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망상’

작성자
김정효
작성일
2020-10-24 10:09
조회
118
김일성의 전쟁지도와 대소(對蘇)·대중(對中) 군사지원 외교행위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망상’이 전쟁지도로 실행된 것은 적극적

인 대소(對蘇)군사지원 외교 행보였다. 김일성은 제1차 방소(1949.2.22.~3.24)에서 3차례에 걸친 스탈린과의 북·소회담(3월 5일, 7일, 14일)에서 대남 무력통일 구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한군을 속전속결로 제압할 수준이 부족하고,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즉각 개입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미·소간 얄타협정(1945.2)이 유효하다는 점을 들어 선제남침공격을 반대했다. 그런데 스탈린은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략하라는 식의 전쟁지도 발언을 통해 김일성의 무력통일구상을 조건부 동의해주었다.
이와 같은 스탈린의 조건부 동의는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반제국주의 프롤레타리아 공산사회주의 혁명노선’과 일치하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남침논의는 철저히 은폐했으며, 대북 군사지원 규모가 확대되는 결정적인 전쟁지도를 해준 것이다. 스탈린의 조건부 승인을 획득한 김일성은 귀국 후 본격적인 남침준비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제2차 방소(1950.3.30.~4.25)는 비밀리에 추진되었으며, 김일성과 스탈린은 4월 10일 21시 10분부터 23시까지 만난 자리에서 스탈린은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국제정세가 미군의 한반도 철수(1949.6.30)로 변화했고, 중공의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대륙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한반도의 ‘공산화(共産化)’를 위해 적극적인 행동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이 비밀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이 개입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이에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국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염전분위기이고, 북한군이 신속히 전개하여 전쟁을 3일안에 승리로 끝낼 수 있다. 남조선 노동당 당원 20만 명이 남한에서 봉기를 하여 참여할 것이다.”라는 답변을 했다.(김성호, 『조선전쟁의 비밀과 진실』, 2001년)
그리고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쟁지도를 해주었는데 ①철저한 전쟁준비를 위해 부대를 추가적으로 창설할 것과 정예공격사단을 편성하고, 더 많은 무기와 장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특히 남한의 공격을 유도해서 그것을 빌미로 반격하면서 전쟁을 확대하라는 구체적인 기만전술(欺瞞戰術)을 지도해주었고, 남침작전을 3단계로 구획하여 38도선에서 남해안까지 작전종심 350km를 한 달만에 점령하여 작전을 완료하라는 지도를 해주었다. ②위장평화전술로써 남한에 평화통일 제안을 하여 ‘전투와 군사행동’은 철저히 은폐하도록 지도했으며, ③공격작전은 속전속결이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④중공과의 군사지원을 연대하면서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으라는 조건부 승인을 하면서 “중공을 믿고 의지할 필요가 있고, 소련은 직접 개입이 불가하다”는 방침을 통보하였다. 따라서 6.25전쟁은 스탈린의 교사에 의한 김일성의 전쟁범죄라는 연관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전쟁개입은 공범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김일성은 대중(對中)군사지원 외교행보에도 집요한 노력을 하였다. 제1차 방중(1949.4.28.)에는 김일성을 대신하여 북한 민족보위성 부상 김일이 방문하여 방소회담 결과를 보고했고,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남침전쟁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남침전쟁이 시기상조라는 불가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전쟁지도에 관하여 속전속결의 중요성과 지구전의 불리한 점을 언급했고, 중공군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모호한 언질을 주었으며,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3개 한인사단 중 2개 사단을 북한군에 편입하도록 승인해 주었다.
