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말로

작성자
함창석
작성일
2021-01-18 12:43
조회
71
<수필>
인생말로
人生末路

함창석

우주계의 에너지로 떠돌다 에너지의 합성으로 정자가 되고 난자가 되며 남녀 성행위를 통하여 자궁 즉 태에서 만나 인생이 된다. 태에서 9달 정도를 살아가던 태아는 태에서 이 땅으로 나온다. 주위 사람들에게 양육을 받고 생활을 하며 소년, 청소년으로 자라다 성년이 된다. 청년, 청장년, 장년으로 생활을 하다가 노년에 이르게 된다. 다만 보편적인 인생시기를 보내게 될 때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노년이 되었을 때 살아가는 모습은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여기 3가지 정도의 경우수를 적으면서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궁고옹
窮考翁

窮자는 뜻을 나타내는 구멍혈(穴구멍)部와 음을 나타내는 躬(궁)이 합하여 이루어진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이를 종합해보면 ‘매우 가난하다’이다. 우선 窮자를 갑골문을 보면 宀(집 면)자에 人(사람 인)자, 呂(등뼈 려)자가 이미지다. 이것은 집에 뼈가 앙상한 사람이 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 금문과 소전을 거치면서 人자는 身(몸 신)자로 바뀌었고 宀자도 穴(구멍 혈)자로 바뀌면서 ‘궁하다’라는 뜻의 竆(궁할 궁)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竆자는 지금은 이체 자이었던 窮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考자는 뜻을 나타내는 늙을로엄(耂(=老)노인, 늙다)部와 음을 나타내는 丂(교→고)가 합하여 이루어진다. 머리가 세고 허리가 굽은 노인의 모습이다. 丂자는 ‘솜씨가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는 있지만 여기서는 모양 자 역할만을 하고 있다. 갑골문에서는 지팡이를 짚은 사람을 그려 ‘노인’을 뜻했었다. 금문에서 지팡이를 匕(비수 비)자로 표현한 老자와 丂자로 표현한 考자가 파생되었다. 그래서 단순히 ‘노인’을 뜻하는 老자와 달리 考자는
오랜 경험과 연륜이 있는 ‘깊이 헤아리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翁자는 뜻을 나타내는 깃우(羽깃, 날개)部와 음을 나타내며 동시에 목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公(공→옹)으로 이루어진다. 公자는 사물을 반으로 나눈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공→옹’으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翁자는 본래 새의 ‘목털’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었다. 하지만 후에 ‘노인’이나 ‘아버지’를 존칭하는 말로 가차가 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더는 쓰이지 않고 있다. 翁자가 ‘노인’을 뜻하게 된 것은 가늘고 하얀 새의 목털이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머리칼을 연상시키었기 때문이다.

궁고옹은 자식들에게 다 쏟아 붓고 늙어서 돈 한 푼이 없으며 아침 한술 뜨고 집을 나와 갈 곳이라고는 공원이나 광장뿐이며 점심은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하고 늙어가면서 삼십대에는 기호식품보다 더 귀한 배우자, 사십대에는 없어서는 안 될 가재도구보다도 더 귀한 배우자, 오십대에는 가보의 자리에 위치한 배우자, 육십 대에는 지방문화재급이라고나 할까? 그런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외롭고도 쓸쓸하게 살아야하는 칠십대에는 국보에 위치할 배우자를 먼저 보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산다. 문자 그대로 폭삭 늙은 사람이다. 집에서 손자들이나 돌보며 텅 빈 집이나 지키는 존재로 남는다. 어쩌다가 동네 노인정에 나가 노인들과 화투치고 장기나 놓지만 형편만 되면 따로 나와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맴돌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선학동
仙鶴童

仙자는 屳(선)의 본 자이다. 사람인변(亻(=人)사람)部와 山(산)으로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 만나면 신선할 것이다. 산에 사는 사람, 신선의 뜻이다. 소전에서는 人자와 䙴(오를 천)자가 결합한 僊(신선 선)자가 ‘신선’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䙴자는 새집을 옮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옮기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 人자가 더해진 僊자는 ‘산으로 터전을 옮긴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해서에서부터는 글자가 간략화 되면서 山자가 들어간 仙자가 ‘신선’이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鶴자는 鹤(학)의 본 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새조(鳥새)部와 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희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隺(학)으로 이루어진다. 흰 새의 뜻이다. 두루미는 순수 우리말이고 한자어로는 ‘학’이라 한다. 고대부터 학은 신선이 타고 다니던 새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선비를 상징했다. 길게 뻗은 흰 날개의 자태가 우아하고도 고상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때 선비들이 즐겨 입던 옷도 학의 자태를 흉내 낸 것이니 학은 우리 선조들의 일상과도 친숙했었다. 고대 동아시아에 학은 고상함의 상징이었다.

