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하나님의 능력(고전1:18-25).
작성자
오재영
작성일
2022-09-03 18:57
조회
1053
시대마다 생명력 있는 교회와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하려면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질문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어디에 있어야 하며 신앙 생활은 어떠한 삶을 말하는 것인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교회가 크고, 교인들이 얼마인가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가 크고 많은 성도라면 좋겠으나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마16장에는 주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침노하지 못하는 처음 교회를 약속하시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절). 지금도 우리는 그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빌립보3장 18절에는 사도바울께서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으로”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말씀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올바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은 교회의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성도들이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어느 보수적인 신앙으로 많은 주석을 쓰고 오랜 시간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요새는 신학은 많아도 십자가가 없다, 설교는 많지만 그 속에 십자가가 없다, 교회가 윤리 도덕을 이야기하고, 복을 말하지만 오직 십자가가 아니면 영혼 구원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 생활에 십자가에 대한 고백이 없다면 그는 지금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종탑에다 교회 안에다 십자가를 내걸지요. 그러니까 이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다운 생명력이 걸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계시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들을 수 있는 사람, 이들은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들은 찬송에 십자가란 단어만 나와도 눈물을 흘리며 부르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어느 환경에서 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을 감격하게 하고 시대마다 계시를 주시고, 행하여야 할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어떠한 문제도 십자가 안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겸손히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 보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가 시대 조류에 휩쓸리고 유혹을 받아 십자가가 아닌 땅을 들여다보니까 그렇지, 성도가 제대로 십자가를 쳐다보면 그 안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생명력과 두려운 능력을 순간 순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듯 십자가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 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사도바울의 간증“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의 본문 말씀에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마태 · 마가 · 누가 · 요한의 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설명해주는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내용마다 신앙의 결정체가 이루어지고 구체화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케리그마(Kerygma)라고 합니다. 이는 선포한다는 뜻 입니다. ‘케루세인 프로 크레인’ 그런 뜻인데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처음 초대교회에서 선포된 메시지를 줄여서 케리그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말씀을 듣고, 또 말씀에 따라 행하기도 하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이들에 관한 내용을 보면 우리가 깨달을 내용이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전이해(前理解)와 선입견(先入見)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태로 3년 동안을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바로 되지를 못했습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저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유대나라를 회복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까지도 승천하실 감람산까지도 그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승천하실 주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하고 물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메시야 대망사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에도, 성만찬의 자리까지도 예수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누가 우편에 앉고 누가 좌편에 앉을까 하는 생각으로 서로 견제하며 시기 질투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뜻밖의 상황에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한마디로 “멘붕상태(멘탈붕괴)”로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크게 낙담하고 실망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뵐 때에도 저들은 어리벙벙했습니다. 부활은 사실인데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게 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십자가 사건과 부활, 오순절”은 일직선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순절 없는 부활 사건이라면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남을 뿐입니다. 또 부활사건 없는 오순절 성령사건이라면 신비주의에 불과합니다. 또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비참할 뿐입니다. 이 셋을 함께 일직선상에서 묶어 이해해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약속대로 성령께서 임재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심과 함께 저들의 입에서 마침내 바른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의 생애를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도 직접 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을 뵈었고 승천하신 후 약속대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받은 것이 교회가 소유한 메시지, “케리그마”입니다. 처음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옵니다. 이 복음이 초대교회의 가장 중심 인물인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4대 설교가 있습니다.①사도행전 2장 14절로 39절, ②3장 12절로 26절, ③4장 8절로 12절,④10장 34절로 43절에 이르는 내용입니다. 거의 내용이 비슷하지마는 각각 장소와 시간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이 복음을 원수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담대하게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그리스도론”이라고 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바울의 여러 서신 중에서 ①고린도전서 15장 1절로 7절,②로마서 1장 1절로 4절 ③골로새서 1장 14절로 18절, ④빌립보서 2장 6절로 11절, 이 말씀에도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누구이심을 집중적으로 전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모두 종합하면 몇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냐 - 첫째는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분입니다. 예언된 대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성취로 오신 분입니다. “성경대로”라는 것이 첫째 주제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 이 모든 사건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이, 바로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질 때에 그 증거로서 선포되는 곳마다 함께하시는 이적들과 영혼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 이적이 나타날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40여세 된 이가 온전케 되는 광경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 것처럼 왜 나를 쳐다보느냐, 이것은 그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하였느니라. 하고 선포합니다. 또 오순절 초대교회에 있었던 사람들의 엄청난 변화는 모두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구원자 되심을 증거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넷째는, 그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본대로 기록된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다섯째는, 이제 회개하면 성령을 받을 것이요, 성령 받으면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현재적 생명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이 교회가 소유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독교는 곧 십자가의 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도는 그 뜻을 믿고 아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어리석고 미련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 시간을 정하여 교회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오는 것 정상적인 신앙인으로 볼 때에는 모두가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의미 없고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초대교회에도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죽느냐, 메시야가 어떻게 십자가에 그토록 처참하게 저주받은 모습으로 죽느냐, 말이 안 된다. 그런 종말이란 있을 수가 없다. 메시야는 영광의 메시야인데, 누군가 죽이려든다 해도 말씀 한마디로 그러한 자라면 진노를 받아야지, 그렇듯 비참하게 당하고 아무런 내용이 없다, 알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욱더 거리끼는 것은 제자 가룟 유다가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입니다. 많지도 않은 12제자중 하나 그 제자의 손으로 팔리는 이가 무슨 메시야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거리낌이 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라는 것은 저들에게 저주의 상징이란 말입니다.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저들에게 거리끼는 것입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과거 다윗 같은 영광의 메시야를 생각하고 성경에 예언된 고난의 메시야는 기피하였기에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영광의 메시야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은 권능을 원합니다. 이적과 표적,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왜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 가냐는 것입니다.
