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이승만(李承晩, 1875. 3. 26~1965.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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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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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가난한 선비 이경선(李敬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경선은 항상 족보만을 읽고 숭상하며 가정은 돌보지 않는 생활능력이 없는 학자였다. 어머니 김씨가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하여 이름을 승룡(承龍)이라 지었는데, 1887년 과거에 낙방한 후 승만이라 하였다. 3세 때 서울로 이주하였고, 9세 때 천연두로 실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제중원 의사 알렌(H.W. Allen)의 치료로 회복되었다. 1890년 동갑인 박승선(朴承善)과 결혼하였다. 그는 출세의 관문인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1887년부터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된 1894년까지 무려 열한 차례 과거에 낙방하였다.

1894년 신긍우(申肯雨)의 권유로 부모 승낙 없이 몰래 배재학당에 입학, 노블(W.A. Noble)에게서 영어를 배워 제중원 의료선교사 홧팅 여사의 통역을 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배재학당 내 삼문출판사에서 성경과 기독교문서를 인쇄ㆍ출판한 헐버트(H.B. Hulbert)를 도와 식자도 하고 편집도 하였으며 헐버트의 《한국역사》 저술에 도움을 주었다. The Korean Repository 편집에도 참여했는데, 이는 후에 〈독립신문〉이나 〈협성회보〉를 통한 개화운동, 미국 망명 중 언론을 통한 반일민족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1895년 명성 황후가 시해당하자 친일정권 반대시위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1897년 서재필의 지도하에 배재학당 내에 설립된 협성회ㆍ독립협회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고, 특히 〈협성회보〉의 주필을 맡아 정부의 외교정책 등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한편 그는 1898년 만민공동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박영효 대통령 추대음모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고,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시도하다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감옥에서 이상재ㆍ신흥우ㆍ이원긍ㆍ유성준ㆍ홍재기ㆍ김정식ㆍ이승인ㆍ유동근ㆍ이준ㆍ이동녕ㆍ안국선 등과 함께 복역하며 관계를 맺었고, 이들과 뜻이 통하여 때마침 부임한 감옥서장 김영선(金英善)의 협조하에 옥중학교를 개설해 언어, 산술, 지지(地誌) 등을 가르쳤으며 옥중도서실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 당시 배재학당 은사였던 아펜젤러가 이승만을 자주 찾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배재학당장을 이어받은 벙커(D.A. Bunker)가 감옥에 드나들며 책을 넣어주고 복음을 전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그는 성경을 열심히 읽는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여 1900년 어간 개종하였다. 이후 그는 옥중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40여 명을 개종시키기도 했다.

1904년 8월 9일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된 그는 당시 민족운동의 요람지인 상동교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상동청년학원의 설립에 참여했으며 초대 교장으로 일했다. 그 해 12월 일제의 강제병합이 분명해지자 민영환ㆍ한규철 등과 함께 밀사로 미국에 건너가 미 정부에 한국 침략 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이후 계속 머물면서 조지 워싱턴대학ㆍ하버드 대학원 등에서 수학, 1910년 10월 프린스턴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직후 한국YMCA에서 한국의 청년조직과 교육을 겸하는 복음전도자의 직책을 맡아달라는 청탁에 따라 귀국한 그는 곧 학생부 간사로 임명되었고, 1911년부터 YMCA학관 교장으로 취임ㆍ활동하던 중,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윤치호 등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투옥되자 1912년 5월경 미감리회 총회에 참석한다는 구실로 출국했다.

1913년부터 하와이에서 박용만과 함께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7년 호놀룰루에 기독학원을 설립하였고 이듬해 7월에는 한인기독교회도 설립하였으며, 그 해 12월에는 재미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와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나, 대통령제를 주장하며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해 8월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활동에 주력하였으나 미국 관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임시정부의 반대에 봉착하였다. 1920년 상해로 건너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임시정부 내부 무단파(武斷派)의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그 후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 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의 대립으로 해외독립운동 노선에 분열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재혼하였고 1945년 10월 귀국, 우익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ㆍ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하였다.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하고 이 과정에서 김구와 결별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ㆍ공포하고,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 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해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한 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의 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ㆍ통과시켜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전국적으로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지내다가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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