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주룰루(1879. 4. 24~1960. 9. 3)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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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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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
전도부인

경기도 개성군 화장산 아래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황해도 해주에 있는 외할머니 집으로 갔다. 주룰루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이별의 경험으로 시작된다. 외할머니는 무당이었다. 집 떠난 네 살짜리 소녀의 첫 경험은 얼룩얼룩한 신장 그림으로 둘러싸인 방안에서 베풀어지는 무당 푸닥거리 구경이었다.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예전보다 더 어려운 형편이었다. 아버지가 온다 간다 소식 없이 집을 나간 후 생사조차 모른 채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편의 가출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횡설수설하더니 무당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노력하여 한글공부를 해 열흘 만에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이 터졌다. 어린 소녀 포기(그때 이름은 포기였다)네도 난리를 피해 산 속으로 도피했다. 어수선한 세상 때문에 결혼을 서둘러 농사꾼 김기섭과 결혼하였는데 역시 빈궁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시집은 시부모뿐 아니라 시집 큰아버지도 함께 살았다.

1901년 어느 날, 주룰루는 우연히 한 부인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예수 믿는 부인이었다. 부인의 태도에 마음이 끌린 주룰루는 먼저 해주읍에 사는 외할머니를 전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뜻밖에도 외할머니는 그 전도부인의 전도를 받고 흔쾌히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굿할 때 쓰던 물건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어머니는 조금 오래 끌다가 3년 후에 역시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 역시 예수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집식구들의 구박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그러던 1901년 6월 24일 밤, 그의 나이 스물 넷이었을 때,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여 굿을 해보았지만 나을 병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때 친정에서 외할머니가 찾아와 \"귀신 쫓는 도\"가 있다며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린 후에 돌아갔는데 아픈 기색이 사라졌다.

하루는 다섯 살 된 아들을 앞세우고 친정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20리 길을 자꾸 따라왔다. 무서운 마음에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던 주룰루는 그만 그 일로 미친 사람이 되었다. 남편뿐 아니라 시집식구들 모두들 \"미친 여자\" 주룰루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한 집안에 혼자 남게 되었는데 선반 위에 있는 종이 뭉치를 읽어보고는 \"예수는 구주\"라는 마음이 생겼고 옆에 놓여 있던 물로 귀신 쫓는다고 맞았던 상처에 바르니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낫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보름 동안 경 읽기와 복숭아나무 가지 매질로 고치지 못했던 병, 그 이전에 친정에서 교인들조차 고치지 못했던 병이 순식간에 낫게 된 것이다. 선반에 있던 천주교에서 쓰이는 성호경(聖號經)과 성수(聖水)는 사실 시어머니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시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늘 마귀와 싸우는 사람이었으므로 어느 때든지 성교를 믿든지 예수를 믿어야 할 줄 알았다. 그 물도 일찍이 내가 너를 위하여 하나님의 물을 대신하여 성호경과 전도지와 함께 가져다 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1905년 8월 1일, 이날은 그가 어머니를 따라 맑은 정신으로 해주읍교회로 간 첫날이었다. 얼마 전까지 예배당에서 미친 짓 하던 여인이 건강하게 되어 예배에 참석하니 해주읍교회에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 해 12월에 크리체트(C. Critchett, 구원복) 목사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룰루\"(Lulu)란 세례명도 함께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옛 이름 \"포기\" 대신 \"룰루\"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해주읍에는 1893년부터 제물포에 있던 존스(G.H. Jones, 趙元時) 선교사가 김기범, 김창식 등의 전도인들을 파송하여 전도케 함으로 교인들이 생겨났는데 이 무렵 주룰루와 그의 친정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해주읍 교인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주읍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남편의 박해와 매로 인하여 기절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 마침내 남편이 그를 쫓아내자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친정으로 돌아가 교회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힐만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 해주 의정학교에 나가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또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사경회에도 빠짐없이 출석했고, 노블 부인의 주선으로 사범과까지 졸업했다.

1907년 2월에는 남편이 어딘가 갔다가 병자가 되어 돌아왔는데, 약으로도 낫지 않았다. 그때부터 집안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주룰루를 비난하고 나섰으나 정작 남편은 병중에서도, \"내가 너무도 당신을 학대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은 까닭에 몸이 이같이 아픈 모양이니 나도 오늘부터 예수를 믿겠소. 근처에 예수 믿는 이들을 청하여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찬송해 주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알고 있는 성경이야기며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었고 친정어머니도 와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해주읍교회를 다녀온 후 닷새 만에 평온한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이 죽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구박이 심했지만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후 그 해(1907) 가을, 힐만 선교사가 그를 불러서 전도부인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강녕에서 4년 동안 일한 결과 17개 교회가 개척되기도 하였으며, 배천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시집의 시어머니와 구박하던 동서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1918년에는 연안으로 파송받아 갔는데 그 이듬해 3.1운동을 겪게 된다.

당시 해주읍교회에서는 최성모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추진하던 인물이다. 또한 또다른 33인 중 1인인 박희도는 당시 서울YMCA 간사로 학생 동원과 지방 연락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박희도는 주룰루의 조카 사위였다. 이런 관계로 해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고 있던 주룰루의 외아들 명신은 서울과 해주 사이의 만세운동 연락 책임을 맡게 되었다. 즉 그는 서울에서 최성모ㆍ박희도가 주는 독립선언서 3백여 장을 해주 서문밖교회의 오현경 목사에게 전달하였다. 오현경ㆍ박계화 목사는 해주읍 교인ㆍ학생들을 동원하여 3월 1일 해주읍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해주 만세운동이 있은 후 최성모ㆍ박희도 등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명신도 체포되었다. 명신은 출옥 후 박계화 목사의 딸 경신과 결혼하였으며, 3.1운동으로 중단됐던 학업을 계속해 1926년에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1960년에는 배화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김명신에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서울음대 1회 졸업생인 김정옥이다. 그녀는 남감리교 최초의 교인 윤치호의 손자 윤승구와 결혼하였다.

이처럼 아들이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옥고를 치르고 나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 데는 어머니의 꺾이지 않는 신앙 때문이었다. 자녀의 성공을 바라보며 어머니 주룰루는 고난중에 살아온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결혼 후에도 해주읍 남본정교회 전도사로 해방되기까지 시무하였다. 1933년 시어머니가 별세했을 때 장례식을 교회장으로 하였으니, 그것은 주룰루 신앙의 또 다른 승리의 모습이었다. 구박하던 시어머니는 결국 며느리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마지막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해방 후에는 서울로 이사와서 이북에서 월남해 온 교인들이 많이 나오는 일신교회에 출석하였고, 노구에도 속회를 인도하면서 가족과 나라를 위한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는 1960년 9월 3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배고픔의 설움을 겪었고, \"무당집 딸\"로 손가락질 받았으며 원치 않던 결혼으로 불행한 시집살이 끝에 결국 미친 여인이 되어 버림받았지만, 변화되어 학교 선생이 되고 전도부인이 되어 교회를 세우는 놀라운 전도 결과를 일으켜 세웠던 \"하나님의 인정받는 일꾼\"이 된 것은 그의 표현대로 \"내 생활의 피난처\"되는 예수 때문이었다.

-논문:\"예수는 내 생활의 피란처\", 《승리의 생활》, 조선예수교서회,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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