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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종교계. 보면 알아요.

작성자
민관기
작성일
2022-10-22 00:41
조회
1247
&. 각 종교계

각 종교계의 민족운동 실상을 파악하려면
황실에 대해 선교사/목회자/각 종단이 어떤 입장을 가졌는가 보면 그 진의/성격이 명확해진다.

*. 선교사와 황실 등과의 기본 관계 설명

1. 감리교회 – 선비집단이다.
애초에 선교윤허 받은 당사자이다. 충군애국을 기본으로 삼앗다. 나라가 부패하여 썩엇다고 비판하고 무너뜨리려 하지 않았다.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불경을 저지르지 않았고 황제에게 충성하는 충성심은 옛 절대군주를 추종하는것과 똑같앗고 하나님을 숭상하는 차원과도 같았다. 나라의 상황을 보존해 나가는 방식의 선교가 감리교회 선교의 기본방향이엇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제로 황제는 감리교회 인사들을 절대 신뢰하여 자신의 신변보호 그리고 외교에서 감리교인들을 절대 활용했으니 이는 충군애국과 어학이 되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 노블, 헐버트, 하디, 무스, 홀 가족, 무어, 채핀, 리드, 캠벨, 베델, 엘러즈 벙커, 전덕기, 이회영, 손정도, 김(하)란사, 이준, 이위종, 이상설, 양기탁, 박은식 등이 황실과 민족운동을 도모한 이들이다.

어느 나라 선교역사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제국주의 국가에서 파송된 선교사이나 선교사 본국의 입장과 반대로 피선교인 편을 들었던 유일한 종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본국 국무부의 훈령을 받은 감리교회 미국 선교본부가 이런 저런 훈령을 내리거나 말거나 니넨 돈이나 보내줘라. 조선 선교는 조선 선교사들이 책임진다는 어떤 이상한 고집의 소유자들이엇다.
심지어 북감리회의 조선 친왜 감독인 해리스를 선교사들이 탄핵하여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도 결행하여 성공시켯다. 스크랜턴과 노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당당한 집안 출신의 강골 선비들이기에 가능햇다.
근데, 이런 사람을 꼴통이라고 한다.


2. 장로교 – 장로회는 본시 능력은 선비이나 하는 짓은 잡상인들이다.

-. 언더우드 : 본시 가문이 장사꾼 집안으로 조선에 와서도 석유, 석탄, 농기구 대리점을 운영하며 자신이 발행하는 조선그리스도신문에 자신 사업의 광고를 항시 1면에 실었다하는데, 이를 현재의 장로교 사가들은 우리 민족에게 자본주의 교육을 시키기 위함이엇다고 한다.

-. 알렌 : 천하의 시정잡배이며 질투로 무장한 사나이다. 성격이 화통하다. 거침이 없다. 광혜원이라는 황제 기관명을 하사받고 황제의 돈으로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알렌은 황제의 허락도 없이 싸가지 없게 자기 맘대로 제중원으로 기관명을 고쳐 불럿다. 입국하자마자 자신을 위해 댓가없이 도운 스크랜턴을 엄청 시기햇다. 이는 자신보다 더 좋은 대학 나와서엿다. 알렌은 병원의사보다 미공사관 서기관직이 더 많은 월급을 주자 주저없이 자리를 옮겻다. 알렌이 비운 자리는 캐나다 의사 하디가 담당하다가 빈튼에게 넘겨졌다.

이 후 알렌은 하와이 한인 노동이민 이권사업에 개입하여 송출자 두당 얼마씩의 중개 수수료를 받아챙겻고, 평안도 운산광산을 미국인에게 채굴권을 주면 이 후 미국정부가 한국을 /수호/보호해주는데 핵심역할을 할것이라 알렌방귀를 뀌어 채굴권이 미국인에게 넘어가게 해 결국 1,300만원이라는 거금을 미국인이 벌어가게해 대한이 빚을 왜에게 많이지게 되어 국채보상운동(2,000만원)이 일어나게 하는 동인을 제공햇다.
알렌의 일기를 남겨 자신의 사적과 남들의 사적도 정확히 묘사하여 귀한 사료는 남겼다.
[언더우드는 황실하사 선교기관명을 못받아 구세학당이라는 고아학당을 새문안에서 운영했다.]

