 11월 24일 가톨릭 문화원 주최, “기독교, 불교, 천주교 대화모임” 중, 변선환 교수 “불타와 그리스도” 논문 발표.
2. 1990년 12월 8일 「크리스챤신문」에서 “기독교 배타적 사고서 벗어나야”라는 제하에 변선환 교수의 “불타와 그리스도” 요약 게재.
3. 1991년 3월 18일 서울남연회에서, 박기창, 이성국, 김순태, 정동광 등 4명의 목사 이름으로 된 건의안 상정됐는데, 여기에는 변선환 교수가 “불타와 그리스도”에서 논했던 주장을 전체 논문의 맥락에서 논의 ‧ 이해한 것이 아니라, 6개 항으로 앞뒤 잘라내고 문제제기 함(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신학적 모색이 요청된다 … , 요단강 중심의 유대문화에서부터 다원주의를 상징하 는 태평양 한강 중심의 신학이 개발 되어야 한다 … ,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해야 한다 … ,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 천동설에 불과하다 … , 종교는 익명의 기독교이다 … , 예수 를 절대화 우상화시켜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 인물로 보려는 기독교 도그 마에서 벗어나야 한다). 서울남연회는 총회실행위원회에 신학심의회를 두어 감리교 신학에 대해 심의할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
4. 1991년 10월 감리교 특별 총회, 회원수 1,385명 중 301명이 참석하여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신학의 입장은 감리교회 신앙과 교리에 위배되는 것임을 결의”.
5.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신학을 주장하는 변선환 목사와 홍정수 목사에 대하여 제재 조 처 방안을 논의하매 해당 기관 재단이사회에 면직하도록 하는 총회 결의를 통보하고, 당해자 가 소속한 연회의 감독은 장정 199단 제8조에 의거하여 심사위원회에 회부케 하자는 리승수 목사의 동의와 임덕숙 장로의 재청을 찬성(찬성 299, 반대2), 가결하다.”
6. 1991년 11월 21일 힐튼호텔에서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 조직, 공동회장으로 김홍도 목사와 유상렬 장로 선출.
7. 1991년 12월 2일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는 서울연회 감독과 심사위원 앞에서 “변선환과 홍정수 두 목사는 이단 사상을 교수하고, 통일교 거물급 인사를 5년 동안 비호, 졸업시켰다”고 고소.
8.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는 「 조선일보 」 1992년 1월 26일자에 “변선환, 홍정수 교수의 이 단 사상 및 통일교 연루 사실을 폭로한다”라는 광고에서 “감신대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 의 주장은 적그리스도 또는 사탄의 역사이므로 반드시 추방해야 하며, 만일 이것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교단 분열도 불사할 것이다”라고 위협하며 여론 형성.
9. 1992년 2월 24일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위원장 나정희, 서기 조창식, 위원 이동우) 이름으로 변선환, 홍정수 교수를 서울연회에 기소
10. 1992년 4월 23일 감신대 교수들(김득중, 선한용, 이기춘, 김재은, 박창건, 이원규, 방석종, 장종철, 김외식, 타이스, 이정배, 박종천, 서현석, 왕대일, 김영민, 이후정, 송순재) 기독교대 한감리회 서울연회재판위원회에 두 신학자의 재판이 신학적으로 신중히 결정되기를 촉구하 는 성명 발표.
11. 1992년 5월 7일 금란교회에서 열린 종교재판(재판위원 15명 중 13인이 감리교교리수호대 책위원회 위원으로 구성: 최홍석 목사, 고재영 목사, 민선규 목사, 홍형순 목사, 임흥빈 목사, 금성호 목사, 박을희 장로, 김재민 장로, 곽노흥 장로, 신원보 장로, 이강모 장로, 김재국 장 로, 박완혁 장로)에서 변선환, 홍정수 교수 출교 선고.
12. 1992년 5월 28일 “감리교단을 염려하는 기도 모임” 발족하여 재판 결과에 문제 제기하고, “한국 감리교회의 전통과 웨슬리의 정신을 완전히 망각한 신학의 획일성과 배타주의가 지 배”하였다고 하면서, “교리와 신학을 토론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무시한 채 일부 임의단체의 힘이 교단 위에 군림하여 재판을 좌우하여 교단의 권위를 실추시켰음을 통탄”한다고 하면 서, 1992년 6월 1일 서울연회 재판위원회에 상고.
13. 그러나 1992년 10월 24일 감리회 총회에서 변선환, 홍정수 두 교수의 출교를 최종적으로 결정.
14. 1992년 10월 26일 감리교교리수호대책위원회는 「 국민일보 」 광고란에 “기독교대한 감리회 변선환, 홍정수 사건의 종결에 즈음한 성명”에서, “감리회 교역자들과 감리회 소속 대학의 교수들과 신학생들은 위의 사건(변선환 교수, 홍정수 교수 출교)과 관련하여 문제된 신학을 지지 및 옹호하는 경우에는 위와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됨을 명시”한다고 하면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신학생 등을 협박.
작성: 최대광 목사(감신대 객원교수, 공덕교회 담임목사)
목사님.
위 기사에는 “김홍도 목사님”의 이름이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교회권력”은, 학문적 취지로 사용되었겠죠.. 왜 그랬을까요?
그분들이 말하는 <오도된 사실>을 바로 잡는데,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김홍도는 죽고 변선환이 부활했다>고 제목을 뽑았습니다.
<오도된 사실>을 바로 잡는데, 도움이 될까요? 안될까요?
목사님의 私心이 그분들의 고심과 노력을 망치는 것이 아닐까요?
공감합니다.
감리회 소속 목사로는 출교라 죽었으나
종교다원주의 토착화 신학자로는 부활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