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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제일교회와 제천의 민족성지 지정에 대하여

작성자
민관기
작성일
2022-10-26 14:52
조회
1275
제천에 대한 인문지리, 역사를 고찰하므로서 감리교회의 선교의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천은 삼국기라 칭할시에 처음엔 제4국인 가야의 영향력이 제일 복쪽으로 미치는 영역이었고,
가야가 신라에 병합 그리고 광개토왕기엔 고구려 마지막으로 백제의 강역이엇다가 후삼국에 이르러서도 역시나
신라, 고려, 후백제의 강역을 이리저리 넘나들던 고장이었다.
하여, 제천인들은 1,000여 년에 걸쳐 확실하고 뚜렷한 지배세력의 제하에 있지 못하였기에 언제나 확고한 지배세력에 들지는 못하였었다.
마음적으로 시달렸을 것이다. 누가 대체 대장이야?
하여, 그들은 누구를 일방적으로 주군의 나라로 대할 수 없었기에 [제가] [저는] [저희들은]의 저와 제를 입에 딜고 살아야 하며, 이쪽 저쪽 상황(권력지도의 변화양상)을 보거나 언제든 정세를 면밀히 살펴야 했기에 본인이 가지고 사는 정체성과 남에게 보이는 정체성과는 삶의 태도를 다르게 지니게 되는 지리적 특성의 고장이다.
=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의 축적이 주는 강점이 잇다.

제천의 제는 이렇게 고장의 호칭이 되었고,
제천의 천은 제천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산줄기에 따른 물줄기가 흘러 합수되는 곳 즉, 강원도와 경북과 충북을 아우르는 곳이므로 천 = 전 = 선이 거꾸로 강하게 선에서 전으로 전에서 천으로 진화되는 과정 또한 있어 지금의 제천이란 지명이 오래전부터 호칭되었다.
한편, 제천엔 우리민족 사상 두번째 저수지라 불리는 '의림지'가 있으니 이는 자신들의 삶을 지키며 풍요롭게 하기위한 지혜의 산물이었다.
[= 탁사 최병헌의 제천엔 탁사정(경치좋은 언덕위의 정자)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를 최병헌 목사가 호로 사용했다.
탁사는 이 물과 저 물, 이 내와 저 내, 이 길과 저 길, 이 고장과 저 고장이 반드시 닿고 닿으니의 반복어로 ㄱ 깃들어 닿=닿이 탁이 되었고, 사는 근위병과 같은 자세의 글자이므로 탁사는 이러한 고장에 살기위한 조건으로 언덕위에서 언제 어느 때에 침략/침노를 당할지 모르는 그들이 청소년/청년들에게 언제나 자신들의 보호를 위한 정찰/감시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치기위해 만들어낸 단어가 아닌가한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20세기가 되었고 국권을 잃어가던 민족은 최후의 항전을 벌일 준비를 하니 그곳이 바로 제천이었다.
우리민족의 근세기 의병들은 호남/충남의병은 동학혁명의 여파로 약세를 면치 못하였고, 경기의병은 경기북부의 산악지대를 제외하면 산악지대가 약하여 의병활동이 활발하지 못하였던 반면, 영남과 강원 그리고 충북의병은 활발하였었다 한다. 제천은 각 지역의 의병들이 집결하여 각지로 즉, 퍼지거나 모이는데 적격지역이었다.
공격을 할 시엔 경기도 방면으로 진격하여 장호원, 이천, 여주 일원으로 진출하고 퇴각시와 지역수호때엔 산악을 타고 영호남과 강원 등지로 산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제천은 의병운동의 집합소가 되었다.
지형의 특성과 물산이 산악지형을 띠고 있는곳치고는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왜적들은 간파하였다.
그리곤, 1907년 제천의 민가 700여호를 단 한채도 남기지않고 방화하였고, 약 5,000여 명의 대한인들은
갑자기 살 터전을 잃고 강원도 방면인 태백, 정선, 영월 등지로 충북은 음성, 괴산, 충주 등지로 피신/피난하였다가 많은 이들은 귀향하였고, 일부는 산악에 남아 강원도민화 되어 갓고, 이들이 1970년대까지 남아있던 화전민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왜적들의 침략기 천연 자원 공급처로 강원도가 변화하여갈시 석탄, 석회석 등을 생산하는 인력으로 전환되어 가기도 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대부분의 제천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복귀하엿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건 불에 탄 집터뿐 남은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삶을 일구어가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불태운 일제를 욕하자니 박해와 탄압을 받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민족을 위해 싸우던 의병진을 탓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하여, 그 재난민들의 가장들은 쌓인 울분을 풀길이 없어 살기는 열심으로 살기는하지만, 욕으로, 술로, 행패로 그 행동양태가 나타났다.

그 때를 대비하심인지 하나님은 제천인들을 위해 탁사 최병헌 목사를 예비하셨다.
탁사는 이전에는 우리감리교계에서 비교종교학자라 불리던 이였는데, 실상은 종교비교의 목적이 민족에게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고 기독교 특히, 감리교회를 통한 민족의 혁신과 재생을 목표로하는 학문이었기에 민족신학자이며, 민주공화제에 대한 이해에 따라 신민회 지도자들의 사상적 지도자이며, 그것의 최종 목표가 백성들의 민생을 살리는 일이었기에 그의 신학은 '민족=민주=민생신학이라 칭해야 마땅하다. 제천인들은 사실상 거의 모든 이들이 탁사가 설립주도한 제천제일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시설? 등으로 집결하였다. 19?? 몇 년인지 제천유치원의 개원과 그 효과는 다대하였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제천인들은 위무를 받았다.

