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단비

작성자
함창석
작성일
2021-03-01 10:32
조회
176
새벽단비

함창석

예전에는 동사무소
주민복지센터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가 비를 맞고 있다
삼월 초하루 내리는 비
새벽아침에 내리는 비치고는
제법 굵은 빗줄기라
구름물방울들이 서로 뭉쳐서
큰 덩이줄기로 떨어지니
길에는 물이 흐르고 있지
어제는 날씨가 조금 덥더니
대기 중의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어
도로지상으로 떨어지고 있다
환웅이 태백산 아래 내려와
인간을 구제하려 할 때
우사를 거느리고 왔으나
궂은 비 낙수소리에는
단잠을 설치는 밤이었다지만
기도하러 가는 새 봄날에
달려가는 차창을 적셔주면서
새벽에 내리는 비라
봄을 기다리는 생명체들에게
마시 울 젖줄이더냐
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
단비라고 기록이 될 만큼
산천초목을 흔들어 깨우듯이
새벽단비가 내리고 있지



전체 5

  • 2021-03-02 07:41

    강원도에 春雪이 많이 내리면 그해 풍년이 든다는 얘기를 TV에서 본 것 같은데 어제 강원도에 春雪이 많이 내렸으니
    올해 풍년이 들 것으로 보입니다.


    • 2021-03-02 16:13

      예전 강원도 도지사가 농림부장관에게 강원도 대풍이라고 하자 호남평야, 김해평야 등 영호남이 흉년이라 꾸지람을 하였다고 합니다. 강원도가 흉년이 들어야 영호남, 경기, 충청이 풍년이 든다는 속설도 있으니 그냥 웃지요.


  • 2021-03-02 16:10

    손자 입학하는 날

    함창석

    우리 손자는 강릉 함씨 정평공파 33세손이다. 2021년 3월 2일 오전 10시에 원주 만대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는 날이다. 원주시청 옆에 있는 학구 내 이 편한 세상 아파트로 이주를 하였기에 취학통지서를 받고 입학을 하게 되었다. 새벽에는 눈이 쏟아져 온통 눈이 쌓였다. 도로에는 녹았지만 응달 인도에는 눈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제설작업을 하고 있다. 학교 앞에는 9시 30분이 되자 입학하는 어린이들과 학부모, 친지 등이 모여 왔다. 우리는 기념으로 사진 몇 컷을 찍고 며느리가 학부모라 손자를 입학대기 장소까지 안내하고 교문으로 돌아왔다.

    우리 아들은 병원이 휴무가 아니라 화요일 일을 하는 날이라 아들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출근을 하였다. 예전에 우리 아들은 늘 불만이 많았다. 부모가 부부교사였기에 입학이나 여러 행교행사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 아빠가 오는데 우리는 할머니가 오신다는 불만이었다. 이유를 이야기해주어도 서운한 감정은 어쩔 수 없는지 성인이 되어서도 말하곤 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의 마음을 알 수가 있겠다. 우리 아들은 손자가 입학하는 날이지만 아침에 자기 아들에게 축하한다는 말만 하고 출근하였다고 한다.

    학교 정년퇴직을 하고 손자들을 돌보아주고 있는 이 할아버지는 오늘 아내와 함께 손자 입학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만대초등학교 교문 앞에 서 있다. 우리 아들딸이 입학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코로나 19로 인하여 입학하는 학교 풍경이 많이 달라진 현실을 보게 된다. 우선 교문까지만 가능하고 강당이나 운동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반별로 입학식을 하는 모양이다. 3월은 늘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날씨가 차다. 초등학교근무 당시 해마다 입학을 하는 광경을 보았지만 오늘은 교문 앞에서 교사시절을 다시 한 번 더 돌아보게 되었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 손자가 학교에 잘 적응해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안전제일이라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조심하라고 교통지도 하고 축복을 하였지만 손자에게 기대하는 마음은 크다. 손자가 큰 꿈을 갖고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잘 따르며 배우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 협력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민주시민이 되길 바랄 뿐이다. 아들딸은 잘 자라주어 자기가 원하는 직업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손자도 학교생활을 통하여 지혜와 몸이 자라나 할아버지나 아빠보다 더 나은 직업을 수행하며 미래를 열어가기를 기도하면서 돌아왔다.