제2차 방중(1950.5.15.)에서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5월 14일 스탈린의 특급전문을 확인한 후 김일성의 대남전쟁 도발에 동의하였으며, 북한의 무력침공 기본구상을 지지하면서 전쟁지도를 해주었다. 마오쩌둥의 전쟁지도는 ①미국이 전쟁에 개입한다면 중공은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 지원을 약속하였고, ②중공의 군사대응전략으로 동북 3성 근처 압록강변에 3개 군단을 배치하고, ③미군이 38도선을 넘어오지 않으면 관여하지 않겠지만 일단 38도선을 넘으면 반드시 인민지원군을 투입하겠다는 점을 확실히 하였다. 이처럼 6.25전쟁은 단순히 북한 김일성의 개인적인 군사도발이 아니라 공산진영 소련과 중공의 군사적 지원 공모 하에서 자행된 '범죄전쟁(criminal war)'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김일성은 민족사에 비극적 범죄를 저지른 '전범(war criminal)'이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 이승만 대통령의 개전 초 전쟁지도 72시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로 3년차에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당하여 대한민국의 존망과 국민의 생존여부를 놓고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몰렸다. 6.25전쟁은 그의 재임기간에 발생하여 정전으로 마감되었기에 전쟁지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전시업적에 대하여 평가는 관심이 없거나 무시되었고, 그의 과오만을 부각(浮刻)하였다. 소위 이승만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개전 초 서울시민을 내팽개치고 몰래 피난을 간 비겁한 지도자, 한강교를 조기 폭파하여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서 고생을 시킨 무책임한 대통령으로 매도(罵倒)되는 점은 진실을 비켜간 과도한 평가절하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승만의 3일, 72시간의 행적을 전쟁지도 차원에서 추적·고찰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개전 당일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한 상황을 최초 경찰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이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09시 30분 경 창덕궁 비원에서 산책 중 10시경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대거 남침’상황을 보고받자 바로 경무대로 돌아왔다. 그 당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도 의정부 전선을 둘러보다가 비로소 10시에 북한의 기습도발이 ‘전면공격’임을 판단했다고 한다. 이어서 신성모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남침 상황을 보고한 시간은 공식적으로 10시 30분으로 확인된다. 보고내용에는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춘천근교에 접근한다고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며 불안해 했다고 프란체스카 여사의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22쪽)에 증언되어있다. 당시 신 국방장관은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하니 참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경찰의 정보는 신 장관의 보고와 달리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고 정확히 보고되면서 이 대통령은 전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전면전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보고를 받은 후 국무회의(國務會議)의 소집을 지시했다. 11시에 개최된 국무회의는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주관했으나 특별한 대책없이 12시에 산회했고, 오후 2시에 다시 대통령 주재하에 국무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직전에 오전 11시 35분부터 13시까지 무초 주한 미대사를 경무대로 불러서 미측이 파악한 전황을 보고받고 논의하였다. 또한 무쵸대사와 회담을 마친 후 주미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연결시켜서 장면(張勉) 대사에게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정일권 장군과 손원일 제독을 빨리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장군을 중용하여 전쟁지휘를 맡기고자하는 구상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지시대로 장면대사는 25일 01시(워싱턴시각)에 미 국무부를 방문하여 한국의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제기하여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요구했다”고 알려줌으로써 미군의 개입이 예상되는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은 하와이 호놀룰루 총영사 김용식에게 미 본토에서 군함(patrol craft)을 구입하여 귀국중인 손원일 해군총장에게 군함 3척을 이끌고 최단시간 내 귀국하라고 지시를 했다.

