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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회원에게 드리는 글

작성자
민관기
작성일
2022-09-18 14:07
조회
1707
서울연회에서 탁사를 배움

서울연회원에게 헌정한다함은 왜적의 침략에 대한 항전기에 전 민족중 제일 고통이 심햇던 감리교인들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서울연회는 그 시기 지금 현재보다 보다 더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던 곳이다.
대한제국의 황실과 감리교회 선교 본부가 민족운동의 총본산이며 핵심 정무기관이기에 그렇다.

이 글의 내용은 여운형과 감리교회 그리고 신사참배에 담긴 비밀 이야기이다.

우린 보통 항왜 성전기중 태평양 전쟁기 즉 황국신민화 정책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는 신사참배 요구에 굴종하고 창씨개명같은 거나 하며, 민족의 요구엔 교회와 민족이 무능하게 대처하였다고 알고 잇다.
그런데 아는게 아는게 아니다.
*. 일제 강점기는 그들의 입장에 쓰는 용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점령을 당한 것이 아니라 침략을 받은 후 우리는 적들이 항복하고 철수할 때까지 싸웟다는 관점이다. 하여, 항왜 성전기이다.

정말 그럴까?
그렇게 무능하게 준비도 없이 훼절하고만 살았는데, 왜적의 항복후 건국 준비가 그렇게 신속하게 될 수가 있었을까?에 대한 물음을 하면 그 답은 찾아질 수 있다.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이고 충분치 못한 자료이지만 민족세력의 핵심인 감리교회는 국내 부분에서 이렇게 대처햇다.

1. 일단, 우리 속으론 긴밀히 강력히 준비 대처하지만 왜적의 요구엔 최대한 느리게 대처한다는 것이 기본 방략이다. 이는 신사참배에 대한 정책을 왜적이 관철해나가는 과정에서 경성에 선교사령부를 가지고 있던 감리교회가 평양이라는 외곽의 장로교회보다 늦게 굴복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경성의 치안 등은 지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전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압박이 훨씬 심했는데도 늦게 굴복했다.
*. 지방인 장로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압박은 지방이기에 훨씬 약했다.
*. 우린 선교와 민족운동의 주요 핵심 정무기관이 다 경성에 있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 국내에서 제일 중요한 정무 핵심기관이 경성에 있던 감리교회 본부와 감신과 연세 배재 이화 배화 태화* 등 그리고 교회들인데, 여기서는 민족운동의 핵심 구국간성들이 활동하거나 양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타격을 받지 않게 보호하려는 민족의 눈물겨운 노력. 민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왜 중요한가는 이 학교와 교회에서 배출한 독립운동가를 보면 안다.
*. 감신, 연희, 세브란스, 배재, 이화, 배화, 태화, YM 출신과 기반으로 활동하여 건국훈장 추서받은 유공자의 수가 200여 명이 넘은 것이 그 확실한 증거이다.

2. 경성 한 복판에 있는 배재학당은 끝내 학내에 황국신민 서사석을 설치하지 않았다.
왜는 배재에 요구했다. 황국신민 서사를 이렇게 저렇게 외우며 그 표지석을 교내에 설치하라 요구하였는데, 말로 일단 승락한 후 1년 안 하다가. 왜 안 하냐 따지면 아네. 여기에 할겁니다하고 1년 안 하다가. 왜 안 하는거요 닥달하면. 아네. 이제 돌 사왔습니다. 1년 안 하다가. 아니 이런 당신들 모하는거야 윽박지르면 아네. 석공을 구했으니 이제 곧 완성됩니다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천하의 만만디 속임수다. 하나, 동방요배나 황국식민서사 암송은 도무지 피할 수 없어 했다.

3. 1941년 감신대에서 항왜 성전기 마지막 학생운동 사건인 "황국신민화 교육 반대 삐라사건"이 발생해 교장과 학감 그리고 학생 등 10여 명이 투옥되었다. 홍현설, 변홍규, 정일형 등의 교장/교수와 유증서 등의 학생들이었고 투옥된 이들은 80여 일간 모진 고생을 했으며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학생들중 내가 했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는 했을 테지만.

