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선지자도,삯군도, 양의 탈을 쓴 이리도 성경(말씀)을 가르친다.
작성자
김집사
작성일
2007-01-27 00:00
조회
2062
십일조에 대하여...... (한00의 글 펌)
이름:한00 (
2003/8/15(금) 10:35
십일조에 관하여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한00))
십일조의 의미
1. 어원적 의미
(1) 히브리어
(야사르) : 십분의 일을 받치거나 혹은 취하다
(마예사르) : 십분의 일의 몫
(2) 헬라어
(데카토오) : 십분의 일을 받치거나 혹은 취하다
(마포데카토오) : 십분의 일을 받치거나 혹은 취하다.
(데카테) : 십분의 일의 몫
2. 성경적 의미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성서의 여러 부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전 재산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임으로 수입 중에서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다(창28:22).
3. 일반직 의미
성경 이외에서의 십일조의 예들을 많이 찾아 볼 수도 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다른 여러 종족의 종교와 문화에서도 하나의 풍습처럼 전해 내려왔다. 즉 사람이 자기가 노동하여 얻은 것의 한 몫 또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의 한 몫을 드리는 것은 고대의 수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백성들이 자기들의 수확한 것의 십분의 2를(창47:24) 바로에게 받쳤다고 한다. 십일조는 정치적인 성격(조공과 세금)과 종교적인 성격(신에게 봉헌함)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십일조의 유래
1. 성경적인 유래
(1) 십일조의 교훈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시면서, 그 중에 선악과만은 따먹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리셨습니다(창2:17),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에는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것이 있고, 쓸 수 있고 먹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산 교훈인 것입니다.
(2) 십일조는 아브라함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나오기 400년 전에 십일조를 성별하여 들임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창14:17), 소돔 성에 거하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적군에게 종과 재산을 약탈당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이 318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 롯을 비롯한 모든 사람과 제물을 찾아왔을 때, 그 십분의 일을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드리고 축복 기도를 받은 것이 마침내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히7:1-10),
(3) 십일조는 야곱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 아람에 있는 외삼촌댁을 향하여가던 중 하란에서 날이 저물어 돌을 베개 삼고 잤는데, 꿈에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28:13)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야곱은 거기서 세 가지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중하나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들이겠나이다\"(창28:18-22)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얻은 것 중에 십일조를 드리고 축복을 받았으나,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실 줄 믿고 주시면 십일조를 들이겠다고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4) 십일조는 모세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나타나 명령하셨고, 지키지 않으면 책망하셨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고 하셨으며,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을 보장하셨습니다(말3:8-10),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여호와께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대하31:5-6, 신14:23, 레27:32).
(5) 십일조는 예수님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로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십일조를 잘 들이면서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믿음으로 살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6) 십일조는 성신 시대에도 들였습니다.
십일조는 성령의 권면으로, 히브리서 7장에 \"십일조\"란 말이 일곱번 나옵니다. 이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해석하기 위함인데, 멜기세덱은 예수의 모형이니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들였으나 주께 들인바 된다는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율법 이전에도 드려졌고 율법에서 강조했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예수님의 명령이요, 성령의 권면 입니다.
(7) 그래서 십일조는 지금 은혜의 시대에도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가 에덴 동산의 산 교훈이요, 율법 이전에 실천이요, 성부의 명령이요, 성자의 권면이요, 성신의 감동으로 주신 것이라면, 지금 이 은혜의 시대에도 드려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성도의 의무인줄 압니다.
2. 일반적인 유래
(1) 시작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십일조를 드렸다.
①야곱이 벧엘 성소에서 하늘의 사닥다리를 보고 십일조를 들이겠다고 고백함(창28:22).
②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예루살렘과 관련되어 있다(창14:20),
(2) 십일조 규정에 대한 말씀은 신명기서 최초로 발견된다.
①십일조는 농산물의 십분의 일로서 매년 거행되는 제사에서 드려졌고 이 제사는 십일조를 낸 농부의 가족이 모두 참석하는 희생제사 식사에서 절정에 달했다(신14:9-27, 12:6-19), 식사는 물론 가족적인 일이지만 성소에서 거행되었고 이 식사에는 레위인들을 초대해야만 했다.
②매 3년마다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헌금하는 십일조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신14:28-29, 26:12-15). 이 십일조는 레위인, 체류인, 고아, 과부 등 자기 몫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땅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기로 되어 있었다.
③이러한 사실에 비치어 볼 때 제사형식에 따라 십일조는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십일조는 땅과 소출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헌물이다.
둘째, 레위인들을 부양하는 수단이다.
셋째, 빈민구제를 위한 현물이기도 했다.
(3) 민수기와 레위기에 기록된 십일조
①십일조가 오로지 레위인에게 헌납되어야 했으며, 레위인들은 그들이 받은 것의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헌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있다(민18:20-8).
②십일조는 농산물의 십분의 일을 말하며 때로는 가축도 포함시키곤 한다(레27:30).
③십일조는 후대에 와서도 당연시되었다는 사실을 말씀 속에서 알 수 있다(말3:8, 10).
(4) 후기 유대교에서의 십일조
①율법준수 입장에서 두 가지 십일조가 요구되었다. 즉 제사법전에 따라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와 빈민구제를 위한 십일조가 거둬졌다.
