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유관순(柳寬順, 1904. 3. 26~1920. 10. 12)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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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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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열사

충남 천안군 목천(木川)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유중권(柳重權)과 이소제(李小悌)의 4남매 중 둘째 딸로 출생. 그의 집안은 지령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 가문이었는데 아버지 유중권은 이 지방에서 가장 먼저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이로, 이 지방에 신교육기관을 설립할 것을 목표로 하고 이정래ㆍ강대형ㆍ이재필ㆍ이춘범ㆍ한우석 등과 함께 흥호(興湖)학교를 세워 신교육에 투신하였으나 일인 고리대금업자의 행패와 학교부채로 실패한 후 구국의 방법과 신념이 기독교에 있음을 자각하고 조인원(趙仁元)\"유빈기(柳斌基)와 더불어 교회당을 중심으로 민중계몽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가정배경에서 자란 유관순은 어릴 때부터 교회학교에서 모범을 나타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교회에 봉사하며 가사를 돌보고 있던 유관순은 당시 공주 및 천안지방 순회 선교사였던 여선교사 샤프(A.H. Sharp, 史愛理施)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였으며 보통과 2년을 수료한 뒤 1918년 고등과 1학년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내외적으로 헌신적이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유관순은 고등과 2학년 초기에 3.1운동을 맞이하였다. 당시 이화학당 내에는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학생 단체 \"이문회\"(以文會)가 있었는데 회원들은 학생 동원을 책임진 박희도의 요청에 따라 3월 1일을 기해 대한문 앞에 나가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프라이 당장과 서양인 교사들이 이를 만류했지만 유관순은 동료들과 같이 이를 뿌리치고 기숙사 뒷담을 넘어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또한 3월 5일 서울지역학생연합시위에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당했으나 곧 석방되었다. 3월 10일, 총독부의 휴교령에 따라 학교가 휴교상태로 들어가자 그는 고향인 목천으로 내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유관순은 고향 교회인 매봉교회 교인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아버지 유중권과 삼촌 유중무, 오빠 유우석, 같은 이화 동창이자 사촌언니인 유예도, 유중권ㆍ유빈기 등과 함께 흥호학교를 세웠던 조인원ㆍ조병호 부자 등이 매봉교회의 주축 교인이자 만세운동을 준비한 지도자들이었다. 유관순은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한밤중에 험준한 산골길을 오르내리며 고향인 지령리 일대와 연기\"청주\"진천까지 왕래하며 동지를 모았다. 만세시위 일자는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오내 장날로 정했으며 그날 천안ㆍ안성ㆍ진천ㆍ청주ㆍ연기ㆍ목천 여섯 고을에서 모여든 3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조인원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유관순의 독립연설이 있은 뒤 시위에 들어갔다. 그날 시위 현장에서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총에 맞아 희생되었다. 유관순도 그날 체포되어 천안헌병대에 송치되었고 다시 공주검사국으로 넘겨졌으며 이곳에서 공주 영명학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온 오빠 유우석을 만나게 되었다.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시위를 죄수들과 함께 벌였다. 이 사건으로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고 결국 병을 얻어 1920년 10월 12일 옥사하였다.

유관순이 옥사한 지 이틀 뒤에 유관순의 죽음을 알게 된 이화학당 당장 프라이와 월터는 일제당국에 시체 인도를 요구하였으며, 몇 토막으로 유린당한 유관순의 시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유관순의 자세한 사적이 이화학당 교사였던 박인덕(朴仁德)에 의해 알려졌으며, 1947년 8월 신봉조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에 의해 유관순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그의 기념비가 곳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단장을 추서하였고, 1966년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지령리에 유관순기념교회를 세우고, 1974년 유관순기념관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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