-. 빈튼 : 최악의 양아치 싸가지다. 제중원의 공의로 부임하여 치료를 하다가 제중원에서 치료하면 치료비가 병원에 귀속되자 병원문을 일부러 닫고 환자들을 자신의 개인 집으로 오게해 치료해 치료비를 착복하엿다. 그리곤 조선에서 공사관 보다 더 큰 돌집에 살앗다 한다. 미국 남부의 국회의원보다 더 잘살앗다나..

-. 그레함 리 : 압록강변의 아름드리 목재 3000여 그루를 베어 밀반출하려다 들켜 우리정부가 세금을 내라고하자 적반하장으로 나보고 세금을 내라고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자신들에게 조선이 벌금을 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한 인사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기독교가 제3세계 가난한 나라 제국주의 착취하는 첨병종교라는 인식을 천주교와 함께 심어준 대표 종교의 인사이다.
= 하디의 빛회복=영성회개운동으로 엄청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중생체험을 했다고 한 뒤에 벌인 일이다.

경기도지역 장로교회사를 한신대 교수 서굉필은 이렇게 증언한다.
수다히 많은 교인들이 3.1 혁명에 참여햇는데 그 증거로 선교사를 돕는 조사 2명이 선교사에게 신고도 없이 사라진 것이 그 증거라고 제시했고,, 장로교회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감리교회 장로인 이등박문 안중근의사와 공동저격자 우덕순(우연준 개명 전 이름까지 게시하여 많이 아는척하여 내용의 객관성 높이려는 수작질)게시하며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설명도 못하고, 남궁억의 찬송가(삼천리반도 금수강산)를 부르며 애국의지를 다졌고, 최용신의 이야기을 들어 그를 닮기를 소망했다며 등을 유력한 장로교인으로 설명하는 참 천치같은 짓을 한다.
= 우덕순, 남궁억, 최용신은 장로교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사들이긴 하나, 장로교인들이 이들을 존경하여 따라한 면은 있다. 자신들은 자살을 하거나 누구를 죽이는 것이 죄악이라서 의거에 참여는 못하나 민족의식은 있어 안중근과 우덕순 지사의 의거는 좋아했고, 민족의식과 지력이 부족하여 남궁억과 같은 작사능력이 안되니 그 찬송이나마 따라 부르며 민족의지/신앙을 다짐했으며, 최용신을 주제로하는 상록수나 최용신평전을 읽으며 감동으로 나도 이렇게~를 결심하긴 했을 것이다. 이럴땐 성굉필 교수는 정직하게 표현하여 이러한 감리교인들로부터 장로교인들은 감동을 받아 더욱 신앙과 민족회생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장로교에 있어서 황실이란 그저 어떻게하면 영양가있게 뜯어먹을가가 항상적 연구과제엿나 보다. 선교사 닮아 그런가 목사 정인과란 자는 감/장 공동 발행 찬송가를 자신의 명의로 발행하여 판매하는 만행도 저질러 수익을 독차지했다..

장로교 선교사들의 면모가 이러하여 장로교인들은 감리교인들의 인도와 지도로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상동파 장로교인들이다. 탁사 최병헌의 학문으로 전덕기 목사를 지도자로 여운형이 그 역할을 하여, 남강 이승훈, 도산 안창호, 우사 김규식, 고당 조만식 등이 영향을 받아 민족운동에 투신했으며, 간도의 정재면을 통한 김약연 등도 그러하다.
*. 미국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여서 황실의 우대를 받았으나, 그에 걸맞는 충성심을 가지진 않았다.

3. 천주교 –
100여 년간 불법선교를 하다 극심한 박해를 받은 천주교는 선교의 합법성을 감리교회를 통해 얻은 다음 지금의 명동에 종현성당을 지으며, 황실보다 높은 위치에 건축하여 황실의 대노를 사 선교중지에 또 극심한 탄압을 부를뻔한 아찔한 상황을 연출했으며, 성당 건축을 구경하던 상동교인들을 우리 교회 건축 구경을 하는건 불법이라고 죽어라 몽둥이로 두들겨 팻고, 황해도에선 장로교인들을 강제 착출하여 성당 건축에 노역을 시켯고, 이재수의 난이라 일컬어지는 제주도의 난에서 제주인의 정서를 개무시하는 선교전략을 구사햇는데 소위, 건방선교이다.