②탈무드에서는 땅에서 경작되고 자란 것으로서 음식에 사용되는 모든 것은 십일조의 대상이 된다고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5) 오늘날의 십일조
①대개 월급의 십분의 일을 헌금으로 드리고 있으며 흑 고정된 수입이 없는 이는 그때그때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리고 있다.
②그러나 물질적인 계산의 십일조 즉 월급봉투의 십일조만이 아닌 삶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③결론적으로 바른 십일조의 이해는
첫째, 십일조는 반드시 하나님께(성전에) 드려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십일조는 인간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는 확신의 표현이며,
셋째, 십일조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사사로이 쓸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 김집사의 반박 글 ===================
한00님 보세요
*****아래글은 한00님께서 기0교회에서 옮겨오신 글 이라고 하셨습니다.****
(4) 십일조는 모세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나타나 명령하셨고, 지키지 않으면 책망하셨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고 하셨으며,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을 보장하셨습니다(말3:8-10),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여호와께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대하31:5-6, 신14:23, 레27:32).
* 한00님은 목사님이십니까? 목사님은 남의 글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설교내지는 전달을 하시나요? 적어도 목사님이시라면 성경 구절을 찾아보고 맞는 말씀인가를 확인 하셔야 됩니다. 위에 옮긴
(4) 십일조는 모세 시대에도 드렸다
는 성경을 모르는(읽지않은) 이 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보이겠지만 엄청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중간쯤에 \"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을 보장 하셨습니다\" (말 3:8-10)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믿고 순종 할때 여호와께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다\"(대하 31:5-6, 신14:23, 레27:32) 하셨는데,
말라기는 BC430년경에( 씌여졌고)축복을 보장 했고, 윗글에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할때.....(대하31:5-6)은 BC450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14:23)은 BC1406년경입니다,또한 레27:32 은 BC1446 년경입니다.
그렇다면 말라기가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할때는\" 대하31:5-6\" 의 사람들은 20여년전에, \"신명기14:23\"절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970여년전에, 그리고 \"레위기27:32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적어도 \"천여년\"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천년전 사람들이 말라기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구요?
하나님의 말씀은 맞지만 윗글은 엉터리입니다.이 글은 사기입니다.즉 딛1:11절에 나오는 “더러운 이(利)”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감독은 더러운(거짓증거로 얻어지는)이(利)(딛1:7)를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0 0 님께서 목사님 이시라면 어떤 글이던지 성서 말씀이 맞는지,성경에 나오는 말씀인지 정도는 확인하시고 성도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검증도 없이 남의글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소경이 소경을 인도” 하는격이요 또한 목사로서 의 자질이 없는 것입니다. 성의도 없고 책임도 없는 내용을 이 처럼 공개 하는 것은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 행위요 피로 값주고 사신 성도들을 멸망과 율법(갈2:21/3:10-11=멸망)으로 인도 하는 행위입니다.
십일조는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한 0 0 )
★ 김집사님께 (필명은 가명으로 고쳤습니다)
[십일조에 대하여]라는 글은 옮겨온 글이기에 문장하나 문구하나를 꼬집으신다면 책임있게 시원한 답을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십일조는 드리는 사람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만약 님께서 드리는 것이 옳지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무어라고 말씀드린다고 해도 드리지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볼 때 바른 믿음을 확립하고 지키기 위한 투쟁(?)-옳은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의 과정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수많은 논쟁과 이단규정들, 여러차레의 종교회의와 신조들, 신학자들의 연구와 저작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의 성립과정들.... 모두 바른 믿음과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실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단종파들이 명멸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안식일교회와 같은 외래종파, 통일교, 안상홍증인회, 구원파 등등의 자생종파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단종파들이 횡행하는 세계에서 종교의 자유가 거의 완벽할 만큼, 또한 수많은 종교와 종파가 평화롭게 자유경쟁하는 나라입니다. 거기에다 진보신학과 보수신학이 거의 망라해서 논의가 오갑니다. 그 가운데는 십일조를 드리지않아야 한다는 이단도 있고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일부 신학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님께서 어떤 의도에서 십일조에 대한 문제를 꺼내고 저의 펀글을 옮겨오고 비판적 이의를 제기하는지 잘모르겠습니다.
정말 감리교인으로서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일조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감리교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의도적으로 감리교인의 신앙자세를 흩뜨리려는 다른 목적을 가진 것인지를 말입니다.
제가 올린 글의 내용을 부정적으로 배척하는 생각을 갖지않고 읽고 성경을 찾아 메모하신다면 결코 님과같은 질문을 나오지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율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십일조는 성경에 있는 이름입니다.
결코 함부로 변경하거나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김집사 : 십일조는 성경에 있는 이름입니다 결코변경 하거나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하셨는데 그렇다면 “레위기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 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 하니라” 이 말씀도 성경에 있는 이름입니다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성경속에는 하나님께서 해라.하지말라.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중에서꼭 십일조는 성도들의 의무(?)로 정해놨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한 0 0 님처럼 무조건(?)지키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십일조를 안내면 마치 큰죄를 지은 것처럼....갈5: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 하시는 바가되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죄에서 (율법)벗어나십시오 (요8:30-31)진리가 너희를 죄(율법)에서자유케 하리라.
갈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복음(율법)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율법인 십일조가 만인이 구원 받는일에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참뜻에 어긋나는 행위 입니다
한 0 0 님 보십시요.