6월 25일 09시 30분에 북한남침의 전쟁상황 보고받은 후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가 전쟁이 돌입했다는 위기상황을 인식했고, 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결심하는 ‘전쟁지도’의 구상이 본능적으로 나타났다. 이어서 11시 35분 무쵸 미 대사를 만났을 때부터 이 대통령의 전쟁지도가 시작되었다. 즉 미국의 즉각적인 군사지원을 요청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이 전쟁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통보하였던 것이다. 개전 초 72시간동안 이승만대통령의 전쟁지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에 대하여 한국군에게 ‘더 많은 무기와 탄약(more arms and ammunitions)’이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이에 무쵸 미대사는 15시에 국무장관에게 전문보고를 했으며, 이 전문보고는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을 위한 특정탄약 10일 분을 즉시 부산으로 보내라(to ship ten days supply of certain items of ammunition at once Pusan for Korean Army)”라는 지시로 실행되었다. 이 요청은 국군의 취약점을 대통령이 평소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서울에 계엄령(martial law) 선포를 고민하였고, 당시 전선의 급박한 상황으로 육군 지휘부에 부담을 주는 계엄령 선포를 자제했던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초기 이 대통령의 과오로 부각되는 것은 대국민 홍보인데 25일 07시에 국방부에서 중앙방송(KBS)을 통해 북한의 남침을 보도했고, 12시에 국방부 담화를 발표했다. 그 와중에 ‘국군 제17연대 해주 돌입’과 ‘국군 의정부 탈환 북진 중’이라는 오보(誤報)로 인하여 국민들이 심각한 혼란을 겪게 만든 것이었다. 이 실책은 이 대통령의 책임보다 신성모 국방장관의 책임과 무능함이 매우 크다고 판단된다.셋째, 이승만 대통령은 총력전을 이미 구상하고 전쟁에 임했다. 그런 대통령의 전쟁지도는 군과 경찰,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전 국민이 총동원된 전쟁으로 패망을 막았던 것이다.
넷째,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를 구상하였다. 즉 이 대통령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38도선이 무너진 점을 이용하여 미국의 힘을 빌어 북진통일을 해야겠다는 전쟁지도의 궁극적 목표를 구상한 것이다.
다섯째, 이 대통령은 무쵸 대사를 통해 미 극동사령부(FECOM)에서 F-51전투기를 요청하여 공군력을 보강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맥아더 장군은 즉각 지원을 지시하여 26일 무스탕(F-51) 전투기 10대의 인도를 발표하여 한국공군이 역사상 첫 전투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여섯째,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로 대포와 전투기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 책임론을 주장했다. 이 대통령은 26일 03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결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걸었다. 이 전화에서 이 대통령은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 누구의 책임이오? (중략) 어서 한국을 구해주시오”라고 무섭게 항의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당시 미국에서 맥아더 소령과 친분관계가 있는 사이로 두 사람의 오랜 교분이 맥아더 장군의 한국에 대한 각별한 지원의 배경도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대통령은 국가의 위기에서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전쟁지도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26일 04시 30분 무쵸 미대사에게도 다시 전화를 걸어서 대포와 전투기를 추가 요청했다.
일곱째, 이 대통령의 특명으로 ‘군사경력자 회의’를 26일 10시 소집하여 자문을 구했다. 군사경력자 회의에서는 전황을 보고받고 토의를 주관했으나 ‘서울사수’과 ‘한강방어선전투’가 맞서서 신 장관과 채총장의 주장대로 서울을 사수하기도 하고 폐회되었으나 이 결정은 국군에게 치명적인 전투력 와해가 되는 과오가 되었다. 서울사수론으로 후방에 있었던 육군 제2,3,5사단이 강북으로 투입되었다가 28일 02시 40분 한강대교가 조기 폭파되면서 퇴로가 막혀 중장비를 버리고 지리멸렬 철수하는 국군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서울사수 실패는 국방부를 신뢰했던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라고 보는 것은 과장된 점이 있다.
여덟째, 제6차 국회본회의에 참석하여 대통령으로서 정치지도력을 발휘했다. 26일 11시에 국회본회의에 참석하여 초당적인 협조를 구하고, 유엔총회에 ‘한국의 지원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국회의 의결로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본회의에서는 ‘비상시국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홉째, 미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을 설득한 구국의 군사외교를 통하여 긴급 군사원조를 와 미군의 참전을 이끌어 냈다. 27일 01시에 장면 주미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트루먼 대통령을 직접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장면 대사는 26일 15시(워싱턴 시각)에 트루먼을 회동하여 이 대통령의 요청을 전달했고, 트루먼 대통령의 공식적인 한국 지원을 확인했다. 이러한 외교적인 대상과 시기를 놓치지 않고 판단할 수 있었던 이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적 감각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국의 외교활동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전쟁지도 평가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직후 대통령으로서 국가원수로서 그리고 국군통수권자로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침식을 거르면서 전쟁을 지도했던 전쟁지도는 매우 적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군사외교를 통하여 미국의 정치지도자 트루먼 대통령과 군사지도자 맥아더 장군을 설득하여 미국의 군사지원과 조기 참전을 이끌어 낸 것은 외교의 신(神) 이승만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만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에는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개전 초 3일간 전쟁지도의 업적에서 탁월하였다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에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군사지원을 극비리에 추진하여 전쟁을 준비한 군사외교적 행위와 체제내부의 전시 전환과 군부대 추가 창설 및 각 제대별 공격준비훈련 등 치밀한 전쟁지도는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전쟁지도자로서의 김일성은 전쟁초기 전투력의 우세가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지속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판단의 착오를 범했으며, 철수한 미군의 조기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 그리고 한국군을 오합지졸의 수준으로 무시한 점도 오류를 저지른 것이고, 특히 춘천방면의 북한군 제2군단인 국군 제6사단의 용전분투로 돈좌된 상황을 보고받고 속전속결을 구상했던 제1단계 전쟁지도에 차질을 빚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전쟁지도는 전쟁준비단계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개전과 동시에 국군의 강력한 저항과 미군의 조기 개입으로 실패하기 시작하여, 이후 전쟁기간 중 김일성의 전쟁지도는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된다. 오히려 항미원조지원군으로 참전한 중공의 팽덕회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뺏겨서 형식상 총사령관으로서 자리는 지켰으나 전쟁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체 1

  • 2020-10-25 20:40

    김일성은 이승만에게 지략에서 지고, 박정희에게 경제 발전과 정치 체제 경쟁과 군비경쟁와 민주주의 실천에서 졌습니다. 김일성은 무능하고 폭압적인 정치인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입니다. 북한은 뒤늦게 핵무기만 가지면 다 된다고 믿고 있지만, 핵무기 가지고 굶어죽는 이상한 정책에 올인했습니다. 흉년에 농사에 전념 안하고 칼을 벼르는 자는 필경 강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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