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이준(李儁, 1859. 1. 21~1907.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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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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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본명 순칠(舜七), 초명 성재(性在). 호는 일성(一醒)

함남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 발영동에서 이병관(李秉瓘)과 청주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성재라 했다. 성(性)은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이요, 재(在)는 인간이란 그 하늘의 뜻을 따름에 있다는 뜻이다. 3세 때 부모를 잃은 그는, 젊은 시절 이름을 준으로 고치고 호는 일성이라 했다. 준(儁)은 세상에 널리 빛난다는 뜻이요, 일성(一醒)은 세상을 한번 깨우친다는 뜻이다.

그는 조부 이명섭(李明燮)과 작은아버지 이병하(李秉夏) 밑에서 자라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에 사서삼경에 이르렀다. 17세에는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올라가 대원군을 비롯하여 형조판서 김병시(金炳始) 등과 교제하다 일단 고향 북청으로 귀환했다. 1887년 29세 때 함경도시에 장원한 후 함경감사 조병식(趙秉式)과 협의하여 스스로 2천 평의 토지를 희사,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1889년 다시 상경한 그는, 김병시의 중매로 1893년에 이화학당 출신 이일정(李一貞)과 결혼했다. 그의 나이 35세, 아내 나이 17세로 나이차이가 심했지만, 두 사람 모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에 불타고 있어서 부부라기보다 동지적 결합이라는 것이 타당했다. 아내 일정은 생활이 곤란할 때 잡화상을 차려 생계를 꾸렸고, 국채보상운동 당시 부인들의 반지를 빼서 바치는 탈환회(脫環會), 찬거리 값을 절약하여 내는 감선회(減腺會) 등을 조직ㆍ활동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두시위대에 뛰어들어 구국을 외치기도 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함흥에 있는 순릉참봉의 벼슬을 맡아 하향했다가, 일본이 승리하자 그는 박영효ㆍ서광범 등 개화당 인사의 권유로 상경,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했다.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으나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죄로 1개월 만에 면관(免官)되고 말았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을미사변 이후 조직된 김홍집 등 친일내각 각료들과 교제가 있던 그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 와세다대학 법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였고 마침 그의 체포령이 해제되었다. 이에 귀국하여 다시 독립협회에서 일하는 한편 상동교회 청년회장직을 맡아 힘쓰다가, 독립협회 해산 시 간부 17명과 함께 체포되어 수개월 후 석방되었다.

1902년 민영환ㆍ이동휘ㆍ이상재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했고, 1904년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 침략과 친일 주구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ㆍ대한협동회 등을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했다. 친일파인 일진회와 대항하기 위해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어 친일대신 5명을 성토하다가 체포, 황주 철도(黃州 鐵島)에 6개월 간 유배당했다. 이때 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중에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진실한 신앙에 몰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치생활의 구급피난소로 첫 출발하였으나 여러 신자들과 상종하며, 목사 전덕기와의 관계와 상동예배당 만국청년회의 관계가 인연이 되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다. 이번 유배 가운데서 더욱 예수의 성스러운 희생의 정신인 십자가의 피의 의의를 내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일성의 종교생활의 완전한 출발은 이 불우한 귀양살이 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부터는 많이 공사의 생활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일성 이준 열사》)

1905년 1월 민영환\"이용익(李容翊)의 주선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국민교육회장에 취임하여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세웠고, 서북흥학회를 창설한 후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세워 교육에 힘쓰는 한편, 법안연구회와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고, 그 해 평리원(評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검사가 되어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하다가 미움을 받아 8개월 만에 평리원에 피검, 고종의 특명으로 석방되어 검사에 복직되었으나 법무대신의 완력으로 곧 파면되었다.

또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상동교회에서는 전국감리교회 엡윗청년회 연합회가 소집되어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을 결의하였는데, 이때 상동교회 엡윗회 대표로 참석한 그도 대한문에 나가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해산되고 말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설립하여 소장이 되었으며, 그 해 조직된 항일 결사 신민회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1907년 7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먼저 들은 양기탁은 즉시 상동교회 공옥학교 교감 이회영에게 알렸고, 이회영은 전덕기 목사에게 알렸다. 전덕기는 이회영 이동휘 등 여러 동지들과 이 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보호조약은 일제의 강압이며 결코 한국 황제의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알려 무효화시키기로 합의했다. 특사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정한 후 이 뜻을 은밀히 고종 황제에게 전하였고, 1907년 4월 20일 고종의 신임장을 받았다. 이후 전덕기 목사는 이준에게 신임장을 전달하고 상동교회에서 그를 위해 마지막 기도를 해주었다.

그 해 4월 헤이그로 출발한 그는 도중에 이상설ㆍ이위종과 합류하여 6월 25일 도착,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과 영국 대표의 방해 및 각 국 대표들의 냉담한 태도로 말미암아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이 당시 서울에서 The Korea Review를 발행하며 배일운동을 하던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가 헤이그로 와서 한국 대표를 후원하며 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네덜란드의 신문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고, 이때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세계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한 연설이 세계 각 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이에 비분한 이준은 49세를 일기로 자결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그 동안 헤이그에 묻혀 있던 유해가 1963년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되었다.

-참고문헌:유자후, 《이준 선생전》, 동방문화사, 1948;이선준, 《일성 이준 열사》, 세운문화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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