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바꾸기

2025-03-29 13:38 안영수 999
시어머니의 관점인가, 친정 엄마의 관점인가 0000


눈이 먼 거지가 "나는 장님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고 있다. 간혹 동전이 날아들긴 하지만 대부분 무관심하게 그 앞을 지나간다. 그런데 갑자기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다가와 팻말 뒤에 뭐라고 쓴다. 이후 수많은 사람이 다가와 엄청나게 많은 돈을 기부하기 시작한다. 어리둥절한 장님이 그 여자에게 대체 뭐라 썼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관대해진 거냐고 묻는다. 여자는 그저 같은 말을 조금 다르게 썼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아름다운 날입니다. 저는 그것을 볼 수 없네요."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의 생각
육아 스트레스는 요즘 엄마들이 더해요. 그 이유가 뭘까요? 예전 엄마들은 자신의 욕구를 다 포기하고 살았어요. 순응하는 것이 최선인 시대였죠. 하지만 요즘 엄마들은 일도 육아도 포기하지 못해요. 당연히 버거워지죠. 무엇이 더하고 덜한 게 아니예요. 자아실현도 중요하고 내 아이도 소중해요. 지키고 싶은 소중함이 더 늘어난 겁니다."그러다 보니 부작용이 생겨났다. 아이를 자신의 자아실현 도구로 이용하는 엄마들이 적지 않은 것. 아이를 태운 유모차의 브랜드, 입고 있는 옷의 가격, 최고급 성분을 자랑하는 수입 분유가 곧 자기 자신의 위치와 취향을 대변한다고 믿는 엄마들이다. "관점을 아이에게로 집중하자고요. 내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많다는 게 과연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일일까요? 아이가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했나요? 아이 때문인지, 엄마 때문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최근 SNS의 발달은 공공연한 비교의 장을 제공한다. 누가 무엇을 샀는지, 어디에 갔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시시콜콜 다 알게 되니 자연스레 내 처지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따라잡기 위해 무리해보기도 하지만 이는 다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회의감의 원천이 된다. "누구보다 엄마들 자신이 더 잘 알 거라 생각하는데요. 자식을 통해 대리전을 치르려 하는 거예요.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아바타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독립적인 개체로 태어난 존재죠. 자식은 자랑하라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에요. 그러니 경쟁심을 버리면 좋을 것 같아요."'아이 관점'으로 전환하라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내 아이만큼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게 모자람 없이 키우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 아닌가.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부모 마음'이 과연 '아이 마음'보다 중요할까 라는 점이다."처음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의 체온, 기침 소리, 손짓과 눈빛에 오감을 작동시켜 모든 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죠. 왜 울까, 뭐가 필요한 걸까, 안아달라는 건가, 배가 고픈가, 어떻게든 아이의 의중을 알아차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애가 점점 자라면서 초심을 잃게 되는 것 같아요."아이가 걷고 말하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서서히 엄마 마음에 욕심이 싹튼다. 아이의 두뇌 계발을 위해 어떤 장난감과 그림책이 좋을까? 조기 영어교육은 빠를수록 좋다던데 언제부터 시작해야 할까? 각종 교육서적을 뒤적이고 온갖 세미나와 학원을 쫓아다니느라 바빠진다. 정작 아이는 어린이집이나 베이비시터 손에 맡겨둔 채 말이다."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엄마가 자신의 먼 미래를 위해 세미나에 가 있는 대신, 지금 당장 자기 옆에서 심장소리를 들려주고 안심시켜주길 바라지 않을까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얻기를 바라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아이 눈을 바라보고 거기에 관심을 기울여야죠. 다른 엄마들과의 수다나 최신 교육 정보가 아니고요."그는 '가능한 한 자주 아이와 눈을 맞추라'고 강조한다. 그래야 아이의 관점에서 육아를 바라보게 되고, 보이지 않던 문제의 해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젊은 부모들이 겪는 육아 문제의 대부분이 아이의 정서보다 인지 교육을 우선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그는 지적한다."지식을 가르치려는 부모와 지혜를 가르치려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청소년기에 들어서는 순간 굉장한 차이를 보입니다. 지식을 가르치려는 부모를 둔 아이는 지혜와 자존감이 부족해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부모에게 의지하려는 성향을 보여요. 하지만 부모에게서 지혜를 먼저 배운 아이들은 높은 자존감을 지녀 자신이 원하는 이상과 꿈을 찾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관점이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를 말한다. 시각이나 관점에 따라 만사가 다르게 느껴진다. 관점 디자이너(Perspective designer)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 사건이나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만 잘 디자인하면 얼마든지 인생은 새로워질 수 있다.

최근 국민일보 종교국 부국장인 이태형 기자로부터 <더 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두 권의 책을 선물받았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도전과 모험의 인생을 즐기는 한비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독특한 인생을 즐기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이틀에 한 번씩만 잠을 잤다고 한다.

“하룻밤을 새운다 하더라도 고작 여섯 시간 자지 않는 것이잖아요. 밤을 새우며 책을 읽고 글을 썼어요.”

잠에 대한 관점을 뒤바꿔놓는 발상이 아닌가? 그는 결코 사람들이 정해 놓은 시간표에 갇히길 거부했다. 자기 나름의 시간표를 갖고 살아간다.


