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최용신(崔容信, 1909. 8. 12∼1935. 1. 23)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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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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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운동가

최용신은 절망적인 한국 상황을 새롭게 바꾸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민족에 대한 헌신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외면하지 않고 빛과 소금으로 역할하였다.

최용신은 1909년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최창희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고향의 두남학교를 다니다가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던 루씨여자학교로 1918년 전학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학업뿐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 뛰어난 학생이었다. 성서시험에서는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만점을 받았던 그는 1928년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했다(이 학교는 협성신학교와 2년간의 실험 교육을 거쳐 1931년에 감리교신학교로 통합되었다). 그가 신학교를 찾은 것은 당시 고통당하는 우리 민중, 그 중에서도 농촌 여성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의지는 그가 루씨여학교를 졸업할 때 쓴 글에서 확인된다.

"예로부터 우리 조선 여성들은 5천 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사회의 대세는 고사하고 자기들의 개성조차 망각하고 말았다. 이로 보아 남녀 양성으로 이루어진 이 사회가 남성만의 활동과 노력만으로써 원만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 농촌 여성의 향상은 우리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중등 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 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퇴치에 노력하여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최용신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일제의 민족 경제 수탈로 농촌 현실이 황폐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 등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한국 농민의 대부분은 절대 빈곤의 상태에 빠졌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한국 인구의 80%가 농민이며, 그 가운데 80%가 소작인이고, 다시 그 가운데 80%가 문맹이며 고리대금업자의 노예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농민"농촌 문제는 1920년대 한국 최대의 현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교회도 이에 대처하기 위해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최용신이 농촌운동의 꿈을 키우고 있던 때 마침 황애덕(황에스더)이 협성여자신학교에 교수로 부임해 왔다. 그는 송죽회, 2ㆍ8독립선언, 3.1운동, 애국부인회 등에 참여했던 민족운동가일 뿐 아니라 미국에서 농촌사업 교육 과정도 이수한 농촌 문제 전문가였다. 그는 신학교에 부임하자마자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신설하고 농촌운동을 이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때 그에게서 교육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최용신이다.

황애덕에게서 농촌운동에 관한 이론을 배운 최용신은 1929년 여름방학 때 김노득과 함께 황해도 수안군에 가서 실제적인 경험을 쌓게 되었다. 그곳은 교회도 학교도 없는 외진 두메산골이었는데, 이들은 3개월을 지내면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계몽활동을 벌였다. 이후 김노득은 학업을 포기하고 수안으로 내려가 해방되기까지 16년간을 수안지방에서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건강이 좋지 않던 최용신은 김노득과의 동행을 포기하고 학업을 계속한 후 1930년 여름방학 때 경북 포항에서 다시 경험을 쌓은 후 김노득처럼 학업을 포기하고 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리(샘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YWCA는 1928년부터 농촌운동을 본격화하였다. YWCA는 농민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하여 협동 조직, 보건 위생 및 농업 개량을 위한 과학 지식의 보급을 꾀하는 한편 부업지도와 의식주 생활의 개선, 문맹퇴치와 악습폐지 등의 주요 과제를 실천하려 하였다. 또 마을 속으로 직접 들어가 농촌의 기독교화를 꾀하기 위해 적합한 농촌 센터를 설치하여 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샘골이 그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그 활동을 위해 최용신이 교사로 파견된 것이었다. YWCA의 재정적 후원을 받은 최용신은 1929년 YWCA 제7회 총회에 협성YWCA 대표로 참석하여 이미 YWCA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최용신은 샘골에서 예배당을 빌려 어린이들을 상대로 교육사업을 실시했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재봉ㆍ수예 등 여성 부업 장려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및 주민들의 비협조로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에는 이를 극복하였다. 1932년 5월 정식으로 강습소 인가를 얻었고, 8월에 천곡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그곳 유지와 YWCA 보조로 학원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33년 1월 15일에는 낙성식을 거행하여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이는 본격적인 학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농민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열고 교회를 중심으로 성경공부 및 부인강습회도 가졌다. 농촌에서 생활하며 사심 없이 헌신하는 그의 열성에 감복하여 샘골 사람들은 그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고 교회 출석도 하게 되어 교회와 지역사회의 관계가 긴밀해졌다.

자신의 사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최용신은 새로운 농촌운동의 전개를 위해 1934년 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석달 만에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했다. 병든 몸으로 귀국하여 샘골에 정착하고 요양한 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이 겹쳐 1935년 1월 23일 별세하고 말았다. 그의 유언은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 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였다.

최용신은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정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35년 다른 모습으로 부활했다. 곧 \"그날이 오면\"의 작가 심훈(沈熏)의 \"상록수\"란 제목의 소설에서 \"채영신\"으로 최용신을 부활시킨 것이다. 영화의 제작은 일제의 방해로 미루어지다가 해방 후 이루어졌다. 1974년 11월 29일에는 천곡교회에 그의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또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1964년 "용신봉사상"을 제정하여, 그의 뜻을 이어받아 지역사회를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여성을 선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지금 여러분에게 바친 채양의 육체는 흙 보탬을 하려고 떠나갑니다. 그러나 이분이 끼쳐준 위대한 정신은 여러분의 머리 속에 살아 있을 것입니다. 저 아이들의 조그만 골수에도 그 정신이 박혔을 겝니다."(심훈의 《상록수》 중에서)

-논문:"농민의 하소연", 〈女論〉, 1934. 10.

-참고문헌:유달영, 《최용신소전》, 성서조선사, 1939;홍석창, 《농촌운동의 선구자 최용신 양의 신앙과 사업》, 세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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