4. 감신 재학중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제적?(강제휴학?)으로 학교를 그만둔 최용신* 전도사가 안산에 와서 민족계몽운동을 하다가 서거하자 민족은 전면적인 장례투쟁에 돌입했다.
1) 한 처녀의 죽음을 유례가 없이 중앙 일간지에 여러 차례 부고와 추도문, 기고문 등이 발표된다.
2) 대한민국 최초 사실상의 여성 민족장인 사회장으로 치러진다. 한 1~200여 명의 농촌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을뿐인데 그 시골에 1,500여 명이 넘는 장례 인파가 몰려들었다.
3) 동아일보가 소설을 공모하여 감리교회 심명섭 목사의 동생 심훈이 상록수를 발표한다. 이 소설이 사실과 다르게 남녀간의 애정문제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고 샘골교인들의 불만이 있따르자 연세신학 출신이자 무교회주의자인 김교신이 제자 유달영에게 최용신평전을 집필/발간케 했다.
소설 상록수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출판 사상 최고의 부수인 1억권이 발행되었으며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최용신 평전"은 항왜기 최고의 다독 도서로 꼽힌다. 총 2,000여 권이 발간되었는데, 1권당 200여 명이 이상이 돌려보았다 전한다. 이 평전으로 민족은 식민지파쇼광포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민족은 "한 처녀도 이렇게 힘들게 버티며 살았는데 우리도 조금만 더 버티자"는 정신이 살아나 민족은 마침내 왜적을 이겨낼 정신적 힘을 얻었다.
4) 이 때 이 장례투쟁을 주도하여 꾸민 이는 염석주이다. 염지사는 여운형과 매우 친밀한 동지로 그가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재직할 시 최용신에 대한 각종 기사가 신문에 게제되도록 도모한 이 이다. 염지사는 최전도사의 상록학원 이사장으로 최전도사의 운동을 도왔다.
5) 장례 한 번 치르는데 민족의 노고가 어마 어마했다.
*. 왜적들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사람 죽어 장례 치른다는데 뭐 별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 최전도사는 샘골교회를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교회의 교사/전도사였다.
나열하면 동쪽으론 둔대교회, 반월교회, 야목교회엿고, 남서쪽으론 수암교회, 군자교회, 성광교회, 선부교회* 등이다. 지금 걸으라치면 엄청 멀다. 한 1~3시간 거리다. 허니 입도 짧아 먹는 것도 부실한 최전도사가 각기병과 장중첩증에 걸려 서거햇던것은 아닐까?
*. 위의 모든 교회들은 해방 이전에는 담임전도사는 없는 순회감리사/샘골교회 담임목사/선교사가 순회하는 구역들이었다. 그렇게 해방 이전 2~30 여명 정도 유지만 되던 작은 교회들은 지금은 다하여 목회자만 지금껏 세자리 숫자를 배출하는 교회들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이 후로도 샘골교회는 계속 알낳기를 하여 지금의 반월중앙교회, 본오교회, 부암교회라는 자식 교회를 두엇고, 반월교회는 성안산형제들교회 등 5교회를 낳았으며, 반월중앙교회는 만족교회 등 10개 교회를 낳았으니 이들은 손자 교회들 격이다.

또한 야목교회는 마지막 의거 사건인 부민관폭파사건의 주모자 조문기 의사를 배출햇다. 조문기는 희대의 악마, 민족 반역 살인자인 박춘금이 1945년 8월 9일 동아분격대회를 열고 8월 17일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살생명부 2만명을 작성해놓고 실행하려는 계획을 파탄낸 교회의 장한 청년이다. 지금 서울시의회 앞에 보면 조그만 표지석이 잇다. [부민관 폭파 의거터]라고. 박춘금*은 왜적들이 도왜할 시 적들과 함께 도왜했다. 국내엔 도저히 있어선 안 될 반역자였기에..
*. 그 흉악한 왜군위안소를 운영했던 배정자란 게집조차도 도왜하지는 않았다.