또 헬라사람들도 십자가는 거리끼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지혜는 논리요 철학입니다. 필로소피아, 필로는 사랑한다는 말이고 소피아라는 것은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러소피’하면 철학이라는 말입니다. 아주 지혜를 좋아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저들에게도 어리석어보이는 것이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었습니다. 도성인신(道成人身)-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이해가 불가한 것입니다. 창조주가 십자가에 죽느냐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사실을 계시적으로가 아닌 인간의 이성적으로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께서 로고스요, 로고스라면 그도 피조물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창조주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예수님이다. 하는 말은 논리적으로 이야기가 안 된다. 더구나 그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땅에 오셨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이 헬라사람들의 주장이고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어떻습니까?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이해됩니다. 이것은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는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면 모두가 이해되고 이해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이해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고 경험합니다. 속죄를 경험합니다. 죄 사함을 경험합니다. 중생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인 됨을 경험합니다. 또 십자가 앞에 겸손해지는 그런 능력을 체험합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강해지게 됩니다. 불가능하던 원수를 사랑하게도 됩니다.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 하는 용기를 얻습니다.
특별히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누립니다. 율법을 초월합니다. 율법의 억압을 초월하고 극복하고 무한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이와 같은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거듭난 성도들마다 경험하고 체험합니다, 오늘의 본문 24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이것은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입었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의롭거나 능력이 있기에 믿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도적으로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믿는 이들의 믿음에도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표적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오늘도 진리를 모르는 이들은 표적과 능력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병 낫게 해주세요. 돈 잘 벌게 해주세요. 만사형통하게 해주시고 무사태평하게 해주시고, 하면서 표적과 능력에 집착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중심은 그 때문입니다. 복 받으려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혜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본문으로 보면 헬라 적 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 많이 하고 신학공부를 많이 하고, 봉사하고 하면서 지혜를 구하고 지식을 구하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그런 구도적인 믿음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의 유형은 다릅니다. 그는 앞의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는 십자가 안에서 이미 만족했습니다. 능력도 더 바랄 것 없습니다. 십자가보다 더 큰 능력이 없고 그보다 더 큰 표적이 없습니다. 이제 더 구할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만족합니다. 또 지혜도 지식도 진리도 십자가 안에서 다 얻었고 깨달았습니다. 더 바랄 것 이 없습니다. 이미 다 얻고 만족한 가운데서 믿는 것입니다. 소원성취 하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성취된 가운데 믿습니다. 모두가 넉넉합니다. 모두가 분에 넘칩니다. 그렇게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며 믿습니다.