한0 0 님 근거 없이 우기지만 말고 성경을 근거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촉구 합 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여 그동안 신구약 성경을 2회 통독 했습니다.(십일조에 대한 말씀에 집중 하면서)
한0 0 님 성서적으로 근거 없이 우기지만 말고 첫 번째 물음=“십일조는 모세의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에 대한 답변을 바랍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레위기”“신명기”시대의 사람들이 십일조를 했음으로 축복을 받았다. 에 대한 답변 말입니다. 결코 잘못된 글 이었음으 인정하지 않으시는군요.
내글이 아니라 남의 글을 베꼈으니 한 0 0 님은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한0 0 님은 목사의 자격도 안되는 분입니다. 한 0 0 님은 성경도 읽지않고 성도들에게 근거 없는 맹종을 강요하는 목사라는 말입니까?
신약성경 갈1: 을 보면 바울은 복음(십자가의 구원)외에 다른복음(성서원 발행 “큰성경=갈1:6절을 보면 다른복음=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율법조문을 강조하여 행함을 중히 여긴 유대주의를 말한다)지금 이야기 하는 십일조 문제는 구원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복음외에 율법조문(앞서 언급 했듯이 구원문제에 관한)을 병행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씀하신 /두 번째 = 3. 일반적의미
성경 이외에서의 십일조의 예들를 많이 찾아 볼 수도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다른 여러 종족의 종교와 문화에서도 하나의 풍습처럼 전해 내 려왔다. 즉 사람이 자기가 노동하여 얻은 것의 한 몫 또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의 한몫을 드리는 것은 고대의 수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백성들이 자기들의 수확한 것의 십분의2를(창47:24)바로에게 받쳤다고 한다. 십일조는 정치적인 성격(조공과 세금)과 종교적인 성격(신에게 봉헌함)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라고 하셨는데 말씀 하신 성경을 찾아서 확인 하겠습니다.
창47:24 “추수의 오분일을 (1/5=십분의 이)바로에게 상납하고 사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 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집 사람과 어린아이의 양식도 삼으라.”
한 0 0 님 께서 말씀하신대로 오분의 일은 십분의 이가 맞습니다.
그러나 이 근거는 완전한 사기 입니다.내용(십일조)과 맞지 않습니다.
창47장 이전을 읽어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 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고 하나님께서 꿈으로 이상을 보여 주셨고...7년가믐을 대비해서 양식을 비축합니다.그후 흉년을 맞고 양식을 백성들에게 팔고 백성들이 돈이 떨어지니까 논밭문서를 들고 요셉에게 와서 양식과 땅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가믐이 끝났을 때 요셉(의 주인은 바로왕)이 양식과 바꾼 땅의 농사를 원래의 주인 이었던 농민(백성)들에게 소작을 시킵니다 소작을 시키면서 농지세로 수확의 1/5(십분의 이)을 바치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은 구약에서 말씀 하시는 신께 바치는 십일조가 아니고 소작농이 그 땅의 주인에게 바치는 땅의 사용료 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도 성도들에게 가르쳤다면 당신은 하나님앞에 크나큰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님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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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0 0
답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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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0 0 님께 한말씀 더 (십일조에 관한 마지막 글)
구약성서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외에는 모두가 이방인 입니다
물론 말라기선지자가 십일조를 해라 할때도 역시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말라기선지자는 이방인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 인)들에게 말씀(율법)대로 실행 하라고 외침 아닙니까? (말4:4-6)
이스라엘 사람들외에 이방인을 구원 하시는 내용은 그후로 약430여년경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후 AD 63년경 그러니까 정확(?)히 행10:1- 에서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시면서 시작이 됩니다.
행15:1-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이방인)가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15:5-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 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일을 의논하러 모여(예루살렘회의)....:10 -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애(율법)를 제자(이방인)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예수의 은혜(율법이 아님)로구원 받는줄을 믿노라...(중략)
결론= 행15:28- 성령과 우리(사도)는 요긴한것 것들외에 아무짐(율법)도 너희(이방인)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구원)되리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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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한00 (
2003/8/15(금) 10:35
십일조에 관하여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한00))
십일조의 의미
1. 어원적 의미
(1) 히브리어
(야사르) : 십분의 일을 받치거나 혹은 취하다
(마예사르) : 십분의 일의 몫
(2) 헬라어
(데카토오) : 십분의 일을 받치거나 혹은 취하다
(마포데카토오) : 십분의 일을 받치거나 혹은 취하다.
(데카테) : 십분의 일의 몫
2. 성경적 의미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성서의 여러 부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전 재산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임으로 수입 중에서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다(창28:22).
3. 일반직 의미
성경 이외에서의 십일조의 예들을 많이 찾아 볼 수도 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다른 여러 종족의 종교와 문화에서도 하나의 풍습처럼 전해 내려왔다. 즉 사람이 자기가 노동하여 얻은 것의 한 몫 또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의 한 몫을 드리는 것은 고대의 수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백성들이 자기들의 수확한 것의 십분의 2를(창47:24) 바로에게 받쳤다고 한다. 십일조는 정치적인 성격(조공과 세금)과 종교적인 성격(신에게 봉헌함)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십일조의 유래
1. 성경적인 유래
(1) 십일조의 교훈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시면서, 그 중에 선악과만은 따먹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리셨습니다(창2:17),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에는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것이 있고, 쓸 수 있고 먹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산 교훈인 것입니다.
