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전진(田眞, 1912. 12. 27~1996. 7. 23)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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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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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운동가

충남 논산군 양촌면 명암리에서 출생. 아버지 전희균 목사와 어머니 한경택 여사의 7남매 중 장녀였다. 원산 루씨여학교(樓氏女學校, Lucy Cunningham School)의 교목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이주하여 원산 남촌동교회(원산중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전진은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일보다 사람의 마음을 가꾸고 가다듬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영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느끼기 시작했다. 루씨여학교에서는 정규과목으로 성경을 가르쳤고 매년 가을 전국적으로 이름난 부흥사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개최했는데 배은희 목사, 이용도 목사, 김종우 목사 등이 부흥강사로 초빙되어 어린 전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졸업반 때 일본으로 건너가 가사과, 재봉과에 유학하라는 학교의 추천이 있었으나 신학을 공부할 것을 결심하고 이를 거절했다.

1931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재학 시절 이태원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맡아 인도했다. 1936년 협성신학교 졸업 후 충남 논산제일감리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주변의 지교회인 육곡리, 광리, 등리의 세 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하였다. 이 당시 전진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업은 전도업이며,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목회자가 되라는 권면을 하였다. 이후에 육곡교회에서는 서형선 목사, 광리교회에서는 박무길 목사, 등리교회에서는 유흥춘 목사가 배출되었다.

1939년 1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논산을 떠나 원산의 집으로 돌아왔고, 그 해 3월 원산에서 빈아교양원의 실무 책임자로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원산에까지 미쳤고 그로 인해 빈아교양원의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함흥에는 신사참배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1941년 북주동장로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으나 1943년 3월 신사참배 문제로 다시 함흥을 떠나게 되었다.

1943년 5월 정신대 문제를 피하기 위해 상처한 경험이 있는 최광득과 결혼하였고 다음해 아들 최조영이 태어났다. 남편의 방탕한 생활로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으나 오히려 그런 일로 인해 예수를 더욱 의지하게 되었고 이웃을 돕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결혼생활 2년여 만에 남편 최광득은 가출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

해방 전까지 공습을 피해 산 속에서 소개(疏開) 생활을 하던 전진은 해방과 더불어 원산중앙교회 전도사로 복직하였다. 1946년 3월 원산중앙교회에서 유재헌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부흥성회를 개최했다. 성회 기간 중인 3월 11일, 자신과 가족만을 돌아보던 작은 틀에서 벗어나 자신을 못살게 굴고 비난하던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는 등 거듭남의 사건이 일어났다. 회심 사건과 동시에 유재헌 목사 일행이 추진중인 기도원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부흥회에서 모아진 수도원 건립자금을 철원의 윤태현 감리사에게 전달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중간에 검문을 당할 때 인민군에게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창문으로 뛰어내리기까지 하면서 철원으로 향했다. 자신이 일할 수 있는 곳인지 알아보기 위해 대한수도원을 돌아보던 중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동산임을 직감하고, 원산에서 세 살 된 아들을 데리고 1946년 5월 12일 철원으로 돌아와 수도원생활을 시작했고, 1947년 3월에는 군탄교회(현 신철원교회)를 개척하였다.

1950년 6.25 발발 후 피난민들이 수도원으로 몰려오자 이들을 받아들여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전도했다. 1951년 4월 21일 부활주일에 40여 명의 사람들을 인솔해 피난하여 수원수용소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언제까지 수용소에서 생활할 수 없음을 느낀 전진은 유재헌 목사가 세검정에 건립한 임마누엘기도원을 생각해 내고 서울로 가서 폭격으로 부숴진 수도원과 세검정교회를 복구하였고 1951년 9월 파송받지 않은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화신백화점 뒤편 중앙교회의 오후 예배에서 빌링스(P.M. Billings) 선교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도강증(渡江證)을 얻었으며, 수원수용소에 머물러 있던 교인 40여 명을 인솔해 한강을 넘어 서울로 들어왔다. 이후 세검정 임마누엘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과수원 농사를 지었고 직조기로 베를 짜는 등 자립을 하게 되었다.

철원이 휴전선 이남으로 확정된 후 입주가 허락됨에 따라 1956년 수도원 재건작업을 시작하였고 미군들이 철수하게 되었을 때 미 군목이 연장과 농기구를 주고 떠나 농사를 지으며 자립의 길을 열게 되었다. 장흥교회와 군탄교회 교인들의 협조를 받아 각종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1965년 5월 기독교대한수도원 이사회에서 평생 원장에 선임되었다. 주로 서울 회현동에 머물면서 가정제단운동, 기도운동을 확산시켰다. 이 해 여름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성령춤을 시작하였는데 8월 집회부터 본격화되어 고유의 성령운동의 하나로 정착하게 되었다.

1967년 남산 회현동 대화재로 발생한 이재민이 창동으로 이주하자 남대문시장에서 천막을 구입하여 창동으로 달려가 그들을 도우며 창현교회(현 갈리리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임마누엘수도원이 없어진 것을 안타까이 여겨 16년간의 기도와 기금 적립으로 1970년 임마누엘수도원을 다시 재건하고 성전을 건축하였다. 1974년 부친을 기념한 룻교회를 서울 경희대학교 앞에 설립했고, 1981년 2월에는 모친을 기념한 경택교회를 인천에 설립했다.

1978년 캐나다, 미국을 다니며 집회를 인도했다. 1985년 미국, 캐나다를 전도여행하며 한인교회에서 1년 3개월 간 집회를 인도했고 제단설립 및 한인교회 후원 후에 1986년 8월 귀국했다. 이 외에도 1989년까지 여섯 번에 걸친 해외 전도여행을 하였다. 1987년 1월 사명자 집회 후 쓰러져 고려병원에 입원, 1989년 백내장 수술을 받았고, 1990년 12월 다시 입원, 1993년 5월에는 다리 골절로 인해 철원에 있는 길병원에 6개월간 입원하였고, 그 해 11월부터 본래의 사명을 깨닫고 사역을 재개하여 각종 집회에서 설교하였다.

-참고문헌:최조영, 《눈물이 강이 되고 피땀이 옥토 되어》, 기독교대한수도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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