탁사는 유학의 대안학문인 실학과 양명학 연구자였다. 그는 자신과 민족을 위해 과거를 통해 세상을 혁신하고자 하는 혁명선비였으나 아쉽게도 여러가지 이유로 과거에 실패하고 당시에 우리민족에 공식적 합법적으로 전래된 감리교회 선교사들인 [존스, 아펜젤러, 스크랜턴, 노블, 헐버트, 하디 등]과 교유를 통해 삶을 새로이 살기 시작했고 1902년에 이르러선 감리교회의 세번째 목사 안수를 받아 아펜젤러의 사후 정동제일교회 담임을 시작으로 본격적 성직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으며, 후일 서울, 경기지역의 감리사 그리고 감신의 교수를 마지막으로
그의 땅에서의 빛삶이 1926년 마감되었다.

그는 고향이 제천이다. 본디 1901년 김창식, 김기범과 함께 최초의 개신교 목사안수 대상이었으나, 탁사의 고향에서 집안에 상을 당하여 그 일을 치르느라 안수를 받지 못하였을 정도로 그의 제천이나 집안에 대한 어떤 행동은 좀 각별했었다. 제천인들은 위에 언급한바와 같이 재능이나 지혜가 뛰어나긴하나 어느 한쪽으로 쉽게 치우치는 인성의 소유자들은 아니다. 탁사도 선교사들을 만나 그냥 쉽게 개종하고 감리교인이 되진 않았다.
존스를 만난지 5년이나 지나서야 세례 받는걸 받아들일 정도로 웬간한 고집통인데, 세상의 개화물정을 모르는 본디 제천인들은 탁사보다 훨씬 더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는 성품이 어디가지않을 터 1907년 방화의 참사를 겪기 전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1907년 탁사가 자신의 고향인들의 참화소식을 알고
그 곳에 자신의 신앙에 따른 제천제일교회를 세워 제천인들의 고난에 찬 삶에 동참한것이 아닌가? 하며, 그제서야 제천인들은 탁사의 뜻에 따라 신앙을 받아들여 그 역사가 발하여 온 것이다.
[= 이 참화 경험을 바탕으로 탁사는 광무(융희)황제의 명을 받들어 의병선유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준비되지 않은 전쟁/전투의 결과를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을 통해 똑똑히 목격/경험하였기에 그는 공부하여 준비하여 싸워 승전을 올리자는 애국계몽운동계통의 주장을 한것이며, 의병의 해산이 아닌 이거를 주창한 것이며, 실제 의병진은 일부는 전투를 지속하였지만, 대부분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거하고 후일 반개화에서 망명한 감리교회 신민회의 무장세력과 합세하고 개화로 전환하여 독립군화되어 싸우니 이것이 봉오동전투요 청산리대첩이며, 독립군의 실체이고, 1940년대 광복군이다.]

제천인들은 감리교회 신앙을 받아들인 후에도 타향사람들을 배척하는 텃세가 강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성정이 살가운 사람들은 아니다. 자신들이 겪어왔던 오랜 세월의 무게를 설명할 길도 이유도 별로 없었기에 그들은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지금도 가지곤 살아간다.

위에서 1907년의 참화를 이야기하였다.
화를 참지못해 난동을 부리던 이들은 그러다가 교회에 와서는 한바탕 소리질러 기도하여 하나님의 위로도 받긴하나 그 화는 사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폐해는 여전히 전해진다. 해방후 제천으로 이주하여 들어간 지금의 제천인들은 본디 제천인들의 어떤 태도, 마음, 성격 등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제천인을 보자.
1세대 : 무조건 무척 화를 낸다.
2세대 : 아버지가 왜 저러시는지 이유도 알고 나쁜것도 알고 싫지만 자신도 크게 별반 다를게 없는 모습으로 산다.
3세대 : 할아버지의 태도는 알긴 아는데, 왜 저리시는진 잘 모른다. 아버지는 알지만 그 깊은 속까진 모르지만 자신도 많이 닮은 삶을 살고 있다.
4세대 : 거의 해방후 세대에 이른다. 1세대, 2세대 돌아가시거나 많이 연로하신 상태로 누구나 다 성정이 비슷한걸 안다. 많이 순화되고 바뀌었고, 직접 경험한바도 없고 전해오는 이야기조차 불분명하고 어째든 온유한 남성들은 전반적으로 그리 많이 찾아보긴 어렵다.
5세대 : 1960~70대와 80년대에 이르러선 1907년의 참화는 대부분 모르고, 의림지가 저기 있다, 의병이 있었다더라, 우리는 3~4대가 감리교인이다, 하여 그런지 감리교회 목회자가 다수 배출되기도 했었다 등 등
알지만 모르고 모르지만 아는 상태의 제천인들이 되어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가 지금 현재이다.


제천제일교회와 제천인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린다.
1. 제천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과거를 충분히 뒤돌아보아야 한다.
2. 과거를 계승/보존/혁신하여야함인데, 그중 탁사 최병헌 목사를 주목해야 한다. 그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그 공적을 인정받게 하는일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
3. 1907년의 제천 참화는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화수리, 사강리의 3개 교회 방화, 29명 학살, 700여 호의 민가 방화와 비견되는 우리민족 역사에 두번의 사건중 하나이다.
이를 위해
1) 제천과 충북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민족(특수재난 또는 수난)성지]로 요청하여 지정받길 바란다.
2) 지금의 일본 왕과 정부의 사죄/보상을 요구하라.
4. 그리고, 제천의 청소년/여성 역사/인문학 배움 등에 정성을 기울여라.


이것이 제가 제천인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아닌가하여 총회를 하루 앞두고 글을 남깁니다.



전체 1

  • 2022-10-26 16:04

    굳이 뭘한다면 같은 정황의 1919년 경기 화성도 같은 선교의제가 있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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