(2) 십일조는 아브라함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나오기 400년 전에 십일조를 성별하여 들임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창14:17), 소돔 성에 거하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적군에게 종과 재산을 약탈당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이 318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 롯을 비롯한 모든 사람과 제물을 찾아왔을 때, 그 십분의 일을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드리고 축복 기도를 받은 것이 마침내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히7:1-10),
(3) 십일조는 야곱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 아람에 있는 외삼촌댁을 향하여가던 중 하란에서 날이 저물어 돌을 베개 삼고 잤는데, 꿈에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28:13)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야곱은 거기서 세 가지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중하나가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들이겠나이다\"(창28:18-22)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얻은 것 중에 십일조를 드리고 축복을 받았으나,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실 줄 믿고 주시면 십일조를 들이겠다고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4) 십일조는 모세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나타나 명령하셨고, 지키지 않으면 책망하셨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고 하셨으며,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을 보장하셨습니다(말3:8-10),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여호와께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대하31:5-6, 신14:23, 레27:32).
(5) 십일조는 예수님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로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십일조를 잘 들이면서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믿음으로 살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6) 십일조는 성신 시대에도 들였습니다.
십일조는 성령의 권면으로, 히브리서 7장에 \"십일조\"란 말이 일곱번 나옵니다. 이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해석하기 위함인데, 멜기세덱은 예수의 모형이니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들였으나 주께 들인바 된다는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율법 이전에도 드려졌고 율법에서 강조했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예수님의 명령이요, 성령의 권면 입니다.
(7) 그래서 십일조는 지금 은혜의 시대에도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가 에덴 동산의 산 교훈이요, 율법 이전에 실천이요, 성부의 명령이요, 성자의 권면이요, 성신의 감동으로 주신 것이라면, 지금 이 은혜의 시대에도 드려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성도의 의무인줄 압니다.
2. 일반적인 유래
(1) 시작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십일조를 드렸다.
①야곱이 벧엘 성소에서 하늘의 사닥다리를 보고 십일조를 들이겠다고 고백함(창28:22).
②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예루살렘과 관련되어 있다(창14:20),
(2) 십일조 규정에 대한 말씀은 신명기서 최초로 발견된다.
①십일조는 농산물의 십분의 일로서 매년 거행되는 제사에서 드려졌고 이 제사는 십일조를 낸 농부의 가족이 모두 참석하는 희생제사 식사에서 절정에 달했다(신14:9-27, 12:6-19), 식사는 물론 가족적인 일이지만 성소에서 거행되었고 이 식사에는 레위인들을 초대해야만 했다.
②매 3년마다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헌금하는 십일조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신14:28-29, 26:12-15). 이 십일조는 레위인, 체류인, 고아, 과부 등 자기 몫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땅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기로 되어 있었다.
③이러한 사실에 비치어 볼 때 제사형식에 따라 십일조는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십일조는 땅과 소출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헌물이다.
둘째, 레위인들을 부양하는 수단이다.
셋째, 빈민구제를 위한 현물이기도 했다.
(3) 민수기와 레위기에 기록된 십일조
①십일조가 오로지 레위인에게 헌납되어야 했으며, 레위인들은 그들이 받은 것의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헌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있다(민18:20-8).
②십일조는 농산물의 십분의 일을 말하며 때로는 가축도 포함시키곤 한다(레27:30).
③십일조는 후대에 와서도 당연시되었다는 사실을 말씀 속에서 알 수 있다(말3:8, 10).
(4) 후기 유대교에서의 십일조
①율법준수 입장에서 두 가지 십일조가 요구되었다. 즉 제사법전에 따라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와 빈민구제를 위한 십일조가 거둬졌다.
②탈무드에서는 땅에서 경작되고 자란 것으로서 음식에 사용되는 모든 것은 십일조의 대상이 된다고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5) 오늘날의 십일조
①대개 월급의 십분의 일을 헌금으로 드리고 있으며 흑 고정된 수입이 없는 이는 그때그때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리고 있다.
②그러나 물질적인 계산의 십일조 즉 월급봉투의 십일조만이 아닌 삶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③결론적으로 바른 십일조의 이해는
첫째, 십일조는 반드시 하나님께(성전에) 드려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십일조는 인간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는 확신의 표현이며,
셋째, 십일조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사사로이 쓸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 김집사의 반박 글 ===================
한00님 보세요
*****아래글은 한00님께서 기0교회에서 옮겨오신 글 이라고 하셨습니다.****
(4) 십일조는 모세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직접 나타나 명령하셨고, 지키지 않으면 책망하셨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고 하셨으며,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을 보장하셨습니다(말3:8-10),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여호와께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대하31:5-6, 신14:23, 레27:32).
* 한00님은 목사님이십니까? 목사님은 남의 글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설교내지는 전달을 하시나요? 적어도 목사님이시라면 성경 구절을 찾아보고 맞는 말씀인가를 확인 하셔야 됩니다. 위에 옮긴
(4) 십일조는 모세 시대에도 드렸다
는 성경을 모르는(읽지않은) 이 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보이겠지만 엄청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립니다
중간쯤에 \"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엄청난 축복을 보장 하셨습니다\" (말 3:8-10)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믿고 순종 할때 여호와께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다\"(대하 31:5-6, 신14:23, 레27:32) 하셨는데,
말라기는 BC430년경에( 씌여졌고)축복을 보장 했고, 윗글에 \"그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할때.....(대하31:5-6)은 BC450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14:23)은 BC1406년경입니다,또한 레27:32 은 BC1446 년경입니다.