곰방대를 물고 교자를 타고 다니며 부자 행세를하고 거드름을 피어야 가난한 조선인들이 전도가 될거란 또라이 전도법.

황실과는 웬수지간으로 총독부 편에 바싹붙은 친왜 종교의 총아이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종교는 이미 100여 전에 들어와 수 천의 순교?/희생자를 내었는데, 본국인 프랑스에선 경영해야할 식민지국이 하도 많아 선고사와 선교비를 충분히 지원받지 못하는데 반해, 미국의 개신교는 식민지국이 거의 없어 선고사와 선교비 지원이 월등히여 활발한 선교가 이루어지자 천주교는 이를 질투하여 일본과 밀착하여 우리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선교활동을 하였다.

4. 유교 –
위정척사 입장으로 의병운동에 나섯으나 병력의 열세와 세계사의 조류를 읽지 못하는 오류로 연전연패?하(연전연패만은 아니고, 10전 3승 : 7패 정도?, 무기가 화승총 대 캐털링 기관총이었다))여 조선의 민족 아비들의 빛을 낭비시키는 한계를 노정했다. 허나, 의병전은 민족의 국혼으로 남앗다. 대표 의병장으로 면암 최익현, 운강 이강년, 왕산 허위, 의암 유인석, 도마 안중근, 구연영 목회자, 김동수 권사 등이 있는데 특히 운강 이강년은 의병의 열세를 느껴 연해주와 만주로 이거한 의병진을 방문하여 다시 국내진공하여 싸우자하나 이거 의병*들은 힘을 키워 진공하자 하니 운강은 지금 집안에 강도가 들었는데 언제 힘을 키우고 있단 말이오~하며 국내로 다시 진입하여 최후의 결전을 벌이다 피체되어 순국당하신다. 운강의 국내 진입시 안중근이 두만강까지 배웅을 나왓다하니 민족의 아비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배웅하엿음인가?
*. 황제의 뜻과 탁사 최병헌의 권유로 이루어진 의병진

결국, 감리교회의 입장인 개화를 받아들여 함께 독립운동 전선으로 상당한 일부의 척사유림이 개신유림화한다.

허나, 3.1 혁명시까지도 머리깍은 자들관 국사를 논할 수 없다. 독립 선언서에 황제의 복권을 말하지 않는단 수구적인 이유를 들어 유림은 민족대표로 1명도 참여 안햇다. 다만, 혁명후 뒤늦게 깨달은 심산 김창숙이 민족대표로 유림이 하나도 없음을 통탄하고 유림을 대거 모아 파리장서운동인 독립청원운동을 벌인게 고작이나, 왜는 그마저도 민족운동이라하여 놀랏다. 이것들이 그 동안 경학원을 통해 작위, 은사금, 공작한게 얼마인데 하며 분노했던 것이다.
3.1민족대표의 선언서는 독립을 우리 맘대로 선언한것인데, 반해, 유림의 파리장서는 우리 독립시켜주세요~하고 왜에 독립을 부탁하는 운동이었다.

하물며, 민족대표중 장로교 길선주 목사는 혁명에 참여하고는 피체되엇을 때 자신은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않앗고, 인장을 남강 이승훈에게 맡겻더니 맘대로 남강이 찍엇다 햇으며 다만 독립을 원해 청원하는 부탁을 햇노라 법정증언을 하여 무죄방면 되엇으며 이를 본 민족대표들과 교인 등에게 한없는 실망감을 안겨준 이가 길목사이다.
하여, 길선주 목사는 장로교를 대표해 민족대표로 참여햇음에도 건국훈장을 추서받지 못하다가 2009년에야 이르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는데, 이는 의엄 손병희, 남강 이승훈, 만해 한용운이 1등급 대한민국장을 받고 나머지는 친일(박희도, 정춘수, 최린)과 친북행위자(김창준)을 제외하고 2등급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것을 보면 3등금이라는 것은 매우 황당하고 이례적인 것으로 자신은 독립에 선언한 것이 아니라 청원하였다하여 무죄석방되었기에 다른 민족대표들보다 1~2단계 아래인 3등급 독립장이 추서된 것이다.

