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현순(玄楯, 1878. 3. 21~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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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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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일명 송원상(중국에서 쓰던 이름)

중인 출신의 아버지 현제창과 평양조씨 어머니 사이에서 경기도 양주부 석적면 황동에서 출생하였다. 위로 누나 성완이 있었는데 1881년 둘 다 천연두에 걸렸으나 누나는 죽고 현순은 살았으며 1881년 서울로 이주했다. 1892년 현순은 사촌인 현은과 함께 이명선(李明善)에게 맹자를 비롯, 정치ㆍ경제ㆍ윤리 등을 배웠다. 현순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한학에 뜻이 없었다. 현은을 통해 국제 관계에 눈을 뜬 후 일본에 가려 했으나 할머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의병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때 다시 일본 승려를 만나 일본에 가려고 하였으나 아버지가 보낸 \"윤\"씨에 의해 끌려왔다. 1897년 현순은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교장 허치슨(Hutchison)의 고압적인 태도에 반발하다가 1898년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러던 중 그 해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현제창도 같이 연행되었고 현순은 이에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 후 1899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망과 아버지의 투옥이라는 소식을 듣고 1901년 귀국하였다.

현순이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서울에서 윤치호의 연설을 듣고 후에 일본에서 1901년 심의성이라는 친구가 하숙집으로 찾아와 전도하면서 시작되었다. 귀국 후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에 취직하여 하와이행을 결심하고 1903년 7월 미국 이민단의 일행으로 하와이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감리교 목사 피어슨(Pearson)의 지도를 받으며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설립(1903)에 참여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배재학당에서 영어, 수학 등을 가르치는 한편 미감리회 조선선교연회에 정식 입회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1908년 해리스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정동제일교회 부목사로 최병헌 목사와 함께 시무하였다. 1909년 서울 서부지역을 담당하는 전도목사가 되었고 191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제1회) 그 해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또한 그 해 재한복음주의선교회공의회 안에 주일학교위원회가 구성될 때 미감리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주일학교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1912년 상동교회에 부목사로 부임하여 전덕기 목사를 돕기도 했으며 1913년 미감리회 조선연회 주일학교 총무로 취임했다. 1914년 최병헌 목사 후임으로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년간 봉직하였는데 이 기간 중에 전도사 김종우와 함께 4개월간 남산에서 새벽기도를 하였고 성령강림 체험을 하였으며 교회도 크게 부흥하였다. 그러나 1915년 주일학교 사업이 중단된 상태여서 그는 다시 주일학교 총무로 부임하여 1919년 상해로 망명하기까지 주일학교운동에 헌신하였다. 1916년 안경록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강릉교회를 방문하여 주일학교를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로 교회가 없는 곳에 불신자 아이들을 위한 주일학교가 조직되고 8명의 일꾼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조선예수교감-장연합공의회에 미감리회 대표로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는 3.1운동 후의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 인물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2월 20일경 함태영ㆍ안세환ㆍ오상근 등과 함께 함태영의 집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고 21일 밤에는 이갑성의 집에서 이승훈ㆍ박희도ㆍ오기선ㆍ오화영ㆍ신홍식ㆍ함태영ㆍ안세환ㆍ김세환 등과 함께 기독교 측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데 참여했다. 이날 회의에서 그는 특별히 상해주재원이란 직책을 받게 되었다. 곧 상해에 미리 가 있으면서 국제정세와 파리강화회의에 관한 정보를 국내에 전하는 한편 독립청원서를 미국 대통령과 강화회의 대표에게 보내는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그는 이갑성과 연락을 취하기로 하고 2월 23일 상해로 출발하여 프랑스조계 부창로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국내와 동시에 만세시위를 벌일 계획을 짜면서 국내의 거사를 10일 늦춰 달라는 전문을 암호로 보냈으나 국내 사정으로 거사는 계획대로 3월 1일에 이루어졌다. 그는 국내의 3.1운동소식을 미주지역에 제일 먼저 알린 인물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안창호에게 전문을 보내(3월 9일 접수) 국내의 만세운동 소식을 알렸고 김지환을 통해 만주 안동에 상해YMCA 질레트(Gillett, 길례태) 총무 앞으로 우편배달된 독립선언서와 미국 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문서초안을 받아 이를 파리에 보냈다. 이와 같이 3.1운동 직후 국내를 탈출하여 상해로 몰려드는 민족 운동가들을 규합하여 임시정부 수립하는 일에 주동인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즉 신한청년당의 서병호ㆍ여운형ㆍ선우혁ㆍ이광수 등이 상해에 온 3월 하순경부터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하여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그는 총무로 활약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상해로 온 김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조완구ㆍ조성환ㆍ김성삼ㆍ조영진ㆍ조용은ㆍ윤현진ㆍ신익희ㆍ신석우ㆍ조동호ㆍ김철ㆍ신채호ㆍ한진교 등을 규합, 4월 10일 역사적인 제1차 임시의정원회의가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그는 외무차장으로 선출되었다(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 임시정부 조직에서는 평정원으로 임명되었다). 4월 23일 열린 제2차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외무부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법 심사의원으로 선임되어 임시의정원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8월 5일 의원제가 폐지되고 차장제가 도입되면서 그는 내무차장에 임명되어 임시정부 수립의 실질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상해 외에 러시아에 이동휘가 이끄는 또 다른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와 러시아령 임시정부의 통합 문제를 해결키 위해 그는 김성겸과 함께 러시아령에 파견되었다. 이동휘와는 미리부터 아는 사이라 두 기관은 쉽게 통합될 수 있어 9월 17일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만주ㆍ러시아를 수차 왕래하며 흩어져 있던 민족운동 단체를 하나의 힘으로 규합하는 데 노력하며 \"대한적십자회\" 창설에도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20년 안현경과 함께 프랑스를 거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부장 서리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 연락업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임시정부는 운동노선의 차이로 파벌싸움이 계속되었고 독립운동의 효과적인 추진이 어려워지자 1922년 7월 안창호ㆍ김덕진ㆍ최일ㆍ신익희ㆍ손정도ㆍ도인권ㆍ이유필ㆍ옥관빈ㆍ여운형ㆍ노백린ㆍ장붕ㆍ이시영ㆍ조소앙ㆍ김철ㆍ김인전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 흩어진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의 규합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계속 분열과 갈등이 깊어갔다. 이에 그는 하와이에 머물면서 한인교회 목회에 전념하였다. 192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26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캘리포니아연회로 이명하였고 이후 하와이의 리휘교회를 담임하면서 교민들을 지도하였다. 1931년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하와이 교민들을 규합해 \"단합회\"(1939년 하와이 애국단에 흡수됨)를 조직할 때 주동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37년 임시정부에 의해 하와이 선유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했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논문:\"쥬일학교를 발전할 방법\", 〈그리스도회보〉, 1913. 8. 25~9. 5;\"감상잡화\", 〈기독신보〉, 1916. 3. 8;\"음주의 해\", 〈기독신보〉, 1916. 6. 7;\"검암\", 〈신학세계〉, 1919. 3.

-저서:《포와유람기》, 1909;MY AUTO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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