그렇다면 말라기가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할때는\" 대하31:5-6\" 의 사람들은 20여년전에, \"신명기14:23\"절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970여년전에, 그리고 \"레위기27:32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적어도 \"천여년\"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천년전 사람들이 말라기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여호와께로부터 축복을 받았다구요?
하나님의 말씀은 맞지만 윗글은 엉터리입니다.이 글은 사기입니다.즉 딛1:11절에 나오는 “더러운 이(利)”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감독은 더러운(거짓증거로 얻어지는)이(利)(딛1:7)를 탐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0 0 님께서 목사님 이시라면 어떤 글이던지 성서 말씀이 맞는지,성경에 나오는 말씀인지 정도는 확인하시고 성도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검증도 없이 남의글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소경이 소경을 인도” 하는격이요 또한 목사로서 의 자질이 없는 것입니다. 성의도 없고 책임도 없는 내용을 이 처럼 공개 하는 것은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 행위요 피로 값주고 사신 성도들을 멸망과 율법(갈2:21/3:10-11=멸망)으로 인도 하는 행위입니다.
십일조는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한 0 0 )
★ 김집사님께 (필명은 가명으로 고쳤습니다)
[십일조에 대하여]라는 글은 옮겨온 글이기에 문장하나 문구하나를 꼬집으신다면 책임있게 시원한 답을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십일조는 드리는 사람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만약 님께서 드리는 것이 옳지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무어라고 말씀드린다고 해도 드리지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볼 때 바른 믿음을 확립하고 지키기 위한 투쟁(?)-옳은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의 과정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수많은 논쟁과 이단규정들, 여러차레의 종교회의와 신조들, 신학자들의 연구와 저작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의 성립과정들.... 모두 바른 믿음과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실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단종파들이 명멸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안식일교회와 같은 외래종파, 통일교, 안상홍증인회, 구원파 등등의 자생종파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단종파들이 횡행하는 세계에서 종교의 자유가 거의 완벽할 만큼, 또한 수많은 종교와 종파가 평화롭게 자유경쟁하는 나라입니다. 거기에다 진보신학과 보수신학이 거의 망라해서 논의가 오갑니다. 그 가운데는 십일조를 드리지않아야 한다는 이단도 있고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일부 신학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님께서 어떤 의도에서 십일조에 대한 문제를 꺼내고 저의 펀글을 옮겨오고 비판적 이의를 제기하는지 잘모르겠습니다.
정말 감리교인으로서 성경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일조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감리교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의도적으로 감리교인의 신앙자세를 흩뜨리려는 다른 목적을 가진 것인지를 말입니다.
제가 올린 글의 내용을 부정적으로 배척하는 생각을 갖지않고 읽고 성경을 찾아 메모하신다면 결코 님과같은 질문을 나오지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율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십일조는 성경에 있는 이름입니다.
결코 함부로 변경하거나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김집사 : 십일조는 성경에 있는 이름입니다 결코변경 하거나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하셨는데 그렇다면 “레위기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 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 하니라” 이 말씀도 성경에 있는 이름입니다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성경속에는 하나님께서 해라.하지말라.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중에서꼭 십일조는 성도들의 의무(?)로 정해놨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한 0 0 님처럼 무조건(?)지키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십일조를 안내면 마치 큰죄를 지은 것처럼....갈5: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 하시는 바가되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죄에서 (율법)벗어나십시오 (요8:30-31)진리가 너희를 죄(율법)에서자유케 하리라.
갈1: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복음(율법)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율법인 십일조가 만인이 구원 받는일에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참뜻에 어긋나는 행위 입니다
한 0 0 님 보십시요.
한0 0 님 근거 없이 우기지만 말고 성경을 근거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촉구 합 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여 그동안 신구약 성경을 2회 통독 했습니다.(십일조에 대한 말씀에 집중 하면서)
한0 0 님 성서적으로 근거 없이 우기지만 말고 첫 번째 물음=“십일조는 모세의 시대에도 드렸습니다” 에 대한 답변을 바랍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레위기”“신명기”시대의 사람들이 십일조를 했음으로 축복을 받았다. 에 대한 답변 말입니다. 결코 잘못된 글 이었음으 인정하지 않으시는군요.
내글이 아니라 남의 글을 베꼈으니 한 0 0 님은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한0 0 님은 목사의 자격도 안되는 분입니다. 한 0 0 님은 성경도 읽지않고 성도들에게 근거 없는 맹종을 강요하는 목사라는 말입니까?
