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웰치(Herbert Welch, 1862. 11. 7~1969. 4. 4)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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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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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리회 감독. 한국명 월치(越就)

웰치는 미국 뉴욕에서 피터 웰치(Peter Welch)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7년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였고, 1890년 드루신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하였다. 그는 미감리회 연회에 허입하고 뉴욕 코네티컷에서 목회를 시작, 1892년 집사목사, 1894년 장로목사가 되어 15년 동안 목회하였다. 1905년 배쉬포드의 뒤를 이어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교 총장으로 취임, 11년간 근속하면서 교육행정가로서 또 교육자로서 수완을 발휘하였다.

1916년 5월 미감리회 감독으로 피선되자 남아메리카와 캘리포니아 주의 감독 초청을 사양하고 미감리회 한국 감독으로 자원하여 그 해에 내한, 한국에 주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신흥우를 미국으로 파견하여 미국 각계와 상원의원들에게 3.1운동의 진상을 알렸으며, 같은 해 6월부터 3개월 간 가우처(John F. Goucher)의 별장에서 영문판 《한국의 갱생》(The Rebirth of Korea)을 집필하여 이듬해 뉴욕에서 출간하도록 했다. 웰치는 1928년까지 한국 및 일본 감독을 역임하였고,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피츠버그연회 감독(1928~1932)을 거쳐 1932년 중국 감독으로 상해에 주재, 1936년 은퇴하였다가 1938년 다시 보스턴연회 감독(1938~1939) 및 감리교 해외구제부 실무위원장(1940~1948)을 역임하였다.

1990년대 초에는 웰치가 친일 선교사였다는 이유로 감리교신학대학교 내에 있는 웰치기념예배당의 철거를 학생들이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 것이 1924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였다. 이에 따르면 당시 한국 감리교 감독이었던 웰치가 미국으로 돌아가던 배 안에서 기자들에게 \"조선인은 독립 사상을 포기하였다.\" \"조선은 점차 안정하여 물질적으로 향상하는 중이오. 지금은 그 전의 평화를 되찾았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식은 국내 언론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에 흥분한 감리교 청년회원들이 웰치에게 항의하였다. 웰치는 곧바로 〈기독신보〉 주필 박동완에게 응답을 보냈는데 자신은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면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의 편지를 실은 〈기독신보〉가 총독부에 의해 \"판금조처\" 당하였다는 점에서 웰치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일본 측 기자가 그의 회견 내용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데서 비롯된 것임이 판명되었다.

한국과 일본 교회 감독이 된 웰치는 여러모로 그 전임자 해리스(W.M. Harris) 감독과 비교되었다. 일본 선교사 12년, 일본인교회 담임 8년 경력의 해리스는 1904년 감독이 되어 일본과 한국 교회를 관할하면서 일본 편향적 정책을 수행한 대표적 친일파 선교사였다.

1907년 한국 감리교 선교 개척자였던 스크랜턴 선교사가 목사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난 것도 해리스 감독의 편파적인 친일 정책 때문이었다. 해리스는 공개적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지지하였다. 1916년 은퇴하고 돌아갈 때 일본 정부는 그에게 2등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신학자로서 오아이오 웨슬리안대학 학장 출신이었던 웰치는 달랐다. 그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가해자인 일본과 피해자인 한국을 동시에 관장해야 했던 감독 입장에서 중립을 지키기란 어려웠다. 힘없는 자에게 중립은 버팀목이 되지만 힘있는 자에게 중립은 가로막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웰치 감독의 중립은 한국 교회에 힘이 되었다. 해리스 감독을 경험했던 한국 교회로서는 일본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웰치 감독이 고마웠다. 보기에 따라서 \"친한파\"로도 분류될 수 있었던 웰치 감독이었기에 당시 교회 청년들에게 희망이었다. 그는 여러모로 일본보다는 한국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웰치 감독은 1930년 12월 2일 남.북감리교회가 합병될 당시에는 전국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양주삼, 정경옥 교수와 더불어 \"한국 감리교회 교리적 선언\"을 초안하였다. 그는 한국의 자립 교회는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진정한 한국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한국 감리교회의 향방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1950년 6.25전쟁을 전후하여 감리교 해외구제위원회(MCOR)를 조직, 구제사업ㆍ복구사업ㆍ전쟁이재민 정착사업 등을 적극 추진하였다. 보육원, 불우 아동수용소, 모자원, 양로원 및 직업보도소 등 신속하고도 구체적인 구제사업을 전개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52년 그의 90회 생일을 맞이하여, 당시 류형기 감독이 1952년 전후 복구 자금을 얻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던 중 해외구제위원회 관계자들과 처음 논의하였다. 선교부의 동의를 얻어 한국의 여선교사였던 로이스의 협조로 \"웰치기념예배당 설립 기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1954년 미국에서 모금한 한국 교회 재건기금을 보충,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사 자리에 웰치기념예배당을 준공하였고 이화여자대학 강당에도 그의 기념예배당을 마련하였다(그를 기념하여 1959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세운 웰치기념예배당은 대학 측의 새 채플 건립으로 인해 2001년 겨울에 헐리고 말았다).

1958년 그는 미국의 각 대학에서 9개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2년 11월 6일 뉴욕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그의 100회 생일 축하연 석상에서 1천 5백 명의 축하객에게 38분간에 걸친 답사를 했다.

\"…… 나는 작은 것들을 귀히 여기는 습관을 길렀습니다. 웨슬리는 \'큰 책은 악이다\' 하며 소책자를 많이 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작은 것들을 버리신다면 어떻게 하늘에는 큰 별보다 작은 별들이 많고 바다에는 고래보다 작은 고기가 많고, 산에는 낙락장송보다 잡초가 많고 세상에는 평안이 더 많겠습니까. …… 나 자신을 과중히 생각치 말 것을 깨달았습니다. …… 보잘것없는 내 생각이 사람들의 표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업장입니다. …… 여러 가지 덕 중에 나는 겸손과 동정심을 찬양합니다. …… 나는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시사 인도하시고 안위하시며 힘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황금시대는 아직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는 또한 104세 때인 1966년 4월 감리교 감독회의에서 감독된 지 50년 기념사를 했고 1969년 4월 4일 수난주간 금요일 밤(Good Friday)에 별세하였다. 향년 106세의 일기로 오랜 인생항해의 닻을 내린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장수 앞에는 세 번의 위험한 죽음의 고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하나는 일찍이 알래스카에서 파선을 당했던 일이며, 두 번째는 일본 동경에서 지진을 겪으면서였고, 세 번째는 중국에서 공산당의 박해가 있을 때였다고 한다. 장례식은 그가 출석하던 뉴욕 연합감리회 크라이스트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3.1운동 당시 한국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해 주었다는 공적을 인정받아, 1953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최고 민간 공로상을 받았다.

한편 그의 부인(Adelaide F. McGee, 1866~1958)은 1890년 6월 3일 결혼하여 목회 동역자로서 헌신하였으며, 슬하에는 2녀를 두었다. 그녀는 만년을 딸과 함께 보냈고, 1958년 딸이 그녀의 임종을 지켰다.

-저서:The Christian College, 1916;The One Face, 1925;Men of The Outposts, 1937;Selections from the Writings of John Wesley (ed.), 1901;As I Recall My Past Century, 1962;《웰치감독 강연집》,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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