또한, 군자교회, 성광교회, 선부교회 등을 통해 낳아진 교회들의 수나 목회자의 수는 수다한데, 서울연회 서대문지방 애신교회에서 청소녀들을 돌보시는 김금옥 목사님과 이 분의 부군 박민용 전 협성대 총장, 이 분의 조카들인 김미숙, 김영민, 김영덕 목사 3남매가 있는데 아주 훌륭한 신앙의 가문을 일구셨다. 사실 이 공은 돌아가신 안상금 장로의 공이시다. 부럽다 부러워~ 내가 안산에 조상대대로 600년산 토박이로 이처럼 부러운 예는 없다.
감리교회의 여성들이 어떻게 자녀를 양육하여야 하는가에 하나의 모범이다.

*. 하나만 예로 들면 상동교회(스크랜턴과 대부인) - 무지내교회(스크랜턴 대부인과 아펜젤러) - 샘골교회(최용신)* - 반월중앙교회 - 만족교회의 5대 교회가 형성되엇고 얼마후면 6대교회가 탄생한다.
*. 최용신 : 탁사와 같은 양명학 계열 중농학파 이익의 제자의 맥을 잇고 있다. 최용신도 왜경을 속여가며 민족교육을 시키는데엔 이골이 난 전도사이자 교육자였다.

근데, 최선생이 입이 짧은줄 어떻게 아냐고?
사진을 보면 입이 작고 새초롬하게 생겨서 먹성이 별로 없게 생겻다.
*. 이 때 최전도사와 같이 숙식하며 일한 전도사가 시흥출신 장명덕(무지내교회 출신 = 아펜젤러기념교회)이며, 담임자는 전재풍 그리고 사모 김복희는 3.1 혁명 참여 유관순 등과 옥고치른 이화여전 출신으로 최전도사 사후 학원을 최전도사의 여동생 최용경과 같이 운영하엿다.
무지내 교회는 현 안산과 시흥 그리고 수원 지역 등 모든 경기지역 감리교회의 최초 신앙열매이다.(남양지역 교회 제외)
*. 최용신이라는 이 자그마한 한 여성에 의해 바르게 살아가야하는 사람의 도리를 깨달아 봉사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실제 그러하게 살아간 이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조차 어렵다. 민족계몽, 문맹퇴치, 새마을운동의 발로와 산림녹화, 식량난 극복을 위한 치열한 투쟁, 하나라도 더 생산하기 위한 산업전사들의 그 아름다운 투쟁, 배우면서 일하는 정신, 한번하면 끝까지 간다 등의 정신 수양은 최용신을 모델로하는 상록수와 최용신 평전으로 인함이라 할 수 있다.

*. 염석주 지사에 관한 얘기는 따로 특별히 해야 할 이유가 있다.

5. 여기가 오늘의 메인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몽양 여운형은
양평 출신으로 배재에서 수학하고, 상동교회에서 민족운동을 전덕기 목사로 부터 전수받고 강릉에 초당의숙을 열고 강릉중앙교회의 의숭학원에서 같이 교사하다가, 경술왜란으로 왜적이 초당의숙과 의숭학원에 천황연호 사용을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단군연호와 서력을 사용하다가 학교를 폐교 당하고 쫒겨나 본격적인 민족운동의 길을 걷기위해 만주에 상동교회 신민회 인사들의 결의로 이회영 권사(선생), 이동녕 등이 세운 신흥무관학교 즉 독립군 장교양성기관을 순방하고, 독립운동가의 집결처인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상해 임정 참여 등의 해외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국내로 기획피체/침투/투옥되어 국내 민족운동의 진영을 총괄 지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몽양의 전략은 임정 지사들의 국내 기획 침투 전략의 일환이엇는데, 도대체 뭘 믿고 뭘 기반으로 국내운동을 지도하려 했을까?
*. 임정지사들의 대부분이 상동교회의 신민회인들인데, 특이한 것은 목사중 임정 처음부터 마지막 환국하기 끝까지 동행햇던 이는 감리회 목사 이상만이 유일하다. 이상만은 당진의 면천교회 목사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상해에 나타났고, 임정의 국무위원(국무령제하 장관)으로 목사로 끝까지 활동하였기에 임정의 종교성은 100% 감리교회이다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 다른 목사 즉 손정도, 현순, 김병조 등은 당분간 머물렀던 목사들이다.


