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이방인 비하에 관한여

작성자
lsc
작성일
2015-08-18 11:00
조회
816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가나안여인이 딸의 치료를 요청하였을때 예수님은 이방인을 개에 비유하며 거절하였고 여인이 다시 부스러기라도 요청하였을때 들어주셨읍니다.
이구절을 읽을때 마다 기분이 안좋은데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전체 1

  • 2015-10-16 15:53

    해당 본문으로 설교한 것과 주석한 것이 있어서 등록합니다.

    # 신들린 딸에 대한 두 사랑

    <마태복음 15:21-28>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1. 시작하는 말

    비정한 장면이 인천 공항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찍혔습니다. 네다섯 살 된 아이의 손을 잡고 온 젊은 엄마가 아이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더니 아이를 그냥 놓아두고 슬그머니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런 후에 너무도 가슴이 아팠던 그 엄마는 뒤늦게 후회하고 기관에 맡겨진 아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다행히 아이를 찾긴 찾았는데, 법적으로 어머니 자격을 상실했으므로 딸을 내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슬피 울면서 경찰과 함께 돌아갔습니다.
    요즘에는 이혼을 하면서 자녀를 상대에게 떠넘기려고 기를 쓴다고 합니다. 죄 중에도 부자‧형제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천륜을 어기는 죄는 정말 통탄할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우리나라에 천륜을 어기는 죄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신들려 정상적인 인격 형성도 정상적인 생활도 하지 못하는 딸을 사랑하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한 이방인 어머니와 그 딸을 사랑하되 완전히 회복시켜 새 삶을 살게 하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신들린 딸을 사랑한 이방인 어머니

    어느 날, 예수님은 이방 수로보니게의 도시들인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당시의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에 면한 항구 도시들로 로마의 식민지이었습니다. 두로는 다른 이웃 민족들과 함께 메시아 시대의 복을 나눈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시 87:4). 이방인들도 메시아 시대의 복을 받는다는 예언은 그 지방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리고 병과 귀신들린 상태에서 깨끗해지기 위해 갈릴리로 왔을 때에 성취되기 시작했고, 또,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에 오신 것도 그 예언의 성취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때에 한 가나안 여인이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들렸나이다.” 이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고대에는 두로와 시돈을 포함하는 모든 땅이 가나안인들의 소유였으므로 가나안으로 불렸습니다.
    놀랍게도 이 여인은 유대인도 아니면서 예수님을 약속된 주 다윗의 자손, 즉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신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신이 불쌍한 여인이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이 아니라, 비참하게 귀신들려 사람 구실을 못하는 자신의 딸 때문에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한 것이었습니다. 실로 이 여인에게는 심신이 병약한 딸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이었고, 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었고, 딸의 불행이 자신의 불행이었습니다. 딸이 쓸모가 있거나 장차 기대할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딸은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병약함 때문에 제 앞가림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쓸모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는 딸의 문제와 고통과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애물인 딸을 끔찍이 사랑한 훌륭한 어머니이었습니다. 말이나 마음으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첫째, 이 어머니의 사랑은 딸을 고쳐 주는 것을 자신의 인생 목적으로 삼고,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신들린 딸로 인해 말로 다할 수 없는 심신의 고통을 겪으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백방으로 수고하고 노력한 끝에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점은 그녀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에 믿음이 생겼고, 그 즉시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께 나와 간청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7:25에는,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둘째, 이 어머니의 사랑은 대단히 끈질긴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딸을 고쳐 달라고 애절한 심정으로 호소했을 때, 예수님은 들은 척도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주님이시라면서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딸을 위한 여인의 절규에 대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게다가 사랑의 중개 역할을 해 주어야 할 제자들은 그 불쌍한 여인을 귀찮아했습니다. 예수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의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이렇게 몰인정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끈질기게 매달렸고, 결국 주님 예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셋째, 이 어머니의 사랑은 한결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병약하여 쓸모가 없는 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이 점은 예수께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사실상의 거절을 하셨을 때, 여인이 한 행동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철석같이 믿고 찾아와서 호소한 여인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려 병약한 딸을 고치기 위한 어머니의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거절당했다고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께 절하면서 “주여, 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모욕을 느낄 수도 있는 거절의 말씀을 하셨을 때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딸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겼고, 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부모님, 특히 우리 어머니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넷째, 이 어머니의 사랑은 매우 지혜로운 사랑이었습니다. 자녀에 대한 분별없는 사랑이나 맹목적인 사랑, 본능적인 사랑이나 이기적인 사랑 때문에 자녀를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랑이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 여인에게는 모독으로 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분노하거나 항의하는 대신에 대단히 놀라운 지혜로 응대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특권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부스러기 은혜를 원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여인의 지혜로운 대답은 예수님을 구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일에 이 여인이 예수님을 딸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능력의 주로 믿지 않았다면, 항의나 원망을 퍼부으면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주님 예수를 통해 딸만 깨끗해질 수 있다면, 자신이 개로 취급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3. 모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병약한 딸을 고칠 목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랑과 끈질기고 한결같고 지혜로운 사랑이 있고, 또한 자신을 구주로 믿는 여인을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그녀의 딸도 사랑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여인을 사랑하시되 그녀의 믿음이 확고해지도록 시험하시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여인의 호소를 들으셨을 때에 한 말씀도 대답하시지 않았고, 잠시 후에 거절의 말씀을 하셨고, 그 후에는 모욕을 느낄 수도 있는 거절의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물론, 여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거절의 표현이 강력해지면 강력해질수록, 주님 예수께 대한 그녀의 믿음도 그만큼 더 강력해졌습니다. 나중에는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만 듣고도 그대로 믿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여인의 호소를 들으시고 즉시 해결해 주시는 대신에, 그녀의 모범적인 모성애와 믿음을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끈질기고 한결같고 지혜로운 믿음과 사랑이 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나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받는가를 보여 주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그녀의 믿음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한 여인의 지혜로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셋째, 예수님은 여인의 딸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지만, 메시아적 권능의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시편 33:9을 보면,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고 했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어머니인 여인의 목적의식도 끈기도 한결같음도 지혜도 신들린 딸을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사랑의 주님만이 그녀의 딸을 구하셨고, 또한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주님은 주님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고, 주님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자녀를 주님 예수께 인도하는 것보다 더 큰 자녀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4. 맺음말