당시 길목사에게 화가난 청년들은 길목사를 강단에서 끌어내 내동댕이 첫다하며 결국 그 교회는 분립되엇다.

한편, 유림은 경술왜란후 왜가 주는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주는걸 10,000명중 6,000여 명이 작위를 받앗고 은사금도 수령하엿으며,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호칭이 변하여 왜의 친왜 유교 기관화되엇을 때, 거기에 주저 앉아 [기독교는 제사를 안드린다. 에미 애비도 몰라본다, 연애당이라느니하며 교회를 비방하는 일]에나 열중한 것이 유림의 대표라는 작자들이다. 천년 유학 맛이 갔다.

척사유림과 매국유림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며 아주 일부의 개신유림은 감리교인들과 민족운동을 공동수행햇다.
[감리교회는 구 황실우대라는 보황파의 입장이고, 척사유림은 복벽파라 완전한 절대군주제의 부활을 주장햇다]
-. 위정척사 유교, 복벽 유교 : 개신유림화되며 감리교회와 무장투쟁(이거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전환*)
-. 개신 개화 유교 : 감리교회와 독립전쟁(신흥무관학교, 이상룡, 김동삼 등)
-. 독립 부탁 유교 : 심산 김창숙과 파리장서운동후 감리교회와 의열단-김원봉, 김상옥, 나석주 등 공동투쟁
-. 매국 유교 : 왜가 불교대국이기에 아부용 불교 신도화(이완용=조선불교 평신도 대표, 이능화, 이광수?*, 최남선?* 등)

감리교회와는 위정척사 유교는 개신 유림화하여 개신 개화 유교와 독립 부탁(청원) 유교가 민족운동을 함께 하였다.
*. 황제의 뜻과 탁사의 의지가 관철된 것
*. 이광수 : 조선의 3대 천재중 하나로 2.8선언서와 상해임정 독립신문 발행 참여 등 초기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나, 한 달 쌀 10가마인가의 돈에 눈이 멀어 1920년? 초기 변절(재이북자)
*. 최남선 : 조선의 3대 천재중 하나이며 3.1 혁명 선언서를 작성하는 공을 세웠으나 후일 변절하여 민족에게 실망을 안겨줌(재이북?)

5. 불교 –
1,000여 년 이상의 불교 융성후 조선 500여 년의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는 대부분 폐사(5만 사찰 폐사)되었고 부분적으로 남아 명맥을 유지하던중 불교대국인 왜와의 수교와 갑오경장으로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정책이 해제되자 불교 승려들은 춤을 추며 좋아했다. 북한산 일원에는 왜의 왕과 왕족 그리고 귀족 등 총독부 간부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불사가 불같이 일어나 수 천개의 사찰을 헤아렷다 한다.

1909년 경기도의 승려수가 900여 명이엇으나 1912년엔 1,500여 명으로 승려수가 급증했는데 이는 총독부에 아첨하여 살려고하는 일자 무식쟁이들이 대거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며, 1911년 데라우찌라는 작자가 사찰령을 교시할 때 1) 앞으로 조선불교는 조계종이라 하겠다 2) 조선 불교 대표는 나다 3) 사찰 주지는 내가 임명한다. 4) 앞으로 승려도 고기먹고 술마시고 혼인해도 된다.하자 조선 땡중들 난리치며 기뻐햇다.
[그래서 만해 한용운이 아들/딸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만해는 술을 무척 즐겼다 한다]
불교 승려들은 어쩌다 총독부의 정무총감이 불러 총독부에 다녀오거나 하면 감읍하여 눈물을 흘렸다나 요 근자 무슨 대통령인가 국가 조찬기도회다녀왓다고 뻐기는 목사들 보다 엄청 더 했단다.

이 때 친왜화되가는 조선불교에 맞서 불교자주화 운동인 임제종운동이란 것을 일으킨 만해 한용운 선사는 불교의 매국화를 저지하여 불교의 자존감을 수호하려 몸부림쳣다.
왜는 조선에 왜의 불교 일파들을 파견하여 조선불교를 장악하려하기도 햇다. 왜의 조동종이라는 종파는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를 짚어먹으려다 실패하기도 햇다.