몽양의 조직 밑천이 본디 교회이다.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과 민족운동을 시작한 몽양은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감리교회 출신으로 장로교회 전도사라는 직책을 얻어 장로교회를 민족운동 전선에 묵어두고자 하는 프락션 활동을 하였다. 두터운 인맥과 담력의 배경.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린 일반적으로 항왜 성전 말기에 몽양이 건국을 준비하기 위하여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생 들을 기반으로 비밀결사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고 알고 있다. 맞다. 틀림없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린 그 같이 햇던 이들의 실체적 존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이들 이었는가에 대해선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1927년을 기억하자.
좌우 합작 민족운동 기관이었던 신간회와 여성 기관으로 근우회가 창립되었던 시기에 조직은 삽시간에 수 만의 조직원과 수 백개의 지역 조직을 갖추게 되엇다. 도대체 어떻게? 사무실은 YMCA 사무실과 조직원 그리고 YWCA 조직원 등 각 지역의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은 그 실 구성원이 교인들 이었었는데, 그 신간회 근우회가 3년 여만에 해체된 적이 있었다.
*. YMCA 전국 전 지회가 전부 신간회지회로 동시 전환한다.


이 기억을 1940년대의 건국동맹에 대입시켜보자.
신간회와 근우회는 공개 반합법조직이어서 활동이나 면모 인사들이 드러나 잇지만, 건국동맹은 미공개 비합법조직의 특성상 전혀 드러나지 않게 조직 작업이 이루어졋다.
현상적으로보면 광복/승전을 얼마 앞두고 왜적들이 자신들의 항복후 퇴각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몽양을 찾아 상의하였다는 것이 뭘 말하며, 민족의 승전후 임정이 입국하기도 전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20여 일만에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조직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었던것은 순전히 몽양이 가지고 잇던 민족역량중 감리교회와 장로교인들 특히 감리교회의 역량이었던 것이다.
*. 전국의 학생 조직, 기독교 조직(이 속에 노동자, 농민, 지식인이 있다) 등은 건국동맹에 비밀 조직원으로 5만여 명이 굴복하고 항복한 모습으로 합류한다.
*. 물론, 당연히 감리교단 지도부나 YMCA 지도부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가 없게 말이다.
*. 신간회 근우회시엔 전국에 수 백개의 지회와 수 만이 순식간에 보이도록 조직되나 건국동맹시엔 비밀이니까 하나도 안 보이는 것일 뿐.
*. 상해 임정의 연통제 조직도 물려받았다.
*. 동선은 이미 몽양이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등의 인맥과 경로를 통해 장악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조직을 손바닥 위에 있는것처럼 지도했다.

겉으론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단 지도부 였었으나, 속까지 왜적에게 굴복한건 아니었으며,
이건 민족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교회의 위장 항복이었다.
교회의 역량과 YMCA를 중심으로 포진해잇던 교회 역량은 신간회 당시와 똑같이 조직 역량을 한꺼번에 폭발시킬 수 있었고, 건국을 위한 준비는 그렇게 되었다. 폭발은 했으나 왜는 아무런 조짐도 알아 차릴 수가 없었다.
*. 이 위장 항복을 하고 강제 동방요배나 신사참배 그리고 황국신민 서사를 왜놈들 앞에서 외울때 얼마나 서럽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팟겠는가?
왜적들은 우리 민족을 정신 고문한 것이다. 우린 민족을 위해 기꺼이 당해 주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왜놈들 가랭이 밑이라도 기었다.
*. 그런데 신사참배에 굴복 절대 못한다고 끝까지 맞서 싸우다 서거하신 분들은 그 분들 대로의 공적이 있는 것이다 = 최인규 권사님, 신석구 목사님, 권원호 목사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사실 이 분들 덕에 비밀조직이나 위장항복이 안 들킬 수 있었다. 진짜 항복한것처럼 보였으니.
*. 이것도 모르고 광복/승전후 감리교회는 재건파 복흥파로 갈라져 감리교회는 싸웟다. 전 민족이.. 나는 니가 해가며...
이 말은 몽양의 비밀 조직 작업이 그만큼 치밀했다는 일 증거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쫒아다니면서 그게 아니었다고고 해명할 수도 없으니 본디 비밀운동의 실상이 그러하다. 천하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활동한다.
*. 천하의 몽양도 위장용으로 동방요배햇다.
*. 이 정신 수탈/고문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제이다. 신사는 전국에 야외의 정식 시설만 2,200여 개가 설치되었고, 모든 종교시설의 안에도 조그만 시설이 설치되었었다 한다. 우리가 위장 항복과 강제 신사참배였다는 결정적 증거가 잇다. 2,200여 개의 신사는 왜적의 항복일인 1945년 8월 15과 16~17일 단 3일만에 전국에서 단 한개도 남기지 않고 부서졋다. 누가 부셨겠는가? 교인들이 다 부쉇다. 그만큼 교인들은 괴로웟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성환의 감리교회에 신사의 기초석이 뒤곁에 남아있다. 다크 유적의 복원.
*. 어떻게 이 정신 고문 수탈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중지를 모아야.


