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이규갑(李奎甲, 1887. 11. 5~1970. 3. 20)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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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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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호는 운호(雲湖). 자는 원서(元瑞)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에서 아버지 이도희(李道熙)와 어머니 박안나 사이에 2남으로 출생하였다. 이규갑은 충무공의 9대 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사서삼경을 공부하신 분으로 가정에서 자녀들을 잘 가르쳤으며 애국심이 강한 분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부인으로는 처음으로 상소를 올렸고 \"의족을 일으키라\"고 역설함으로 포도대장이 이에 감동되어 고종에게 상소한 일도 있었다. 이규갑이 7세가 되었을 때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아산만 앞바다에서 일어난 전쟁을 목격하였는데 마치 길가에 떨어진 고깃덩이를 놓고 두 마리의 개들이 서로 물고 뜯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고 한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애국정신, 어머니의 충정어린 교훈, 객지에 나가 독립운동에 여념이 없는 형님의 망명생활, 그리고 눈앞에 벌어진 청일전쟁의 비참함 등이 훗날 일생을 목사이면서 독립운동가로 사는 원인이 되었다.

1900년 13세 때 부친을 여의고 가정을 돌보다가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크게 일하려면 시골에만 있으면 안되겠다 생각되어 상경하여,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교육가로만 머물 수는 없었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한일협약을 조인케 하여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자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이규갑은 강단을 뒤로하고 충남 홍주의병에 참가하여 운양관으로 활약하였고, 1909년부터 다시 교육일선에 투신하여 후배양성에 힘쓰던 중 1910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다가 한일합방 특사로 출감되었다. 1911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하운동으로 \"신조선당\"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 와세다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하였다. 귀국 후 공주 영명학교 교감으로 재직하였고, 지하운동에도 참여하는 한편 직산 예성학교를 설립하여 영세한 아동의 교육에 헌신하다가 비밀결사사건으로 일본 헌병에 검속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4년 출옥한 이규갑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이애라(1894~1921)와 결혼하였다. 1917년에는 평양으로 가서 교직에 종사하던 중 신홍식, 길선주, 안세항 등과 함께 독립운동 평양 대표로 선출되어 1919년 2월 상경, 기미년 독립선언 거사 준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해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조직,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었으며 경성독립단 본부 특파원으로 그 해 4월 10일 상해에 밀파되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4월 13일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5월 5일 상해대한민국청년단 서무부장 및 비밀부장을 역임하였다. 그 해 7월 8일 제5회 의정원의회에서 상임위원회 청년위원에 피선되었고 7월 19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재선되어 국채통칙 및 공채발행조례를 통과시키는 등 임정 육성에 진력하였으며 이후로는 러시아 국경지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헌신하였다.

한편 그의 부인 이애라도 평양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가 풀려나와 이규갑의 부탁대로 전북, 충남, 수원 등지에 산재해 있는 여성들로 하여금 지하독립운동 부인회를 조직하도록 돕는 임무를 맡았는데, 전주\"이리\"수원 등지에 그러한 부인회를 조직하고 상경, 아현동으로 향하던 중 일본 헌병에 체포당하면서 백일 된 아이는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투옥되니 아이는 숨지고 말았다. 1921년 석방되어 천안 양대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남편 이규갑을 찾아 30명 가까운 가족과 함께 만주로 향하던 중 함경도 경흥 옹기항에서 다시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 끝에 사경에 이르러 석방되었으나, 남편을 못 만난 채 별세하였다.

1922년 귀국한 이규갑은 미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시작하여, 10여 년 간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에서 목회 및 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5년 이규갑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애국동지 김낙권(金洛權)의 장녀 김애일라와 재혼했다. 김애일라 역시 3.1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1921년 가출옥한 여인이었다.

1926년 귀국하여 안재흥, 조병옥, 홍명희, 허헌 등이 조직한 신간회 경동지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활약하던 중 여러 번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8년부터 1931년까지 돈암ㆍ월곡ㆍ우이동ㆍ창동교회에서 시무했고, 1933년에는 광희문교회, 1935년에는 동부연회에 소속되어 의정부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하였다. 일제 말인 1938년 기독교 탄압으로 검속당해 평양감옥에 수감되는 등 전후 36차례 검거되었다.

8.15와 함께 자유를 찾은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으로 취임하여 건국준비사업을 도왔고, 1946년 4월 5일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친일파감리교회 지도자와 정면으로 대결, 변홍규 등과 감리교회 재건운동에 앞장섰으며,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문교사회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활약하였고, 1952년 순국선열유가족 위원장, 19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1959년 대한기독교반공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63년 5월 동지회 의장 및 민주공화당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국민외교협의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1969년 중앙여자중ㆍ고등학교가 주최한 \"3.1운동 지도자 찬하회\"에서 찬하 및 표창을 받았다. 197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그의 유해는 사회장으로 아산군 영인면 선영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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