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채핀(Anna Bair Chaffin, 1883. 9. 26∼197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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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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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리회 여선교사. 한국명 채부인(蔡富仁)

미국 아이오와 주 매닝에서 출생. 1901년 라도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1906년 아이오와 주립대학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였고, 1907년 워싱턴의 존플레처대학 피아노과에 입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그 해 6월 채핀(Victor D. Chaffin)과 결혼하였고 1912년 딸 모텔을 낳았다. 1913년 남편과 딸, 동생 베어(B.R. Bair, 裵義禮)와 함께 미감리회 선교사로 파송받아 내한하였다. 1916년 6월 북장로회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하던 남편이 갑자기 별세한 후 그는 미감리회 여선교회에 청원하여 그 해 9월부터 앨벗슨(Millie. M. Albertson)을 도와 \"부인성경학원\" 교사로 활동하였다.

1890년대 여성전도에 힘쓸 전도부인 양성의 필요성으로 설립된 \"부인성경학원\"의 교사로 활동하던 채핀은 부인성경학원에 신학 지원자들이 늘어나면서 교사(校舍)가 비좁게 되자 1917년 봄, 서대문 밖 죽첨정(충정로 3가 8번지)에 독자적인 건물을 마련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1918년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간호하기 위해 귀국했던 앨벗슨이 병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그 해 12월 별세함에 따라 채핀은 부인성경학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1919~1920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그는 뉴욕성서학원에서 신학을 수학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여성 신학교육에 착수하였다. 1920년 봄, 남.북감리교회 여선교회가 연합 여자신학교를 운영하기로 합의한 결과, 그 해 11월 부인성경학원의 명칭을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Union Methodist Woman\'s Bible School)로 바꾸게 되었고, 채핀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1927년 다시 귀국하여 뉴욕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종교교육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되면서 12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가 열릴 때 미감리회 여선교회 대표로 총회특선위원 자격으로 총회 창립에 일조하기도 한 그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가 조직된 이듬해인 1931년 6월 14일 개성북부교회에서 그의 동생 등 13명의 여선교사들과 함께 양주삼 총리사의 집례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 감리교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여자 목사를 배출한 것이었다.

그는 1931년 12월 죽첨정에 자리잡은 협성여자신학교가 냉천골 언덕에 있던 협성신학교와 통합되어 \"감리교신학교\"(The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가 됨에 따라 남녀공학이 된 감리교신학교의 부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한국 감리교 여성 신학교육에 헌신한 그는 여성 교육자로서 여성에 대한 성서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감리교신학교에서 발행하던 〈신학세계〉(神學世界)에 실린 그의 논문을 통해 여성신학 수립의 기초적 단계를 확인할 수 있다. ① 여성에 대한 기독(基督)의 태도 (제16권 4~5호, 1931. 8~10), ② 여성에 대한 예수의 책망 (제17권 4~5호, 1932. 7~9), ③ 예수께서 여자를 변호하심 (제17권 3호, 1932. 7), ④ 예수와 버림당한 여성들 (제17권 6호, 1932. 11), ⑤ 예수께서 보신 여자의 지능(知能)과 영능(靈能) (제17권 1ㆍ2호, 1932. 3). 이 다섯 편의 논문들은 신약성서,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에 대한 기사들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여성관(女性觀)을 정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채핀은 이 논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여성관이 남성 중심의 편협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남녀 동등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려 하였다. 그가 말하는 여성의 동등권 확보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됨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1935년 안식년으로 귀국했던 채핀은 1936년 만주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1937년 4월 16일 만주신학교를 설립 개교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만주선교연회 교역자 양성사업의 책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는 1938년 1월 만주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돌아와 수원 및 천안지방 여선교회 사업 및 사회복지사업을 관장하였다. 그가 천안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그의 친동생 베어 목사 때문인데, 베어 목사는 1934년 천안지방 전도사업에 헌신하다가 쓰러져 1938년 3월 10일 뇌암으로 별세하였다.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해방 후인 1946년 크리스마스 무렵 다시 한국에 들어와 여선교회 사업을 재개하였다. 1948년 7월, 당시 여선교사들의 파송 현황에 의하면 그는 감리교신학교와 대전ㆍ천안ㆍ경남(京南)지방 선교를 담당했었다.

또한 1948년 7월 12일, 채핀 선교사의 한국 선교 35주년 기념과 회갑을 준비하기 위한 모임이 감리교신학교에서 열렸는데, 그는 \"자신의 일생 사업이 여전도사를 양성하는 데 있었으므로 주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일해온 은퇴 여전도사로서 무의무탁한 여전도사들의 안식처를 설립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는 뜻을 밝힘으로 발기위원회는 기념사업으로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안식관 설립을 결정했다. 이에 안식관 설립을 위해 채핀은 30만 환을 기부했다. 그 해 10월 5일 안식관 건물에서 \"채부인 선교기념 여전도인 안식관\" 개관예배가 쿠퍼(K. Cooper)의 사회로 거행되었고, 채핀은 6.25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안식관 사업이 1954년 본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운영을 지속적으로 도왔다.

그는 1952년 8월 은퇴한 후 3년간 감리교해외구제위원회(MCOR) 사업국장으로 봉직하였으며,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이화유지재단인 유하(有夏)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워싱턴, 파사데나 등지에서 지내다가 1977년 6월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남편과 나란히 묻혀 있다.

-저서:〈유년선교회 공과〉, 감리교신학교, 1935

-논문:\"女性에 對한 基督의 態度\", 〈神學世界〉, 1931. 8~10(제16권 4~5호);\"女性에 對한 예수의 責望\", 〈神學世界〉, 1932. 7~9(제17권 4~5호);\"예수께서 여자를 변호하심\", 〈神學世界〉, 1932. 7(제17권 3호);\"예수와 버림當한 女性들\", 〈神學世界〉, 1932. 11(제17권 6호);\"예수께서 보신 여자의 知能과 靈能\", 〈神學世界〉, 1932. 3(제17권 1\"2호);\"公衆禮拜의 原理\", 〈神學世界〉, 1934. 5(제19권 3호);\"기도의 현실화\", 〈神學世界〉, 1934. 7(제19권 4호);\"基督敎 公衆禮拜\", 〈神學世界〉, 1933. 5(제18권 3호);\"聖歌學 講話\", 〈神學世界〉, 1933. 1(제18권 1호);\"유태인과 팔레스틴\", 〈神學世界〉, 1934. 11(제19권 6호);\"유태인의 시온運動\", 〈神學世界〉, 1935. 3(제20권 2호);\"通俗 基督敎神學 講座\", 〈神學世界〉, 1933. 11(제18권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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