신약성경 갈1: 을 보면 바울은 복음(십자가의 구원)외에 다른복음(성서원 발행 “큰성경=갈1:6절을 보면 다른복음=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율법조문을 강조하여 행함을 중히 여긴 유대주의를 말한다)지금 이야기 하는 십일조 문제는 구원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복음외에 율법조문(앞서 언급 했듯이 구원문제에 관한)을 병행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씀하신 /두 번째 = 3. 일반적의미
성경 이외에서의 십일조의 예들를 많이 찾아 볼 수도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다른 여러 종족의 종교와 문화에서도 하나의 풍습처럼 전해 내 려왔다. 즉 사람이 자기가 노동하여 얻은 것의 한 몫 또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의 한몫을 드리는 것은 고대의 수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백성들이 자기들의 수확한 것의 십분의2를(창47:24)바로에게 받쳤다고 한다. 십일조는 정치적인 성격(조공과 세금)과 종교적인 성격(신에게 봉헌함)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라고 하셨는데 말씀 하신 성경을 찾아서 확인 하겠습니다.
창47:24 “추수의 오분일을 (1/5=십분의 이)바로에게 상납하고 사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 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집 사람과 어린아이의 양식도 삼으라.”
한 0 0 님 께서 말씀하신대로 오분의 일은 십분의 이가 맞습니다.
그러나 이 근거는 완전한 사기 입니다.내용(십일조)과 맞지 않습니다.
창47장 이전을 읽어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 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고 하나님께서 꿈으로 이상을 보여 주셨고...7년가믐을 대비해서 양식을 비축합니다.그후 흉년을 맞고 양식을 백성들에게 팔고 백성들이 돈이 떨어지니까 논밭문서를 들고 요셉에게 와서 양식과 땅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가믐이 끝났을 때 요셉(의 주인은 바로왕)이 양식과 바꾼 땅의 농사를 원래의 주인 이었던 농민(백성)들에게 소작을 시킵니다 소작을 시키면서 농지세로 수확의 1/5(십분의 이)을 바치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은 구약에서 말씀 하시는 신께 바치는 십일조가 아니고 소작농이 그 땅의 주인에게 바치는 땅의 사용료 입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도 성도들에게 가르쳤다면 당신은 하나님앞에 크나큰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님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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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0 0
답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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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0 0 님께 한말씀 더 (십일조에 관한 마지막 글)
구약성서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외에는 모두가 이방인 입니다
물론 말라기선지자가 십일조를 해라 할때도 역시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말라기선지자는 이방인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한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 인)들에게 말씀(율법)대로 실행 하라고 외침 아닙니까? (말4:4-6)
이스라엘 사람들외에 이방인을 구원 하시는 내용은 그후로 약430여년경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후 AD 63년경 그러니까 정확(?)히 행10:1- 에서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시면서 시작이 됩니다.
행15:1-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이방인)가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15:5-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 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일을 의논하러 모여(예루살렘회의)....:10 -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애(율법)를 제자(이방인)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예수의 은혜(율법이 아님)로구원 받는줄을 믿노라...(중략)
결론= 행15:28- 성령과 우리(사도)는 요긴한것 것들외에 아무짐(율법)도 너희(이방인)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구원)되리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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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사님, 이제 생각나네요. 왜 십일조를 그렇게 집요하게 꺼내는지 말입니다.
이제 그만 하시지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건 내 눈을 가리는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목사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십일조에 대한 글은 옮겨온 것입니다. 물론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구요. 그리고 답글들은 저의 생각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구요? 누가요? 님께서는 윗글의 십일조는 모세 시대에도 드렸다. 말라기(3:8)의 외침을 듣고 \"레위기 (27장)\" 사람들이, 신명기(23장) 사람들이,역대하 (31장) 사람들이 물질적 축복을 받고 잘 먹고 풍요롭게 살았다는 말씀입니까? 아직도 그렇게 듣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올렸습니다. 생각 나신다니 말씀입니다. 그 후로 십일조 문제를 이해 하기 위해서 신구약 10독 이상 읽었고, 많은 자료들을 찾았지만, 어디서도 윗글의 내용이 합당하다는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이 내용은 언제든지,어느곳에서든지 기본 자료가 될것입니다. 님께서 윗글에 대한 주장을 하시는 한, 말입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하기 때문 입니다.이런 엉터리 주장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하는 행위 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황당한 분입니까? 이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날로 쇠퇴하고 있는 것입니다. 까만것을 하얗다고 우긴다고 하얘집니까? 님께서 근거로 제시한 성구가 엉터리 라는 것이 근거 자료를 통해서 \"명명 백백\"하게 드러 났는데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 라구요? 어찌하다 한국의 교회가 성도들이 이렇게 우매하게 되었는지?..... 하기사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리라.\" \"사람의 계명을 교훈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김집사님! 참으로 딱한 사람이군요!
말라기에서 언급한 축복이 아브라함의 시대로 부터 말라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는 자들에게는 동일하게 적용(축복)되어진다고는 왜 생각하지 못하는지요?
\"아직도 그렇게 듣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올렸습니다\"라는 님의 말씀은 십일조를 드리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님만 고고하고 온전한 사람입니까?
아무리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기 힘든 분이신군요!
또한 십일조를 비롯한 신앙과 신앙의 행위들의 문제가 님께서 자랑처럼 말씀하신, 신구약을 10번 이상 읽고, 많은 자료를 찾아 보았다고 해결되어지는 문제입니까?
님이 자랑처럼 이야기하시는 신구약 10번 이상의 통독을 부족한 저도 100여번은 통독한듯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을 읽은 횟수와 성경의 암기등의 \\'미련한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시지는 않는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성경 스스로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성경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일듯합니다.