童자는 동네(里) 어귀에 서서(立) 노는 아이들이라는 뜻이 합하여 「아이」를 뜻한다. 갑골문에서의 童자는 辛(매울 신)자와 目(눈 목)자, 東(동녘 동)자가 결합한 이미지다. 여기서 東자는 발음요소이기 때문에 辛자와 目자만을 놓고 본다면 이것은 노예의 눈을 찌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노예의 한쪽 눈을 멀게 하여 저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한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노예’를 뜻하였었다. 하지만 후에 ‘아이’라는 뜻으로 가차돼 본래의 의미는 더는 쓰이지 않고 있다.

선학동은 사랑이나 미움도 놓아버리고 성냄이나 탐욕도 벗어버리며 선이나 악도 떨어버리고 삶에 아무런 걸림이 없으며 올라야 할 천당도 없고 빠져버릴 지옥도 없으며 다만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다. 또한 늙어가며 고고하게 살고 심신이 건강하고 여유가 있으며 나라 안팎을 두루 돌아다니며 산천경계를 유람하고 검소하나 천박하지 않으며 많은 벗들과 어울려 노닐며 서로 교류하고 배우며 틈이 나는 대로 학술논문이나 문예작품을 펴내기도 한다. 더 나아가 몸은 늙어가나 동심으로 돌아가 청소년처럼 꿈을 갖고 살며 대학의 평생교육원이나 학원이나 서원, 노인대학에 적을 두고 못다 한 공부를 하며 한문이나 서예, 정치, 경제 상식과 인터넷카페에 들어가고 수시로 동지들과 어울려 여행도 하며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즐거운 여생을 보낸다.

광추자
狂醜者

狂자는 뜻을 나타내는 개사슴록변(犭(=犬)개)部와 음을 나타내는 㞷(황의 생략형(省略形)→광)이 합하여 이루어진다. ‘미치다’나 ‘사납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狂자는 犬(개 견)자와 王(임금 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狂자는 본래 광견병에 걸린 개를 뜻했던 글자였다. 그래서 갑골문에서는 止(발 지)자와 犬자를 함께 그려 개가 미쳐 폭주한다는 뜻을 표현하였었다. 이후 소전에서는 㞷(무성할 왕)자가 발음역할을 하다가 해서에서는 王자가 발음을 대신하게 되면서 지금의 狂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醜자는 酉(유술)와 머리에 장식을 한 무녀가 신전에 술을 따르는 모양을 나타내는 글자로 이루어져 신을 섬기는 사람이다. 酉자는 술병을 그린 것이다. 鬼자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귀신’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면 옷고름이나 머리가 엉망이 될 것이다. 醜자는 바로 그러한 모습을 빗대어 만든 글자로 술에 취하여 용모가 귀신같이 된 사람을 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醜자는 ‘못생기다’나 ‘밉다’와 같이 용모가 아름답지 못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者자는 원래의 자형은 耂(로)와 白(백)의 합자이다. 나이 드신 어른(老)이 아랫사람에게 낮추어 말한다(白)는 뜻을 합하여 말하는 대상을 가리켜 「사람」, 「놈」을 뜻한다. 불 위에 장작을 잔뜩 쌓고 태우는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갑골문을 보면 이파리가 뻗은 나무줄기 아래로 口(입 구)자가 이미지다. 이것은 사탕수수에서 떨어지는 달콤한 즙을 받아먹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사탕수수’를 뜻했다. 후에 ‘놈’과 같은 추상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뜻으로 가차 되면서 본래의 의미는 더는 쓰이지 않고 있다.

광추자는 미친 사람처럼 살며 함량미달에 능력은 부족하나 주변에 존경도 받지 목하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감투 욕심은 많아서 온갖 장은 도맡으려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강요나 물리적으로 괴롭히고 불쾌하게 하며 이권이 생기는 데라면 체면을 내팽개치고 달라붙으며 권력의 끄나풀이라도 잡아보려고 늙은 몸을 이끌고 끊임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그렇게 즐겨하던 술 담배, 성적 간음행위도 할 수 없이 끊어야 하고 어쩌다 불치병을 얻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살아가는 형편으로 죽지 못해 산다며 절망한다. 주위 사람들은 저렇게는 살면 안 되는데 하는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가련한 인생이 된다. 가족을 비롯하여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그야말로 사회에 암적인 요소로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하는 인간이하의 생을 유지해야 한다.

누구나 광추자나 궁고옹보다는 선학동으로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문제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지지 않을 때도 많고 이루어지기도 어려운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라고나 할까? 어쩌다 선학동으로 살게 된다면 복이 넘치겠지만 우리 인생들 대다수는 궁고옹으로 남은여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광추자로 살려고 하는 행태를 보인다면 그래도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있어서인지라 저렇게 발버둥거리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나는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는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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