항일 구국기 불교 평신도 대표는 유명한 이완용이었다하며, 1900년경 가난한 여성중심 100만 여의 불교가 1930여년경엔 300여 만명의 불자가 있었다니. 그것의 최고 핵심 도량이 서울의 봉은사라 한다. 수원의 용주사, 평창 월정사 등도 그런 차원이었고..
여성 중심의 민중불교가 남성 지배층 종교화하였단 증거이다.

300여 만 불자중 독립운동에 참여해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이는 10여 명?인데 이는 만해 한용운이나 백용성 승려 이 외에는 거의 참여자가 없었다는 증거이나, 불교사가들은 셀 수 없는 수다한 불자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했노라 말로만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데, 심지어 만공 승려가 무엇인가를 누구에겐가 전해주었는데, 그것이 독립군 자금일것이라 생각되어 건국훈장 추서를 청원한다니 참~

거기에 이등박문을 감리교회 인사들 안중근과 우덕순이 처단하자 감리교회 인사들인 양기탁 등은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르고 잔치를 했으나, 불자들은 안타까이 여겨 장충단에 사당을 세워 박문사라했으며, 심지어 천주교회는 인천의 여학교 이름을 박문여고라 했다니 더 참..
동학에서 떨어져 나온 시천교 놈들은 왜에 사죄단을 보내야 한다며 난리를 쳤고..

게다가 산중종교이며 충군애국도 안하며 어학도 안 되는 불능자들이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엇다.
헌데, 불교사가들은 참 이상하다. 역사연구는 하다가 마는 것인가? 3.1 혁명시 대표적 불교사찰인 해인사, 통도사 등 몇 개의 사찰에선 승려들만의 집회와 시위 그리고 만세운동이 있었다. 해인사, 통도사 50~200여 명? 교회엔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한 동리에 살아가며 평소에 지근거리에 살며 신앙생활을 하던중 3.1 혁명기엔 교회에 모여 시장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다. 헌데, 불교 사찰은 산중에 있으며, 산중 개인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라 사찰엔 숭려들의 공동생활이 있고 개인 신도들은 같이 있지 아니하므로 해인사, 통도사 등에서 승려들만의 독립선언이 있었다는 말은 불교계의 지도자들만 참여한 아주 매우 특별한 케이스의 독립운동 이었는데 이를 간과하고 있다.

만일, 감리교회 목사 200여 명이 한꺼번에 한 교회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다?이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일인 것이다. 헌데 불교는 이것이 아주 자연스러우며 당연한 독립운동 방식이었다는 점을 왜 주장 안하는지 모르겠다.

황실은 눈 안에 없다.

6. 동학 – 천도교 - 시천교
최제우에서 최시형으로 다시 3대 교주 손병희로 교명이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칭되고 중간에 시천교도들을 교단에서 제명하기도 했다.
동학은 인류역사에 유일하게 어느 것에 반대해 만든 종교이다. 그냥 우린 서학에 반대하는 동학이다. 세상에 다시 없을 종교명이다.
하여, 위정척사, 개화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조선정부의 부패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하에 조선의 국력을 최고로 갉아먹은 멍충이 종교이다. 우리 감리교회와는 반대로 정부를 돕는 방향이 아닌 그냥 사회변혁이라는 명분하에 반란을 일삼았으며 민족의 동력을 헛되이 소비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자신들을 반성하며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개화를 받아들여 청년들을 유학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감리교회를 보며 반면교사로 삼은 결과이다. 그래 우리가 틀렷어~ 감리교회가 옳앗어~ 였었다.