저라는 사람은 배움도 적고 연륜도 적어서 조목조목 논박하지는 못하지만, 님의 사고는 지극히 독선적이고 모순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미 옳고 그름을 정해놓고 신앙상담실에 글을 올리신 저의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자신이 알고있는 지식(그 지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을 과시하고 싶으신가요?
참으로 불쌍한 분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밖에는 자신을 드러낼 것이 없나요?
님이 말하는 진실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이 엉터리 주장이라는 말입니까?
혹 님의 주장이 엉터리고 다른 사람의 삶과 주장이 진실이라는 생각은 안해보셨나요?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있거나, 드리고 싶지 않다면 님은 그렇게 하시지요?
저는 여전히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사람은 다른데 있지 않은듯합니다.
아는 것이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인성의 수양은 더 필요한 분인듯합니다.
님 같은 교인들이 결국 목회자들은 바보(진실되지 못한)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모 목사님의 글을 님게 소개 합니다.
\" 목사님.성도들이 무식하면 다루기가 쉽지요?
율법에서 복음으로 / 장봉운 목사님의 글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속박과 자유함의 차이입니다.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 ‘미숙함’과 ‘성숙함’의 차이지요.
율법은 우리를 어린 아이 상태로 다루며 세월이 흘러가도 여전히 어린 아이로 머물게 만듭니다.
이런 속에서 자란 사람을 ‘성인아이’(kid-adults)라고 부르지요.
율법은 미숙하고 어린 상태로 머물러서 끝까지 보호와 지시 속에 머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지 못하며,
모든 것을 억지로 하도록 규제하며 명령하는 것입니다.
왜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하도록 지시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하면 방향을 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관례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맹목적 추종’이라고 부릅니다(갈 4:3).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그 배경이 되는 지식을 얻어야만 행동할 수 있는 방향이 생기고
책임을 지고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개인의 판단을 원천적으로 허용하지 않으며,
위에서 시키는 것을 그대로 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곧이곧대로 따라서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시킨 사람의 의도를 살필 필요 없이 그냥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문자적인 순종 이외에는 없는 것이지요.
이면의 뜻을 살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율법의 의도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상벌적인 것입니다.
하면 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함으로써 보상심리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상이 따라야 합니다.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보상이 없이는 아무런 행동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종교 행위 역시 보상을 전제로 하게 되는 것이지요.
불교의 영성은 철저한 인과응보적인 사고를 따릅니다.
행위를 함으로써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지배하기 때문에
모든 행위는 반드시 그에 따른 상벌이 있고 그것을 얻으려고 열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기복적이고 수동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능동적으로 하려고하지 않으며,
시키는 것을 철저히 행함으로써 복을 받을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동물을 길들일 때처럼
잘 하면 먹이를 주고 못하면 체벌을 해서 서서히 의도된 행동이 몸에 베이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동물은 먹이를 주어야만 의도하는 행동을 하게 되듯이
율법에 길들여지면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상벌을 의식하게 됩니다.
유익한 요소가 없으면 절대로 행동하려고 하지 않지요.
복음은 이런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주께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렸고
그 희생으로 인해서 율법의 속박에서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이 복음 즉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 대가가 자유함입니다.
모든 얽어매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놓아주는 행위였으며,
이로 인해서 우리는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성장이란 시키는 사람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뜻에 따라서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하는 자율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갈 5:18).
그러려면 율법적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하고 율법적인 태도를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는 율법적인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장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고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기까지
어쩔 수 없이 상벌에 따른 행동 규제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상태일 때
우리를 성장으로 이끄는 필요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맹목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부작용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선생님의 매가 무서워서 공부를 합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지나고 나면 스스로 공부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보다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어릴 때 한시적으로 우리를 속박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벗어나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숙으로 나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율법을 벗어버리고
과감하게 영의 일로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자유롭게 한 반면에
엄중한 책임 앞에 서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방종이며 죄를 짓는 수단이 됩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복음을 죄를 범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미숙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롬 6:1).
자유로운 복음을 죄의 수단으로 오용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을 사용하여 경고를 주십니다.
그것이 ‘영적 부담’이며, 쉬운 말로 표현하면 ‘양심의 가책’입니다.
자유롭게 하려는 복음을 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
즉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그 영에게 가중한 부담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양심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행위를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율법의 속박 속에 가둘 수밖에 없게 됩니다.
율법의 가장 큰 효과는 상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는 속박과 억압과 통제와 간섭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다시금 율법으로 되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율법은 달콤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탈락한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은 그런 것이 없으며,
가혹한 체벌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율법의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규율을 따를 의무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순종과 책임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새로운 부담을 지게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복음의 명령’(Jesus commitment)입니다.
그런데 이 부담은 율법의 부담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율법의 부담은 상벌이지만, 복음의 부담 즉 영의 부담은 사랑입니다.
성숙함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며,
희생하는 자리에 기꺼이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이란 서로의 짐을 져주는 힘을 의미합니다.
타인의 짐을 짐으로써 내 짐이 타인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서로 남의 짐을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행위 즉 복음을 완성하는 일입니다(갈 6:2).
우리는 사랑하게 되면 더 많은 것을 상대방에게 주고 싶어하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하게 됩니다.
사랑의 힘이란 자신의 것을 내어놓게 만들지요.
그것이 시간이든지, 돈이든지, 상관이 없이 내어놓게 만듭니다.
