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와그너(Ellasue Wagner, 188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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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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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감리회 여선교사. 한국명 왕래(王來) 또는 왕래수

미국에서 태어남. 1899년 버지니아 주 마리온대학과 1903년 스카릿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04년 남감리회 파송을 받아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개성선교부에 부임하여 여선교사 캐롤(Arrena Carroll)과 함께 1904년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여아 12명을 데리고 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 개성여학교로 부르다가 1906년 두을라(杜乙羅)학당으로 개칭되었고, 1909년 8월에는 고등과를 설치하였으며 1922년 2월에 이르러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남감리회는 1905년 4월 개성에서 여자 사경회를 마친 후 여선교회를 조직하는데 최초의 남감리교회 여선교회다. 이와 별도로 또 다른 여선교회가 개성에서 조직되는데 1908년 1월 16일 개성성경학원에서 와그너와 캐롤의 주선으로 집사회를 조직하고 회원간 친목도모, 강사를 초청하여 강연회 개최, 회비를 모아 선교사업을 돕는 일에 쓰기도 하였다. 1909년 1월 회의 명칭을 여선교회로 고쳤다.

그는 또한 1906년 4월에 크램(W.G. Cram)이 젊은 과부 및 기혼여성 8명으로 시작한 미리흠(美理欽)여학교에도 관여하였고, 1922년 5월에 개관된 고려여자관을 통해서도 전도사업ㆍ교육사업ㆍ사회복지사업을 전개하였다. 루씨여학교 9대 교장으로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봉직하였고, 1927년부터 The Korea Mission Field의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1933년부터 〈기독신보〉의 상무이사로도 활약하였다. 1931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연합연회에서 동료 여선교사 13명과 함께 양주삼 총리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9년부터 서울에서 머물면서 지방 여선교회 사업과 태화여자관 사업을 관장하였으며 과로로 인한 건강악화로 1933년 9월 귀국하여 휴양하였다. 1937년 다시 내한하여 서울북지방 여선교회 사업을 관장하였고, 1938년에는 다시 개성에 부임하여 호수돈여고 교장 및 호수돈여자보통학교 교장직을 겸임하면서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1940년 일제 말 강제 출국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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