그러고 보면 무엇을 대하든 관점만 바꾸면 된다. 문제는 상황이나 사건이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관점의 문제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관점이 두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악과를 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단의 관점에서 선악과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 과일이기 때문에 보기도 싫고 곁에 가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관점에서 보면 그 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기 때무에
구미가 당기기 때문에 보암직스럽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고 지혜롭게할 만한 과일처럼 보인 것입니다

끝내 사람은 사단과 눈이 맞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단의 관점을 사람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한 사건을 한 사물을 어떤 관점에 보고 있는 가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아오모리현은 사과 재배로 유명하다. 그런데 1991년에 그곳에 기록적인 태풍이 불어닥쳤다. 1년 동안 땀을 흘려 수고한 사과 수확을 눈앞에 둔 때였다. 그런데 태풍으로 사과의 90%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상품가치가 있는 사과는 겨우 10% 남짓 남았다. 농민들은 비탄에 빠쳤다. 절망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애꿎은 하늘만 원망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의외의 일이 생겼다. 동일한 상황에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10%의 남아 있는 사과를 바라보고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왜? 남은 10%의 사과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한 태풍에도 불구하고 끄덕하지 않고 떨어지지 않은 사과가 아닌가? 그래서 그 사과의 이름을 ‘대입합격 사과’라고 붙였다. 물론 가격은 다른 사과들에 비해 10배 이상을 붙였다. 그런데도 수험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기록적인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간단한 관점 바꾸기로 대박을 쳤다.

어느 목사님에게 딸이 있었다. 딸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녀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혼쭐을 내주기도 했다. 그런데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교회 권사님 한 분이 목사님의 딸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짧은 옷을 입고 다니냐? 남사스럽게.” 그 옆에서 듣고 있던 분이 권사님에게 말했다. “그럼, 할머니가 돼서 짧게 입겠어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관점

어느 며느리가 마음에 담아 둔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는 항상 우리의 건강을 먼저 챙기신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당신 아프신 얘기와 어머니 동네 할머니의 자식들 얘기, 그리고 서방님 도와 달라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이다.

임신 3개월인 임산부가 있다. 시댁에 전화를 했다.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애기 가졌을 때는 잘 먹어야 한다. 과일도 예쁜 거 먹고.” 그런데 그게 끝이다. 친정엄마에게 전화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아무 말 하지 않았더니, 자꾸 물어보신다. 그러더니 친정 오빠 편에 10만원 붙여 보냈다. 연세 드신 친정 엄마는 말한다. “난, 아무 걱정 말아라.” 그러나 시어머니는 말한다. “난 너희 믿고 산다.”

친정 엄마는 바쁜 딸내미한테 주려고 더덕을 까고 양념장 재어 구워먹을 수 있게 보내주신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좋은 더덕이라며 껍질채 보내주신다.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는 정말 다르다. 마음 씀씀이부터, 대하는 태도까지. 그래서 며느리 입장에서 은근히 짜증날 때가 많다.

그럼 시어머니는 할 말이 없을까? 며느리의 마음을 훔쳐 보라.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친정 엄마가 아프면 마음이 아프다. 왜일까? 다 알고 있는, 감추고 싶은 비밀 아닌가?

며느리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어머니가 있다. 김치 담아서 아들네 아파트 수위실에 맡겨두고 말없이 돌아가는 시어머니! 이렇듯 다르다. 딸을 대하는 친정 엄마의 관점과 며느리를 대하는 시어머니의 관점이 천양지차다. 시어머니를 대하는 며느리의 관점과 친정 엄마를 대하는 딸의 관점도 그렇다.

관점을 디자인해야 삶이 변화고 인생의 행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관점을 디자인 하는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생각 감점을 새롭게 디자인하여서 인생을 새롭게 살고 싶은 마음일 것입닏니다

관점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준을 바꾸는 일입니다
이제까지 내 인생의 기준이 되었던 것을 바꿀 때 우리의 관점이 새롭게 디자인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인생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별하였고 때로는 그것이 선악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내 인생의 기준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관점이 새롭게 디자인 될 수 없습니다.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의 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끌고 왔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도 이렇게 다루고 싶은 심정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소?” 예수님은 그들을 둘러보시면서 말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잠시 후, 사람들은 손에서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보고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사탄의 왕국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왕국의 관점에서 여인을 다루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잣대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의 잣대로 여인을 대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탕자의 형의 관점에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여인을 바라보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정죄의 프레임으로 상황을 해석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의 프레임으로 상황을 처리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자리에 서 있는가? 예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죄인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빨간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어떤 사람은 검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당신은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가? 부정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게 부정적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은 매사가 아름답다.

골리앗을 바라보는 눈들을 보라. 사울을 위시한 이스라엘의 장군들, 심지어 다윗의 형들까지 생각은 일치했다. “저 무시무시한 골리앗 좀 봐. 그의 광기 어린 호령소리를 들어봐. 우린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다윗의 관점은 달랐다. 인간적인 관점에 머무르지 않았다. 믿음의 관점으로 골리앗을 바라보았다. 강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하나님이 도우시면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 예전에 곰도 사자도 때려눕혔던 경험이 있다.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서 자기 중심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느끼며 살았던
우리들이 이제는 기준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고 하나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건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우린 아직도 세상의 기준을 내 중심으로 세상을 저울질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제 새롭게 관점을 디자인하여야 합니다
집안을 새롭게 디자인하듯이 옷을 새롭게 디자인하듯이 우리의 관점을 새롭게 디자인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우리의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바로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기준을 바꾸오 하나님의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디자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인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느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군가의 길에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길입니다

내중심은 위에 모든 것을 소멸시킵니다.
이제 저도 우리 성도님들도 관점을 새롭게 디자인하셔서 하나님꼐 영광을 돌리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자리에 항상 계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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