    11시 30분에 끝나 하교를 한다고 하기에 손녀와 우리는 그 동안 집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기는 그렇고 그래서 잠시 파리바게뜨에 들려 차나 한잔하자고 며느리 제안에 갔으나 학부모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어 그냥 원주역근처까지 드라이브나 하자고 하여 차를 몰고 역에 도착하였다. 원주역은 새로 이전하였기에 며느리에게 소개를 해주고 싶었다. 11시 10분이 되어 다시 돌아가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 11시 40분이 되어서야 1-5반부터 나왔다.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다. 다음 1-2반이 나와 사진을 찍었다. 아내와 나는 재빠르게 담임선생님과도 찍었다.

    손자가 간식을 먹지 않아서인지 배가 고프다고 하였다. 며느리는 배달음식을 주문하고 집에 들어가 기다리다가 자장면, 짬뽕, 군만두, 탕수육 등을 나누어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 즐거웠다. 아내도 무척이나 즐겁고 손자가 대견스럽다고 한마디 하였다. 사진을 잘 정리하여 아들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며느리에게도 보냈다. 오늘 손자 입학식에 참여하여 보람 있는 일을 잘 해냈다고 자화자찬을 하며 잠시 쉬다가 1년여 공사를 하였던 수변공원 미리내도서관 개관식이 있어 1시 30분에 출발을 하니 하늘에 솟은 해가 더 빛나 보이는 날이다.


    • 2021-03-03 07:33

      함 장로님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느껴지는 글입니다.


  • 2021-03-03 09:53

    원주거주50년

    함창석

    이 소자가 치악산 동편 매화 산자락에서 태어나 관말 안흥초등학교를 거쳐 서울에서 중고등학교, 춘천에서 교육대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교사로 출발하였으니 감개무량하다.

    원주에서 사는 초창기에는 봉산동 주택 시절이 있었다. 1973년 11월 우리 아버지는 고향 논을 정리하고 원주로 이사를 하였다. 원주경찰서와 원주초등학교 후문 쪽 철로 변에 있는 시멘트 벽돌 주택이었다. 방이 3칸으로 깨끗하였다. 아버지는 당시 직장에 다니던 남동생과 할머니 그리고 원주초등학교로 전학시킨 여동생 2명이 살게 되었다. 다음 해 봄에 아버지는 행정서사 겸 큰 외삼촌이 경영하는 사설금융 총무로 일하시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계셨다. 철로 변이라고 소음과 위험성이 있다며 2년 정도 살다가 매매를 하고 우물시장 후생주택으로 이사를 다시 하게 된다. 방은 2개였지만 그래도 제법 컸기에 9식구가 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마는 그런대로 도시생활에 적응을 하고 있었다. 나는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였기에 토요일이나 방학 때만 잠간 머무르곤 하였다. 작은 방을 하나 더 붙였지만 결혼을 하여 손자가 태어나자 1년여를 살면서 좁았기에 주변에 있는 마당이 너른 집으로 이사를 다시 하였다. 방이 4개였기에 형제들과 생활하기에는 좋았고 동생들도 결혼을 하면서 이웃에서 살았기에 부모님들이 손자들을 돌보아주는데 무리가 없었다. 큰 아들인 나도 교사로 발령을 받아 굳이 고향에서 살 필요는 없었기에 원주로 자리를 잡으려고 이사를 하게 된 것이라고 아버지는 늘 회고하셨다. 아버지는 봉산동 집에서 폐암으로 20여 개월 투병 중에 67세로 소천을 하셨다.