그것은 녹두장군 전봉준은 봉기 실패후 피체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엇을 때. 내가 오판햇다라고 고백햇다. 무슨 말이냐? 내가 봉기한 것은 오판이엇다. 왜?
왜는 조선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킬 약한 고리가 과연 어디일까를 불철주야 연구한 결과로 조선정부에 제일 불만을 품은 농민이자 종교세력이며, 권력을 잃은 대원군파(쇄국했기에) 지지자들인 동학에 주목하여 잘 훈련된 간첩을 동학진 안에 침투시켰다.
-. 간첩은 야~ 니네 정부 썩엇어 갈아엎어~를 입에 달고 다닌다.
-. 간첩은 야~ 우리 정부 썩엇어 갈아엎자~라 주장을 한다.
사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정조 사후 거의 100여 년간 부패한 정부에 수탈당한 농민이자 동학도들은 부패척결이란 당연한 의제에 찬성하였고 반부패투쟁에 올인하나 그것이 왜가 처놓은 덫이었다. 조선의 국력을 조선이 갉아 먹게하는 전략. 전녹두는 봉기가 끝난 후에 이를 깨달았고 아~ 내가 오판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황제 입장에서 동학은 정말 패륜집단이다.
뭐 하나 도움이 된 것이 없었다.
감리교회처럼 정부를 도와 부국강병과 충군애국으로 나라를 살리는 방향에서 가만히나 있다가, 유림의 개화에 발을 맞추어 동학의 종교적으로 조직된 힘으로 전민항쟁에 나섯다면 을미왜란. 을사왜란, 정미왜란, 경술왜란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민족이 갈라져 다른 방법으로 싸우는 것이 이렇게 위험하고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다. 나중에라도 깨닫고 참회한 천도교는 3.1 혁명시에 주로 농촌의 교인들의 동원하는 능력을 발휘하였고, 교단의 교주가 교인들의 헌금을 맘대로 사용하는 천도교의 특성상 기독교같이 교회재정을 목사 맘대로 한 푼도 사용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코자 천도교가 거사 자금과 가족원호금을 손정도 목사의 부탁으로 감당하였다.
근래들어 감리교회와 장로교에 준 자금 만원을 갚으란다. 개인 가족원호금으로 준돈이니 지금의 유족들에게 재주껏 받아가라.

인내천. 사람이 하늘이니 황실이 보일리는 없고.
여성과 어린이도 같은 하늘이라 주장만하고 여성/어린이 교육은 전혀 안해 일자무식으로 방치햇고. 태화관 기생 주옥*을 애첩으로 맞이한 손*희.
해서 거기가 3. 1혁명 독립 선언서 낭독 장소로 결정이 되엇다는.
*. 시천교는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일파로 천하의 매국노질을 했다.

동학시절 황실과는 적대하다가 천도교 개명후 황실 우대와 공화파로 전환했다.

7. 대종교
독립운동 역사상 종교와 운동을 제일 최고로 일체화시킨 종교이다.
허나 대중세가 약햇던 대종교는 스스로만으론 민족운동의 전면을 감당하는건 어려웟기에 감리교회와의 능동적 결합으로 특히 무장투쟁분야에서 특기할 만한 성과를 내었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인데 감리교회 사령관과 장교들을 지휘관으로 대종교 사병이 중심이 되어 승전했으며, 이는 대종교 지도부의 군수조달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는 대종교 세력이 대중세를 너무 급격히 잃어 존재감마저도 희미한 실정으로 전국에 수 백여 정도만 남아잇다. 그나마 천도교, 증산교, 기타 민족 종교 등으로 역량이 분산되어 있다.
= 언젠가 대종교 개천절 행사를 보니 10 여명이 천제를 드리더라.

황실에 대한 입장은 불분명하며 공화제 입장이었던 것 같다.

8. 기타 침례교, 성결교, 성공회, 구세군, 안식교, 기독동신회 등
1890년대 경 감리교회와 비슷한 시기에 선교를 시작하엿으나 민족운동에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 그저 종교의 존재감만 연명한 정도로 본다. 물론 따라서 민주화과정에도 아무런 공이 없으며 침례교는 오히려 수구군사정권의 수호자가 된 측면이 더 강하다. 그냥 우린 종교로에만 한정해서 봐주세요 종교들이다.
*. 독립유공자 성결교 2인, 구세군 2인?, 성공회 5인?, 침례교 0명, 안식교 0명이긴하나 태평양전쟁기에 여기의 군소교단들은 강제 신사참배 사태에서 저항을 못하였고 굴복하였으나 결국엔 교단이 폐쇄되는 운명이 되기도 했다. 감/장로교회도 강제 신사참배에 굴복은 했으나 교단 통합을 당했지 교단해산/폐쇄를 당하지는 않았다. 군소교단은 왜는 교회로도 안봤다는 증거이며, 일본은 지금이라도 강제 신사참배와 강제 교단통합과 폐쇄에 책임있는 사죄/배상를 하야 한다.
= 대한민국 정부는 강제 신사참배와 교단통합 그리고 교단폐쇄를 당하며 정신고문에 7년여 간 시달리고도 식민사학자들에 속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종교지도자들의 명부를 즉시 제거하고 이에 합당한 절차를 거쳐 사과와 위로조치를 해야한다.

