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조신성(趙信聖, 1867. 10. 3~195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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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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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성(趙信聖, 1867. 10. 3~1953. 5. 5)
민족운동가

조신성은 1867년 평북 의주에서 조춘택(趙春澤)의 무남독녀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여유 있는 집안 형편 덕에 독선생을 두고 한문을 배웠으나 오래지 않아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고 중이 되어 산 속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불우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16세 때 조선풍습에 따라 출가하였으나 3년이 못되어 남편이 죽었고, 비인간적인 시집 식구들의 학대를 참지 못하고 가출하였다.
이 같은 좌절과 불우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에의 개종이 이루어졌다. 구전에 의하면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고, 역시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의 길이 열려 시모노세키의 바이꼬(梅光)여학교와 요코하마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했다.
그녀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곧 이화학당 총교사로 취임하여 한글을 가르치면서 민족정신을 주입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06년 여메례(余袂禮)가 서울에서 황실의 후원을 얻어 진명여학교를 설립하자, 그도 평양에 이와 유사한 민족주의 여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1908년경 여메례의 후원으로 마침내 평양의 기존 애국여학교(1906년 3월 설립)를 인수하고 진명여학교로 개칭하여, 민족운동단체인 신민회가 1907년에 설립한 대성(大成)학교의 자매학교로 키워나갔다.
이때부터 조신성의 삶은 민족운동가 안창호에 접목되어 보다 확고한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애국 여성󰡑이 되었다. 진명여학교 교사로는 대성학교의 민족주의 교사들을 강단에 세웠으며, 자신은 교장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었다.
친히 돌을 머리에 이고 날라 학교 담을 쌓으며 정성 들여 가꾸던 학교는 합방 이후 일제의 잔악한 방해공작에 부딪혀 1913년 대성학교가 폐쇄된 후 오래지 않아 결국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 그는 대동강 부근 농촌 교회에 전도사로 나가 전도사업에 종사하면서 여성계몽운동을 벌이며 제2의 투쟁을 준비하였다.
3․1운동은 그의 항일투쟁방법을 변화시킨 중대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비폭력․무저항주의로 일관된 만세시위가 일제의 잔혹한 무력탄압 앞에 너무나 힘없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현실을 목격하고, 이에 투쟁방법을 보다 적극적인 것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미 3․1운동 전부터 해외에 나가 있던 김구․안창호 등과 비밀연락을 취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전도사로 시무하던 평남 영원, 덕천, 맹산지방의 교회를 돌아다니며 만세시위를 일으키도록 독려하였고, 군자금을 모금해 상해로 보내기도 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의 투쟁적 항일운동이 시작되었다. 1920년 11월, 만주 유하현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의 영원․덕천․맹산지구 지하조직인 󰡐호굴독립단󰡑 창설에 참여, 폭탄․총으로 무장하고 친일파 유지들에게 경고문․협박장을 발송하는 한편 군자금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1920년 11월 18일, 대한독립단 평남 총무인 김봉규(金琫奎) 장로, 맹산의 독립운동가 안국정(安國鼎) 집사, 맹산 면장 방임주 등과 영원으로 가던 중 일본인 순사 3명의 불심검문을 받아 체포될 위험에 처하게 되자 그 중 무장한 순사를 끌어안고 뒹굴어 두 명의 독립운동가를 도피하게 하였다. 이 사건으로 영원경찰서에 공무집행 방해죄로 구금되어 유치되어 있던 중 그를 감시하던 조선인 순사 나신택, 예준기 두 명을 설득하여 이들로 하여금 호굴독립단에 가입케 하였다.
1921년 10월, 상기 공무집행방해죄로 인한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던 날 호굴독립단 관련사건에 연루된 것이 탄로나 다시 수감되었다. 조신성을 비롯한 19명이 연루되어 재판을 받은 󰡐맹산 선유봉 호랑이굴 독립청년단사건󰡑은 당시 〈동아일보〉에 자세히 보도되었으며, 특히 조신성은 󰡐총참모󰡑인 것이 드러나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는 󰡐대한애국부인회사건󰡑으로 체포된 최매지․박승일․이성수․최영보․안신행 등과 함께 같은 방에서 생활하였다. 이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감방 교회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주일만 되면 변기통 위에 올라서서 창살 밖으로 보이는 장대현교회 종탑을 바라보며 찬송을 불렀다. 만기 출옥 후 한동안은 은둔생활을 하다가 1927년 다시 민족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1927년에 이르러 좌․우익을 망라한 단일민족운동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는데 신간회 자매기구격으로 여성 민족운동가들이 같은 해 5월 27일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하고 지방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조신성은 60의 나이로 평양지회의 회원 확보 및 조직에 나섰고, 자신이 회장이 되어 평양지회를 탄생시켰다. 평양지회 창립기념식에서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강단을 치며 다음과 같은 개회사를 하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가 글쎄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를 요 꼬라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하세 일하세 젊어서 일하세. 늙기 전에 빨리 일하세󰡑 하는 정신과 노력으로 우리 민족이 합심해 나가야 소원이 성취됩니다.󰡓

경향 각지에서는 󰡐애국할머니󰡑로, 일경들로부터는 󰡐불떡󰡑이란 칭호를 들을 만큼 계속적으로 투쟁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근우회는 1928년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신간회와 함께 강제 해산됨으로 그의 민족운동은 또 한번 좌절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흥사단을 후원하며 안창호의 민족운동을 도왔다. 오랜 투옥으로 건강이 악화된 안창호를 위해 송태산장이란 수양소를 건축하여 그의 동지들이 함께 모여 휴양 겸 집회장소로 사용하였는데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수양동우회󰡑를 이루었다. 이 모임은 국내의 일제 말기 마지막 민족항일운동을 주도한 민족운동단체가 되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안창호 이하 동지들이 체포되자 그는 미친 사람 노릇을 하며 숨어 지냈다.
해방 후 신탁통치 문제로 한창 시끄럽던 1945년 11월 27일 󰡐북조선여성동맹위원장󰡑이라는 직책을 제시하는 공산당의 제의를 거부하고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였다. 서울에서는 대한부인회 부총재, 재남 조선민주당 고문 등의 직분을 맡아 해방 후 여성 민족운동의 방향을 잡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신망애양로원에서 마지막 생을 정리하고 1953년 5월 5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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