사랑이란 하나님의 심장의 소리를 들을 때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 심장을 그립니다.
심장을 우리는 사랑의 근원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 엄마 품에 안겨서 젖을 먹을 때 심장의 박동소리를 듣습니다.
아기는 엄마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때 가장 평안함을 느끼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때 영의 안식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의 소리를 들었던 제자 요한은 그 분을 사랑으로 인식했습니다.
그것은 따스한 햇살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이 알지 못했던 독특한 방식으로 주님을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빛이시다”
라는 요한의 표현은 그가 심장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없이는 우리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어릴 적에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사랑의 소리여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사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성장하게 하기 위한 필요악인 율법은
적당한 때에 이유식을 하듯이 벗어나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지도자들은 어른 아이를 만드는 일에 몰두합니다.
어린 아이로 계속 머무는 것이 통솔하기에 쉽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무식할수록 다루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기르면서 가장 힘든 시기가 바로 사춘기입니다.
이 시기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 양육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이 힘든 사춘기는
부모에게는 달갑지 않은 계절이지만 자녀에는 절대로 필요한 과정이듯이
영적 성장에서도 역시 이 사춘기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지도자들에게는 엄청만 고통의 시간이지만
성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품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통제와 가르침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롭게 하도록 성장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전환되게 만드는 역할이 지도자의 몫입니다.
가급적이면 빠르게 이 과정을 통과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채우게 하는 것입니다(엡 4:13).
============== 끝 -===================
감리교 허종 목사님의 글입니다.
허종 paulhuh@naver.com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있는 평신도들이 없겠습니까?
목회자가 문제이다.
한국교회는 목회자들이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있는 평신도들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문제가 있는 교인들을 돌보라고 목회자를 세운 것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교회문제는 목회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한국 사람을 냄비에 비교해서 말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냄비처럼 빨리 달아올랐다가 빨리 식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들이 떠들어대도 시간만 지나면 된다는 생각들을 합니다.
시간만 지나면 아무리 심각했던 역사적 사건들도
금방 잠잠해 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교회의 심각한 문제들인데도 시간이 지나니 적당히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목사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교단 문제나 문제가 있는 교회를 문제 삼으면 목사들이 ‘자기 목회나 잘하라.’고 하면서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핀잔을 줍니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후배 목사들 중에서 ‘그만 돌아다니고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목회를 하라.’고 권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그래도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목사들이 그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개봉교회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온천J교회 문제도 생각해 보면 결국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린도 후서 5장 18절)
그러므로 심각할 정도로 교인 사이에 분쟁이 생겼다면 목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당연히 목사가 목회를 잘 할 수 있는 후임자에게 교회를 맡기고 떠나면 됩니다.
그런데 책임을 지고 목사가 떠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잘잘못을 떠나 문제가 있는 교회 담임목회자가 교회를 떠나면 교회 문제는 해결됩니다.
또한 무능력한 교단 책임자들이 문제입니다.
교회에 분쟁이 생기면 교단 책임자들은 교회분쟁을 해결하고 조정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단 책임자들이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능력한 탓입니다. 무능력한 감리사나 감독은 물러나고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교단 책임자를 세워야 합니다.
작금의 교단 사태들(K교회 K목사 횡령사건, D교회 S목사 간통사건등)을 보면서 교단 책임자들이 무능력하고 불법을 행한 목회자들을 감싸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무능력하고, 목회자를 감싸려고 하니 법대로 하면 되는 일인데
법대로 교회와 목회자를 치리를 하지 못하고 교회와 교인들만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분쟁 중에 있는 교회 담임목사에게 권면을 합니다.
분쟁의 책임을 지고 교회를 떠나십시오.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께서 돌보십니다.
담임목사가 교회를 떠나지 않으니 교회와 교인들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회자들의 밥그릇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인들은 맹목적으로 담임목회자를 감싸면 안 됩니다.
목회자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일은 잘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목회자를 감싸주는 것은 목회자를 망치게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줄 아는 목회자,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물러날 줄 아는 목회자가 훌륭한 목회자입니다.
죄와 허물을 덮어주되 책임을 지고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잘하는 일입니다.
교회문제는 목회자가 문제이지만 맹목적으로 목회자를 감싸는 맹신자들 때문에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입력 : 2007년 02월 09일 01:05:00 / 수정 : 2007년 02월 09일 13: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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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깨어서 의식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와 당신같은 성도가 문제겠지요?
남의 눈의 티끌이 아니라, 당신 안의 들보를 먼저 바라보시길...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당신의 주장을 합리화 시키려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글 뒤에 숨어서 무엇을 주장할 수 있나요?
다른 사람의 글은 제대로 이해하고 인용하는지 의심스럽군요!
님같은 감리인님,그래서 윗글이 맞다는 겁니까? 눈뜬 장님이라는 말 아십니까? 당신 같은 장님들을 삯군들이 가장 좋와하는 부류지요. 사기꾼들이 말입니다. 개 뼉다귀 같은 말을 하고서는 아멘 하라면 목이 터져라 아멘을 외치는 어리숙 말입니다.율법이 뭔지? 복음이 뭔지? 쥐어 줘도 모르겠지요? 뇌 세포가 단순한 사람들은 그냥 살던대로 사는것이 편합니다. 그냥 그대로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