이미 깨달은 것만 가지고도 충분합니다. 넉넉합니다. 아직 뭔가 부족하여 깨달아야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히브리적 욕구, 헬라적 욕구를 모두 충족한 상태에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하고, 그래서 능력이 거기에서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십자가는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완전하고 합리적입니다. 모두가 십자가 사건 안에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마르틴루터의 갈라디아강해서의 말씀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교회와 성도들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는가? 그것은 성도들과 교회가 시대 조류에 밀려 세상 이념과 타협하므로 복음의 핵심인 “케리그마”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1장4절).”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하여도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반복하여 말씀 하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이 복음이 선포됨으로 깊이 잠들어있던 중세 교회를 일깨웠습니다. 오늘도 올바른 복음과 소명으로 자기 십자가를 바로 지고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이 있을 때 주님께서는 함께하시는 표적으로 그를 영혼 구원의 그 존귀한 자리에 세우십니다. 이 증거와 체험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참고, 곽선희 목사 고린도서 강해)
마16장에는 주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침노하지 못하는 처음 교회를 약속하시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절). 지금도 우리는 그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빌립보3장 18절에는 사도바울께서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으로”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말씀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올바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은 교회의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성도들이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어느 보수적인 신앙으로 많은 주석을 쓰고 오랜 시간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요새는 신학은 많아도 십자가가 없다, 설교는 많지만 그 속에 십자가가 없다, 교회가 윤리 도덕을 이야기하고, 복을 말하지만 오직 십자가가 아니면 영혼 구원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 생활에 십자가에 대한 고백이 없다면 그는 지금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종탑에다 교회 안에다 십자가를 내걸지요. 그러니까 이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다운 생명력이 걸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계시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들을 수 있는 사람, 이들은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들은 찬송에 십자가란 단어만 나와도 눈물을 흘리며 부르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어느 환경에서 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을 감격하게 하고 시대마다 계시를 주시고, 행하여야 할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어떠한 문제도 십자가 안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겸손히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 보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가 시대 조류에 휩쓸리고 유혹을 받아 십자가가 아닌 땅을 들여다보니까 그렇지, 성도가 제대로 십자가를 쳐다보면 그 안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생명력과 두려운 능력을 순간 순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듯 십자가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 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사도바울의 간증“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의 본문 말씀에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마태 · 마가 · 누가 · 요한의 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설명해주는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내용마다 신앙의 결정체가 이루어지고 구체화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케리그마(Kerygma)라고 합니다. 이는 선포한다는 뜻 입니다. ‘케루세인 프로 크레인’ 그런 뜻인데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처음 초대교회에서 선포된 메시지를 줄여서 케리그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말씀을 듣고, 또 말씀에 따라 행하기도 하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이들에 관한 내용을 보면 우리가 깨달을 내용이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전이해(前理解)와 선입견(先入見)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상태로 3년 동안을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바로 되지를 못했습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저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유대나라를 회복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까지도 승천하실 감람산까지도 그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승천하실 주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하고 물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메시야 대망사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에도, 성만찬의 자리까지도 예수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누가 우편에 앉고 누가 좌편에 앉을까 하는 생각으로 서로 견제하며 시기 질투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뜻밖의 상황에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한마디로 “멘붕상태(멘탈붕괴)”로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크게 낙담하고 실망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뵐 때에도 저들은 어리벙벙했습니다. 부활은 사실인데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게 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십자가 사건과 부활, 오순절”은 일직선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순절 없는 부활 사건이라면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남을 뿐입니다. 또 부활사건 없는 오순절 성령사건이라면 신비주의에 불과합니다. 또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비참할 뿐입니다. 이 셋을 함께 일직선상에서 묶어 이해해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약속대로 성령께서 임재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심과 함께 저들의 입에서 마침내 바른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의 생애를 보고 듣고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도 직접 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을 뵈었고 승천하신 후 약속대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받은 것이 교회가 소유한 메시지, “케리그마”입니다. 처음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옵니다. 이 복음이 초대교회의 가장 중심 인물인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4대 설교가 있습니다.①사도행전 2장 14절로 39절, ②3장 12절로 26절, ③4장 8절로 12절,④10장 34절로 43절에 이르는 내용입니다. 거의 내용이 비슷하지마는 각각 장소와 시간이 다릅니다.
베드로는 이 복음을 원수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담대하게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그리스도론”이라고 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바울의 여러 서신 중에서 ①고린도전서 15장 1절로 7절,②로마서 1장 1절로 4절 ③골로새서 1장 14절로 18절, ④빌립보서 2장 6절로 11절, 이 말씀에도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누구이심을 집중적으로 전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모두 종합하면 몇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냐 - 첫째는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분입니다. 예언된 대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성취로 오신 분입니다. “성경대로”라는 것이 첫째 주제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 이 모든 사건은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이, 바로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질 때에 그 증거로서 선포되는 곳마다 함께하시는 이적들과 영혼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 이적이 나타날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40여세 된 이가 온전케 되는 광경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내가 한 것처럼 왜 나를 쳐다보느냐, 이것은 그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낫게 하였느니라. 하고 선포합니다. 또 오순절 초대교회에 있었던 사람들의 엄청난 변화는 모두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구원자 되심을 증거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넷째는, 그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본대로 기록된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다섯째는, 이제 회개하면 성령을 받을 것이요, 성령 받으면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현재적 생명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이 교회가 소유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독교는 곧 십자가의 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도는 그 뜻을 믿고 아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어리석고 미련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 시간을 정하여 교회에 예배드리기 위하여 오는 것 정상적인 신앙인으로 볼 때에는 모두가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의미 없고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초대교회에도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죽느냐, 메시야가 어떻게 십자가에 그토록 처참하게 저주받은 모습으로 죽느냐, 말이 안 된다. 그런 종말이란 있을 수가 없다. 메시야는 영광의 메시야인데, 누군가 죽이려든다 해도 말씀 한마디로 그러한 자라면 진노를 받아야지, 그렇듯 비참하게 당하고 아무런 내용이 없다, 알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욱더 거리끼는 것은 제자 가룟 유다가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사실입니다. 많지도 않은 12제자중 하나 그 제자의 손으로 팔리는 이가 무슨 메시야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거리낌이 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라는 것은 저들에게 저주의 상징이란 말입니다.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저들에게 거리끼는 것입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과거 다윗 같은 영광의 메시야를 생각하고 성경에 예언된 고난의 메시야는 기피하였기에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영광의 메시야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은 권능을 원합니다. 이적과 표적,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왜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 가냐는 것입니다.
