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홍순탁(洪淳倬, 1878. 9. 28~1947.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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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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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오암(梧岩)

1878년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오암촌에서 홍종만의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장성하여 한문서당 훈장을 하였다. 1900년 황해도 연안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던 미감리회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1년 해주읍으로 이주 후 해주읍교회(후의 남본정교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1903년부터 미감리회 선교사 크리체트(C. Critchett)와 함께 해주서지방 순회전도에 종사하였고, 1906년 백천(白川)교회로 전임되었고, 191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제1회) 이듬해(1912) 3월 10일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무렵 그는 백천의 창동(彰東)학교 교장직도 맡아 수행하였다. 1913년 다시 해주읍교회로 부임하여 교회당을 신축하였으며 1916년 서울 상동교회에 부임, 상동교회 안에 있는 공옥(攻玉)학교 교장도 겸임하였다. 그 후 1918년 서강교회로 옮겼고 의법(懿法)학교 교장도 겸임하다가 1919년 동대문교회로 옮겼다. 흥인배재(興仁培材)학교 교장을 겸임하였으며 3.1운동에 참여했으나 장기투옥을 면하게 되어 재감자 가족 구호를 위해 수고하였다. 1924년 두 번째로 상동교회에 부임하여 5년간 시무하였는데 이 무렵 미감리회 조선연회 대표로 감리교 협성신학교 이사로 활약하였으며 신학교 강사로 요한계시록을 강의하였다. 1929년 인천 내리교회에 부임하면서 인천지방 감리사로 임명되어 인천지방 교회를 관할하였으며 1931년 5월 인천지방 주최로 홍순탁 목사 교역 25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그 해 홍천읍교회에 부임하여 홍천지방 감리사로 활약했으며 1933년 영변지방 신창교회와 일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다. 이후 1935년 해주 남욱정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였고 1941년 강원도 철원교회를 담임하였다. 1943년 서울 청파교회에 부임하여 일제 말기 어려운 형편 속에서 목회에 전념했다. 이곳에서 해방을 맞은 후 1946년 상동교회에 세 번째로 부임하여 일제 말기에 \"황도문화관\"으로 사용되던 예배당을 복구하여 교회 재건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폐쇄되었던 공옥학교도 다시 복구시켰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회 및 교회 재건을 위해 헌신하던 중 과로로 쓰러져 1947년 3월 15일 별세하였다. 장례는 상동교회장으로 치렀고 유해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에 안장되었다.

상동교회에서 그는 깊은 은혜의 체험을 중시하여 \"죄의 회개와 간증\"을 많이 강조하였다. 동시에 성서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으며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그의 이러한 실력이 인정받아 충정로에 있던 여자 협성신학교에 출강하면서 성서를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전국적인 부흥강사로 초빙되어 은혜를 끼쳤다.

한번은 개성에 있는 호수돈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집회를 인도하였다. 홍 목사는 학생들과 교원들에게 많은 감동을 전해 주었고 이때 이 학교의 모윤숙이 예수의 가야바 뜰에서의 재판광경에 큰 감명을 받고 후에 글로 표현하게 되었으며 \"가야바의 뜰\"이라는 성가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예수행적도\"라는 성화를 직접 만들어서 그 성화를 보여주면서 설교하는 \"시청각 부흥사\"였다.

1921년 발표한 논문 \"실용신학\"에서 그는 심오한 신학사상을 펼치는 것보다 실용적인 측면 실천신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는 신학자요 기독의 사명을 받은 자\"로 밝히며 \"전도는 신력을 힘입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 때문에 제1과를 전도, 제2과는 전도인의 명칭, 제3과 전도인과 사경의 관계, 제4과 강도예비의 주의견, 제5과 강도법, 제6과 음성 쓰는 법, 제7과 언용편, 제8과 태도와 동작을 다루고 있다.

그는 전국 순회 부흥전도사로서 요청을 받고 열심을 다하였으며 연합집회, 기독교 계통 학교 집회, 사경회 등 때를 얻는 대로 전도하기를 힘썼다.

-논문:\"강도법\", 〈기독신보〉, 1917. 4. 18, 1917. 5. 9;\"실용신학\", 〈신학세계〉, 1921. 11;\"각개 부흥에 잇다\", 〈기독신보〉, 1930. 2. 19;\"개혁은 성신충만한데로\", 〈기독신보〉, 1932. 1. 6.

-저서:《간이선한문 신약전서》,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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