9. 왜색 개신교 조합교회 –
유일선은 조합교회 참여만으로 친일인명사전 등재됨. 구체적으로 무슨 친왜 행적이 잇는지 잘 모르면서 친왜 종교에 주도적으로 참여만으로 사전에 등재되었다.

하면, 천주교나 불교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것 자체로 친일 매국노여야 하며 조합교회 교인은 3.1 혁명엔 민족의 양심으로 수명 정도가 참여했으나, 교단은 민족의 거부로 얼마 안 되어 소멸되었다. 그들은 왜의 주요 기업들인 미쯔비시 등은 조합교회를 적극적으로 키우고자 기부금을 쏟아부엇고, 돈 몇 푼에 눈이 먼 얼간이 조선인들이 조합교회에 입교했으며, 왜적들은 정상적 교회를 출석하는 감리교인들을 겁박하여 조합교회로 강제 개종을 시키기도 햇다

이 자들은 이등박문의 지시대로 아이들에게 눈깔사탕이나 주며 임금(황제)은 오줌싸개~라는 서동요를 부르고 다니게 하는 망동을 저질럿다.

10. 무교회주의 - 김교신
유영모, 함석헌, 남강 이승훈(장에서 개종), 유달영 등과 더불어 제도권 교단을 거부한 이들은 비록 왜인(우찌무라 간조)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앗으나 민족운동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김교신은 유달영을 통해 최용신의 삶을 엮어 ‘최용신소전’을 펴내 민족의 마지막 생멸의 위기때에 민족을 구하는 건곤일척의 싸움을 이끌어냈다.
평전은 2000권 발행해 20여 만명이 돌려 읽었다하며, “아니 이 어린 처녀도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이겨냈는데 우리도 마지막 힘을 다해 고난을 극복하자”는 뜻에 민족이 공감하였다 한다.

11. 독립교회 –
만주지역 정통 감리교단을 떠나 우리 교단의 민족운동을 약화시킨 역적 집단이다. 왜적들은 서양종교의 힘을 이용하는 기독교를 적극 경계하여 조선인과 미국인을 결별시키는 일을 항상적으로 추진했다. 여기에 자주적 한국인들의 교회 형성이라는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 몇 몇 독립교단 교회의 탄생이다.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자치 100주년 이런 말은 이들과 의식을 같이 한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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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라 언급의 필요도 없지만 본인들은 상관있다하고, 주류이고 싶어 안달이니 조금만 언급해주면.

12. 승전/광복 이 후 생긴 종교
개신교론 기장과 순복음 등의 오순절 계통이 잇다.

승전 후에 설립된 종교로 민족운동과정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종교들이다.
허나, 기장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특이한 역할을 감당했는데 이는 교회의 주력이 호남에 기반한 원인과 기장의 원초 주력이 감리교회의 영향으로 인한 것으로 판단한다.
= 기장은 해방후 탄생된 종교가 틀림없으나 그 전신이 되는 북간도 명동촌의 정재면과 김약연을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삼고 있나보다. 그래 그건 좋은 자세다. 허나, 이 점은 분명히 해두자. 정재면은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에서 탁사와 전덕기 목사의 민족신앙지도를 받은 에이스 청년으로 북간도의 김약연은 민족 교육을 위해 정선생을 청빙했으나, 정선생이 나에게 교육을 받으려면 먼저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해야한는 것이 전제조건이라하자, 김약연은 부락회의를 하여 집단개종하기로 결단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신앙과 민족교육 그리고 민족운동의 동량들을 양성하는 동시에 자신들도 새로운 사람으로 빛다람시켜가기 시작하더니 김약연은 연로하여 목회지가 되고자 학력이라는 자격 조건이 필요없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 목사가 되어 간도의 대통령이라 간통령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의 민족지도자가 되었으며, 명동촌에선 문재린, 윤동주 등의 천재적 민족운동가들을 배출하였다.
이를 감리교회의 견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하며 상동파 장로교인이라 한다.