    살아가는 동안 많은 문제와 고통을 통해 성장해야 할 자녀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물로 만들 책임이 부모님들에게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희생적 사랑과 끈질기고 한결같고 지혜로운 사랑을 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 예수를 믿되 자기 부정과 끈기와 한결같음과 지혜로써 믿어야 합니다. 자녀 사랑 중 사랑은 영생의 주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2004. 5. 2.>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전체 주석/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3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마태복음 15:25-28의 주석

    결정적인 거절은 아니나, 거절의 의사가 담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가나안 여자의 반응에 대해, 마태는【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였다.
    [절하며]는 8:2의 주석을 보라.
    [주여 나를 도우소서]는 가나안 여자가 자기 자신을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그녀 역시 모든 어머니들처럼 자녀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겼고, 자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였다.
    그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마태는 【26】[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였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유대인들의 복을 개들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거절 의사를 표현한 것이나,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표현인 [개들](퀴나리아, κυνάρια: ‘작은 개’, ‘강아지’)이 한 집에서 자녀가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산다는 점으로 뒷받침된다.
    {오늘날 개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동물이지만, 그 당시의 동양에서는 개란 주인이 없이 거리와 들을 떠돌아다니면서 쓰레기통 속을 뒤지고 찌꺼기 따위를 주워 먹고, 서로간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으르렁거리며 물고 싸우는 동물이었다.
    그러므로 개라는 말은 불결하고, 불경건하고, 뻔뻔스럽고, 탐욕적이고, 오만하고, 불평 잘하고, 다투기 좋아하고, 물고 늘어지기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 개란 지독한 경멸과 혐오(신 23:18, 삼상 17:43, 왕하 8:13, 시 22:16, 20, 사 56:10, 11, 마 7:6), 그리고 버림받은 자(계 22:15)의 대명사이었다. 그러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고, 모하멛 교도들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개라고 불렀다”(A. Barnes).}(빌 3:2의 주석).
    여기의 문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때 쓰는 용어를 예수님이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예수님은 거리의 들개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집의 작은 애완견을 묘사하는 지소사를 사용하셨다. 틀림없이 그분의 목소리는 전혀 달랐다. 같은 말은 목소리에 따라서 결정적인 모독이 될 수도 있고, 애정 표현이 될 수도 있다.······예수님은 그 말에서 모든 독소를 빼셨다.”라고 하였고, 스테벤즈(J. D. Stevens)는 여인에 대한 시험이라고 하였고, 칼빈(J. Calvin)은 여인의 열심을 자극하고 열정을 부채질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막 7:27의 주석).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든 여인에게는 거절이나 모독으로 들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분노나 항의 대신에 아주 놀라운 지혜로 응대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태는 【27】[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라고 하였다.
    [주여](퀴리에, κύριε)는 1:22의 주석을 보라.
    여인의 놀랍도록 지혜로운 대답은 예수님을 주로 신뢰하는 믿음과 귀신들린 딸에 대한 모성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여인은 귀신들린 딸만 깨끗해질 수 있다면, 자신이 개로 취급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 여인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한 지혜로운 말은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속뜻에 일치하였으며, 따라서 모든 불행한 상황을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여인은 예수님의 복음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특권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부스러기 은혜를 원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말에 큰 감동을 받은 예수님은 특이하게도 ‘원격 축귀’라는 놀라운 사랑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이 점에 대해, 마태는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라고 하였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의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은 8:10의 주석을 보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는, 여인이 자신의 소원대로 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딸에게서 그때에 귀신이 나간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막 7:30). 시편 기자는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라고 하였다.
    제 정신을 귀신에게 빼앗겼던 딸은 자기를 고치기 위해 겪은 어머니의 모든 고통과 수고와 수모를 알지 못하고 있다.

    ㅡ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1판 1쇄), pp. 447-449.ㅡ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7.06.15 2799
1147 진삼식 2025.01.13 1
1146 윤새별 2024.07.16 5
1145 김도은 2024.06.08 5
1144 윤새별 2024.03.03 7
1143 유경준 2024.02.23 264
1142 노형근 2024.02.08 3
1141 노형근 2024.02.08 226
1140 노형근 2024.02.07 6
1139 노형근 2024.02.07 6
1138 궁금해요 2024.01.05 3
1137 ㅇㅇ 2023.12.04 5
1136 교회 2023.12.04 11
1135 www 2023.12.04 7
1134 은하수 2023.11.22 3
1133 남궁현 2023.11.12 4
1132 궁금 2023.10.05 4
1131 감리교 2023.10.05 6
1130 성도 2023.09.25 408
관리자 2023.09.25 4
성도 2023.10.05 5
성도 2023.10.08 3
1129 김근영 2023.06.28 6
1128 나눔 2023.05.3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