여기엔.
감리교회 목사인 심훈의 형 심명섭 목사와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의사엿으며 송도고보와 배화여고 교사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자이자 종교교회 교인이며, 1930년 북남감리교회의 합동인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역사적 선언이나 교리적 선언 등을 웰치 감독과 김종우 목사 등과 초안한 "이만규"가 잇엇다.
이들은 여운형과 해방후 건준을 조직하여 좌우를 망라한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착수하였고 이것의 결과가 인민공화국이다.
이만규는 인민공화국의 보건부장과 문교부장을 역임했다.

이 건준이나 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므로 국내에 뭐 별게 있었겠느냐?는 인식을 순식간에 바꾸는 어떤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혁명적 사건이었다.
*. 뭐 별거 없었는줄 알앗는데 갑자기 건준이 나오더니 공화국 정부가 나왓어? 이것이 혁명아니면 뭘까?
*. 오랜 기간 준비되어왔던 것들의 외화였던 것이다.

사실,
여운형이나 이만규는 정말로 빼어난 역량을 갖춘 이들 이엇다.
천황연호 부정하고 단군연호 사용하다 쫒겨나는 일이나, 장로교회를 민족운동 전선에 못빠져 나가도록 프락션이 된다든지 하는건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감리교인이면서 장로교인이기도 장로교인척이기도 하며 둘 다를 감당한 것이다.

이만규.
해방 정국을 뒤흔들엇던 사건중 하나인 서울대의 국립 대학화 반대투쟁(국대안 반대투쟁)의 선봉장이다.
추진 주체가 미군정인데 이에 맞서 정면으로 맞서 싸웟다.

여기에 이렇게 간파되어 주장은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곧, 감리교회를 비롯한 민족운동 진영은 왜적들은 아무도 눈치 못채게 건국을 실질적으로 준비했다.'
하여, 민족이 왜적들의 굴종 요구에 제대로 된 반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신사참배나하고 그랬던 무기력하기 짝이없고 무능햇던 우리 교단 지도부였다 폄하하는 것은 실상이 아니다.
헌데, 현상을 보면 교회나 YMCA 등의 단체를 보면 굴복하여 아무것도 안 하는 것같이 보이고 신사나 참배하니 굴복했구나!라고 확신을 하게하는 것 자체가 전략이었다. 굴복 안 한것 같이 보이게 하면 들통나니. 하여, 해방후 극심한 혼선이 있었다.


[감리교인이 건국동맹의 주요 비밀기간요원이었다.]
결론.
목적을 위해서 다 속이는 거였다.
*.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교육계 그리고 청년계 학생계를 총 망라하며 임정의 국내 조직 역량의 총집결체인 건국동맹은 그렇게 조직되고 활동하였다. 그 핵심이 여운형과 이만규이다.
이 조직은 하나님만 알게 움직인 민족의 "다크 템플러 곧, 어둠의 사제"들이었다.


존경하는 서울연회원 여러분!
민족과 교회가 누란의 위기에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셨듯 앞으로 신앙의 선진들처럼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가길 소망합니다.

서울연회내 유적과 교회들 그리고 총화체인 서울 국립현충원.
서울연회내 "감리교회 성지 루트를 정복하라" 프로젝트.


근데, 참~ 국립서울현충원은 서울남연회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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