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이재명(李在明, 1888. 4. 8~1910.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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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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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본명 수길(秀吉)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8세 때 평양 아청리(衙聽里)로 이주하였고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민족운동에 눈을 떴고 1905년 미국노동이민사(美國勞動移民社)의 하와이 이민모집에 응모, 미국에 건너가 하와이 농장에서 노동하다가 1906년 3월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그곳에서 \"한인공립협회\"(회장 안창호) 회원으로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나 이준 열사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재미동포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공동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그는 위국헌신(爲國獻身)을 회의석상에서 천명하며 매국노 숙청을 약속하였고 그 해 10월 9일 동경, 나가사키를 거쳐 \"사이베리아\"호 선편으로 귀국하였다. 이 일을 위해 10월 25일 임치정(林蚩正)도 \"몽골리아\"호 선편으로 귀국하였으나 쉽게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이재명은 만주와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였고 처음에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노렸다. 1909년 1월 그가 순종(純宗)과 함께 평양에 들른다는 정보를 듣고 이때 이토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순종의 안전에 위협을 느낀 안창호의 만류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김병록(金炳祿)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활동하던 중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귀국한 그는 매국노 이완용ㆍ이용구(李容九)ㆍ송병준(宋秉駿)을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그 무렵 국내에서는 일진회 이용구ㆍ송병준 일당이 합방상소를 내고,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데 대한 사죄단을 일본에 보내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일진회장 신 이용구 등 일백만회원은 이천만 신민을 대표하여 대황제폐하에게 상언하나이다. 일한합방을 창성하여 영구히 신성무궁한 덕택을 누리시기 기원하나이다.\"

우리 민족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이 매국문서는 실상 이용구 본인이 쓴 글이 아니라, 그를 배후조종한 일본극우파 단체 흑룡회의 두목 우치다가 시켜 다케다라는 중이 쓴 글이라 한다. 여하간 이 매국선언으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는데, 이 민족의 분노를 이재명이 대변하게 된 것이다.

그는 김정익(金貞益)ㆍ이동수(李東秀)ㆍ조명호(趙明鎬)ㆍ전봉선(全奉善)ㆍ김용문(金龍文)ㆍ김병록ㆍ박태은(朴泰殷)ㆍ김이걸(金履杰)ㆍ이응삼(李應三)ㆍ김동현(金東鉉)ㆍ이연수(李年遂)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이 일을 추진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이 서북지방 출신 기독교인이었다. 그 첫 거사로 이완용 암살을 계획한 이재명은 서울 입정동에 있는 여관 백소사(白召史)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1909년 12월 22일 종현(鍾峴, 현 명동)성당에서 개최하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5일 전 사망) 추도미사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군밤 장수로 변장, 성당 앞에서 군밤을 굽고 있다가 오전 11시 30분경 미사를 마치고 나와 인력거를 타고 막 떠나려는 이완용을 칼로 공격하였다. 마부 박원문(朴元文)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이완용은 복부와 어깨를 세 차례 찔려 중상을 입었다. 그 또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게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는데, 이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모습에 대해 〈황성신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행흉자(該行凶者)의 성명은 이재명이오 거주는 평양이오 연령은 이십이세가량이오 골격은 준수하며 안색은 결백한대 연전에 미국 상항에 왕하야 야소교를 존봉하다가 금년에 귀국한 자이라 하며 순사에게 피척하야 선혈을 류하면서 신문실에 앙와(仰臥)하여 취조를 수하는대 언어가 분명하고 태도가 자약(自若)하며 복장은 배광양복이오 흉기는 회도 이외에도 오연발권총에 장탄한 자가 유하다더라.\"(〈황성신문〉, 1909. 12. 23, 2쪽)

이 사건으로 동지 10명(본래 13명이었으나 3명은 도피하였다)도 함께 체포,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방법원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때 그는 방청석을 향하여 열렬한 언변으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는 연설을 했다. 그날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7월 20일에 열린 2심에서도 역시 사형이 선고되자 이재명은 큰 소리로 \"무리하고 불공평한 형벌로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내 속의 충의혼담(忠義魂膽)만은 빼앗지 못하리라. 내 영혼은 영원히 살아 생전에 이루지 못한 목적을 달성하고야 말리라\"고 하였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그의 부인(吳仁星, 당시 21세, 양심여학교 학생)도 큰 소리로 \"이완용이 생명을 보전하여 살아있는데 사형이 웬 말이냐!\"고 외쳤다.

8월 13일 열린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결국 1910년 9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사형대에 올랐고,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는 집행관의 질문에 평소 부르던 찬송 207장 \"예수씨 거느리시니\"를 부른 후 형을 받았다.

다음은 그의 최후 진술 내용이다

\"내가 땅에 묻히는 날 수백 수천의 이재명이 자라날 것이니 이것은 한 개의 씨앗이 수백 수천의 벼이삭을 낳는 것과 같다. 오늘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너희는 통감부를 철거하고 5조약 7조약을 모두 철회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뒷날 일본은 큰 화를 당할 것이다.\"

한편 운 좋게 살아난 이완용은 이듬해인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서 정부의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고, 그 공으로 일본의 백작이 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조선귀족원 회원이 되었고 1920년 후작에 올라, 1926년에 69세로 죽을 때까지 일제에 충성하며 호의호식했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이재명은 민족의 비운을 가져온 반민족적 요인을 제거하려 한 기독교 무력 저항운동의 한 예로 기억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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