순복음/은진은 내용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정권의 비호를 받아 급성장한 후 민중빨아 꿀먹기 바쁘다.
천하의 재수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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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욱~ 읽어두시면 각 종교는 대략 이러했구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혹여라도, 아닌것 같으면 말씀해주세요.



전체 6

  • 2022-10-22 00:46

    참고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 2022-10-23 00:47

      조은 참고가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 2022-10-22 11:06

    잘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어 매우 감사합니다.


    • 2022-10-23 00:49

      아~ 저의 글이 청양고추 같았나봐요?
      매우셨다니~!


  • 2022-10-22 11:08

    기독교대한감리회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겠네요
    이러한 자료가 그냥 나왔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리회가 이렇게나 훌륭했나 싶었나 싶다가도
    이렇게나 훌륭했다던 감리회는 지금 어떤 감리회가 되었나요
    머지않아 지금의 감리회를 이런식으로 평가할때
    과연 잘한 게 한 개라도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함을 넘어 두렵습니다.

    타종교, 타교단과 비교해서 우리가 제일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네요
    우린 정말 잘한 것만 있을까
    저들은 정말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자부심보다는 의문이 생기네요


    • 2022-10-23 00:47

      감리교회 역사상 밀정이 없다 = 하디의 빛회복운동으로 인함이다.
      유이한 자발적 친일 매국노는 유일선과 옥관빈 등 3명 정도가 있다.

      감리교회의 저질화는 1938년 강제신사참배에 굴복한 후 위장 항복도 수다히 있긴했으나
      정춘수 감독 체제는
      1. 감리교회의 친왜정책에 반하는 목회자 50여 명을 파면, 휴직시켰으며
      2. 자신의 체제에 반하는 친일부역자 평신도 김활란, 윤치호 등도 교단 요직에서 제거했다.
      3. 국방헌금을 강요받고 교회 39개처를 방매하고 20만원을 만들어 10만원은 헌금하고
      10만원은 자기들 곧, 정춘수, 갈홍기, 박연서 등과 나눠먹었다.
      4. 19명이 강제신사참배 거부로 구속되며 순교당해갈시 석방을 위한 노력이나 유가족 원호를 전혀 안했다.

      그리곤, 이의 여파로 승전/광복후 재건/복흥파로 나뉘어 대결이 있어 위험한 순간을 여러 방면의 노력으로 극복한지 얼마 안되어
      6.25전쟁이 발발하여
      1. 북에 의한 선한 목자론으로 남하 안한 A급 목회자 신석구 등 순교.
      2. 6.25전쟁하 왜의 침략하도 버텨냈는데, 북의 공산주의라고 어떻게 하겠냐던 순진한
      선한 목자론으로 피난 안한 60여 명의 A급 목사/장로 등 납월북.
      3. 그 후 소수의 A급에 B, C급의 보통 목사들 다수에다가 이기붕과 밥맛이아 부부의 돈보따리 들고 다니며 선거 운동을 했었던 F급의
      작자들.
      4. 북의 박해와 억압에 남하한 북에 계시던 목회자들의 친미반공화에(나쁜건 아니지만)로
      5. 미국의 선비정신을 따라감이 아니라, 양아치양키문화짓을 따라가게한 어떤 것.
      6. 이 외에도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중앙정보부의 기독교 어용화 공작인
      한신대의 지방 병점 이전과 총신대의 4년제 대학화를 공약으로 정통신학의 어용화 신학인 개혁신학의 전파를 위한
      공작으로 비인가신학이 난무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 시작해 80~90년대 난리났던 우리교계를 보니
      야~ 저거 괜잖은것 아닌가? 부화뇌동했던 감리교회 목회자들의 좌고우면으로 지금의 문제들이 노정되기 시작해 되돌리기
      어려운 상태가 된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처음의 중심을 잊고 잃었다.
      이 외에도 문제 유발 변수가 수 십가지는 더 있을 것입니다.

      허나, 아직 우리에게는 어떻게 역사회복을 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있다고 보고요.
      그 과정과 과제가 지난하긴 하나 손을 놓고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이렇게라도 하고 있다는 점을 혜량해 주세요.

      오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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