    두 번째로 이사를 한 것은 학성동 삼천리아파트이었다. 아들이 학성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등하교가 쉬운 지역으로 전세를 얻어 나가게 되었다. 딸은 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봉산동 주택은 식구가 많은 교회 집사님 댁에 전세를 주었다. 우리 부부는 여주지역으로 출퇴근을 하였기에 거리상으로는 가깝고 조금 편리하였다. 1년이 되자 주인이 입주를 한다고 하여 옆에 있는 아파트로 평수를 넓혀 이사를 하고 아들이 중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세 번째로 이사를 한 곳은 개운동 원흥3차아파트이었다. 딸이 원주여자중학교로 진학하고 아들이 중학교 졸업 후 원주고등학교로 입학하게 되어 맹부삼천지교의 심정으로 등하교를 원활하게 해주기 위해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아들은 부산 고신의대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부산에 작은 아파트를 구입해 주고 전세금을 줄여서 남부시장이 있는 명륜동 치악맨션아파트로 네 번째 이사를 하게 되었다. 딸은 원여중이 가까워 걸어 다니게 되었으나 거리가 복잡하고 소음이 많은 지역이라 창문을 열 수가 없었으며 작은 평수라 생활이 불편하였다.

    다섯 번째로 이사를 한 곳은 행구동 건영아파트이었다. 딸도 서울 이화여대로 입학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 조용한 곳에 가서 살고 싶었다. 전세로 가서 2년을 살다가 주인이 매매를 한다기에 소유권 이전을 하고 10여년을 눌러 살게 되었다. 어머니도 경로당에 나가시며 보암 잇게 적응을 잘하셔서 참 좋았다. 여주로 출퇴근 거리는 멀어졌지만 공기가 시내와는 달랐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관리자 시절이었기에 아내와 산책도 많이 하였다.
    여섯 번째로 이사한 곳은 반곡동 힐데스하임아파트 5단지이었다. 아내는 손자들을 돌보아주기 위해 38년 교직 후 명예퇴직을 하고 나는 41년 교직 후 정년퇴직을 하였기에 안정을 찾으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혁신도시 개발지역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이사를 하여 지금까지 7여년을 정착하여 살아가고 있다. 4년간이나 아파트 선거관리위원장으로 봉사도 하였다.

    5년여를 셋째 딸네 집에 사시던 어머니는 90세가 넘자 치매가 시작되어 밖에 나가면 집을 찾아오지 못하실 정도가 되어 걱정이 많았으나 형제들이 협의하여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하여 면회는 안 되고 가끔 돌봄 요양사가 사진을 보내온다. 참 안타깝다.

    영월에서 7년째 병원을 하는 아들네가 제천을 거쳐 원주로 이사를 하였다. 손자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려니 돌보아 주는 손길이 필요하다. 할머니는 자주 가서 며느리를 도와주곤 한다. 지난 날 우리 부부가 출퇴근하였던 것처럼 아들내외도 1시간가량 소요 출퇴근한다.

    원주에서 반백년이 되는 50년을 살면서 봉산교회를 섬기며 살게 된 것이 스스로 생각하여도 대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된다.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원, 각종 부장 등을 맡아 봉사하면서 주일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성경애독을 하면서 성장, 성숙하게 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학교인 광주초등학교 100주년 행사를 지도하고 봉산교회 예배당 건축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봉헌을 하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몽골선교에 참여하여 몽골 날래흐 산돌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면서 몽골 신학교 M.T.B.C 장학회 등을 후원하게 되었다. 2019년에는 ‘꽃 진자리 꽃 피고’ 시집을 출간하고 이어 2020년에는 300인 초청 공동시집 ‘하늘같은 나무’에 참여하며 2021년에는 함창석 에세이집 ‘만년, 노랑 무궁화’를 발간하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내게는 기쁨이 넘치고 나누어주는 보람을 만끽하게 되면서 회고록의 한 페이지를 정리하게 된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원주동지방회 소속 30년이나 봉사한 장로은퇴를 앞두고 있다. 혁신도시 수변공원 미리내호수 옆에는 미리내도서관이 개관이 되었다. 그 동안 출판한 책을 몇 권 도서관에 증정을 하였던 인연으로 인하여 2021년 3월 2일 내빈으로 초청을 받고 참여를 하였다. 눈이 온 후 해가 났다. 바로 아파트 앞이라 남은 생을 도서관에서 어울리며 살게 될 것이기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기독교문학박사 트랙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봉사하게 될 것으로 예정하니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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