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이만규(李萬珪, 1888. 12. 2~1978)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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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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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학자. 호는 야자

강원도 원성군 간현에서 태어남. 1893년에서 1907년까지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의사가 되려는 꿈을 안고 1907년 4월 상경, 경성 관립 대한의원 부속의학교(경의전문 전신)에 입학하여 1910년 8월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체험하면서 뜻한 바가 있어 같은 해 9월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부임했다. 조국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그는 연정학당과 봉명학교의 교사, 승동남녀학교 명예 교감 등을 겸하면서 활동을 했다.

1911년 5월 의사 개업 면허장을 받고, 1912년 4월 개성에서 고려병원을 개업하면서 이전에 맡았던 교사직들은 모두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을 폐업하고, 1913년 윤치호의 권유로 개성 사립 한영서원에 교사로 부임했다. 일찍이 윤치호가 구국의 꿈을 안고 세운 기독교학교 한영서원은 후에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었는데, 이만규는 여기서 생리ㆍ수학 과목을 담당하는 한편, 학생들에게 은밀히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다. 특히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문을 인쇄 배포했고, 4월경에는 개성지역의 유력자와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려다가 발각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6년 3월 송도고보를 사임한 이만규는 같은 해 4월 1일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고, 종교교회에 출석하였다. 이후 1938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6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겪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1946년 배화를 떠날 때까지 민족주의 입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학과목은 물리, 화학, 습자였으며, 1936년 5월 10년 근속 기념 표창을 받았다. 또한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ㆍ공포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초안 작성위원으로 일했으며, 1936년 조선어학회의 표준말 사정 위원(강원도 대표)으로 활동했다.

한편 그의 기독교 신앙은 매우 돈독했고, 사회적으로 정향된 능동적이고 활발한 신앙생활을 추구했으며, 이런 맥락에서 1930년 12월 2일 설립된 \"기독교조선감리회\"(남.북감리교회 합동)의 조직을 앞두고 남감리회의 특선위원으로 선출되어 \"역사적 선언과 예문분과\"에서 웰치ㆍ양주삼ㆍ홍병선ㆍ김종우 목사와 함께 활동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18일 제9대 배화 교장에 취임한 그는 혼란한 민족상황에서 \"중도 좌파\"의 길을 택했다. 특히 그는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보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사돈지간인 여운형과 함께 좌우익 세력을 총망라한 통일전선의 방향에서 자주적인 민족 통일 국가의 형성을 위해 일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런 방향에서 그는 배화를 이끌어가려는 생각으로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교사들을 채용하였고, 배화는 이른바 중도좌익 계열의 교사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중심으로 한 배화는 당시 우익계의 교육인사들이 주도하던 미군정 문교부의 교육정책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1946년 6월 19일 미군정 문교부가 서울국립종합대학안(좌경성향의 교수를 축출하고자 구상)을 발표하자, 당시 좌익 정당의 교육학적 논리를 수용한 \"조선교육자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던 그는 배화 교사들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신탁통치에 대한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던 1946년 중반 무렵, 극한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 중도 좌익으로서의 설자리를 잃은 그는 배화를 떠나야 했다.

이후 그는 교육 관련 활동을 펼치며 민족 재건운동에 참여하다, 1947년 월북하여 상임위원을 거쳐 문교상에 올랐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입성하였다. 1950년 7월 초 그는 김창준, 박성채, 최문식, 최택, 심명섭 등과 함께 \"기독교민주동맹\"을 조직하고, 인민군환영대회ㆍ신도궐기대회ㆍ교역자 대상의 강연회ㆍ국방헌금 모금ㆍ사상전환을 위한 인민 교육 등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사위인 심명섭 목사를 통해 그 당시 머뭇거리던 상당수의 목사들을 모으고 직접 강연회 연사로 나서기도 했는데, 이때 \"남한의 기독교 목사들이 잘만 협조하면 정부는 신분을 보장하고 보호해 줄 것\"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으며, 1978년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저술한 민족교육사 《조선교육사》I, II(을유문화사, 1947/ 1949)가 있다.

특기할 점은 그의 신앙사상이 \"교리적 선언\"의 내용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YMCA에서 발행하던 〈청년〉(1930. 11)지에 그가 작성한 신조가 실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웰치의 신조와 함께 \"교리적 선언\" 작성에 참고가 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그 신조다.

1. 우주를 창조하신 신을 믿음
2. 신이오 인이오 인류의 구주인 성자를 믿음
3. 신과 인을 한데 매는 힘인 성신을 믿음
4. 성서는 신앙생활의 유일한 표준임
5. 세례와 성찬은 구주가 친행친집한 유일한 성례임
6. 교회는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지상천국을 실현하는 유일한 성단임

한편 그의 신앙 핵심은 \"기독주의\", 곧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며, 이런 맥락에서 그는 기독주의 학교나 교육기관도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즉 \"기독이 당시에 보통 인민이 꿈꾸지 못한 이상을 가지고 순전히 세민(世民)의 구원을 위하여 영예와 술수를 다 버린 것과 같이 그 주의(主義)를 행하는 교회 교육기관도 영화와 영예를 초개같이 알고 빈민 세촌의 직접 지도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야소가 처음으로 전도하시던 상대자들\"이 바로 세민이며, 그들은 곧 \"농민\"과 \"아동\"과 \"여자\"라고 밝혔는데, 이런 맥락에서 그 자신이 배화에서 여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사랑과 평화와 자유의 여성적인 문명을 펼쳐서 세계와 조선을 평화의 시대로 만들 사명이 조선의 여성에게 있다고 강조하면서, 구체적인 여성의 사명으로 \"산아ㆍ교육ㆍ가정미화ㆍ사회봉사\"를 제시했다.

-저서:《조선교육사》 I, 을유문화사, 1947;《조선교육사》 Ⅱ, 을유문화사,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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