또 헬라사람들도 십자가는 거리끼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지혜는 논리요 철학입니다. 필로소피아, 필로는 사랑한다는 말이고 소피아라는 것은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러소피’하면 철학이라는 말입니다. 아주 지혜를 좋아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저들에게도 어리석어보이는 것이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었습니다. 도성인신(道成人身)-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이해가 불가한 것입니다. 창조주가 십자가에 죽느냐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사실을 계시적으로가 아닌 인간의 이성적으로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께서 로고스요, 로고스라면 그도 피조물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창조주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예수님이다. 하는 말은 논리적으로 이야기가 안 된다. 더구나 그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땅에 오셨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이 헬라사람들의 주장이고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어떻습니까?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이해됩니다. 이것은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는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면 모두가 이해되고 이해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이해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고 경험합니다. 속죄를 경험합니다. 죄 사함을 경험합니다. 중생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인 됨을 경험합니다. 또 십자가 앞에 겸손해지는 그런 능력을 체험합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강해지게 됩니다. 불가능하던 원수를 사랑하게도 됩니다.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 하는 용기를 얻습니다.
특별히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누립니다. 율법을 초월합니다. 율법의 억압을 초월하고 극복하고 무한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이와 같은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거듭난 성도들마다 경험하고 체험합니다, 오늘의 본문 24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이것은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입었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의롭거나 능력이 있기에 믿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도적으로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믿는 이들의 믿음에도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표적을 구하는 이들입니다. 오늘도 진리를 모르는 이들은 표적과 능력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병 낫게 해주세요. 돈 잘 벌게 해주세요. 만사형통하게 해주시고 무사태평하게 해주시고, 하면서 표적과 능력에 집착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봉사하는 것도 중심은 그 때문입니다. 복 받으려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혜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본문으로 보면 헬라 적 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 많이 하고 신학공부를 많이 하고, 봉사하고 하면서 지혜를 구하고 지식을 구하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그런 구도적인 믿음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의 유형은 다릅니다. 그는 앞의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는 십자가 안에서 이미 만족했습니다. 능력도 더 바랄 것 없습니다. 십자가보다 더 큰 능력이 없고 그보다 더 큰 표적이 없습니다. 이제 더 구할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만족합니다. 또 지혜도 지식도 진리도 십자가 안에서 다 얻었고 깨달았습니다. 더 바랄 것 이 없습니다. 이미 다 얻고 만족한 가운데서 믿는 것입니다. 소원성취 하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성취된 가운데 믿습니다. 모두가 넉넉합니다. 모두가 분에 넘칩니다. 그렇게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며 믿습니다.
이미 깨달은 것만 가지고도 충분합니다. 넉넉합니다. 아직 뭔가 부족하여 깨달아야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히브리적 욕구, 헬라적 욕구를 모두 충족한 상태에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하고, 그래서 능력이 거기에서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십자가는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완전하고 합리적입니다. 모두가 십자가 사건 안에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마르틴루터의 갈라디아강해서의 말씀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교회와 성도들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는가? 그것은 성도들과 교회가 시대 조류에 밀려 세상 이념과 타협하므로 복음의 핵심인 “케리그마”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1장4절).”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하여도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반복하여 말씀 하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이 복음이 선포됨으로 깊이 잠들어있던 중세 교회를 일깨웠습니다. 오늘도 올바른 복음과 소명으로 자기 십자가를 바로 지고 사명을 감당하는 이들이 있을 때 주님께서는 함께하시는 표적으로 그를 영혼 구원의 그 존귀한 자리에 세우십니다. 이 증거와 체험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참고, 곽선희 목사 고린도서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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