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양주삼(梁柱三, 1879. 1. 25~1950 ?)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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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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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총리사. 호는 백사당(白沙堂)

평남 용강군 산남면 홍문리에서 가난한 선비 양정섭의 장남으로 출생. 유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특히 한학자인 조부에게서 훈도와 감화를 받았고 이병준에게 초등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부친의 축첩과 이에 따른 가정불화, 지방관리들의 탐학에 따른 사회 불안 등으로 정신적인 방황을 하게 된다.

일찍부터 유ㆍ불ㆍ선 3도에 취미를 가지고 연구하였던 그가 기독교를 알게 된 것은 15, 6세 즈음 우연히 한문으로 된 〈만국공보〉란 잡지와 《덕혜입문》이란 상해 주재 선교사들이 발행한 전도서들을 접하면서부터다. 서적을 통해 기독교를 알게 된 그는 이듬해(1899) 교회를 찾아가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1899년 겨울 집안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상경하여 인공양잠전습소에 입학하여 6개월 동안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학문을 처음으로 맛보았다. 이어 헐버트(H.B. Hulbert)와 콜리어(C.T. Collyer) 선교사의 소개장을 받아들고 인천을 떠나 중국 상해에 도착, 1901년 5월 남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하여 1902년 10월 원장으로 있던 파커(R.A. Parker)에게 세례를 받아 정식 남감리회 교인이 되었다.

1905년 중서서원을 졸업한 뒤 유학 길에 올라 영국을 거쳐 미국에 도착하여 뉴욕지방에 머물다가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하와이 개발회사에 노무자로 이민 왔던 한국인들이 대거 미국 본토로 올라와 직업을 못 잡고 방황하고 있을 때여서 젊은 양주삼이 동포들을 볼 때 \"목자 없는 양떼 같아 먼저 저 불쌍한 동포들을 정신적으로 지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자신이 목적하고 온 학업은 후일로 미루고 한인교회부터 설립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곳에서 리드(C.F. Reid) 선교사를 만나 한인교회의 전도사 일을 맡아보면서, 월간지 〈대도〉(大道)를 발행하였다. 1909년 7월 양주삼은 자신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던 중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써 평생의 사업을 삼으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공부를 결심하였으니 이것이 그 평생의 전기가 되었다. 1910년 1월 밴더빌트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1913년 6월에 졸업했고 이어 예일대학 신학부에 진학, 이듬해 6월에 졸업하였다. 1912년 9월 12일에는 남감리회에서 집사목사로 안수받았다.

1915년 1월 귀국하여 즉시 협성신학교 교수로 신학을 가르치는 한편 교장인 하디(R.A. Hardie)와 함께 신학잡지 〈신학세계〉(神學世界)를 창간하였다. 1915년 10월 3일 김흥순, 정춘수와 함께 남감리회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고, 1916년 한영서원(후의 송도중학교) 부원장으로 2년간 재직하였으며 1918년 11월 남감리회 선교백년기념사업회 총무로 선출되어 시베리아 선교사업을 시작하는 등 남감리회 전도사업을 총괄하였다. 그 후 시베리아 선교사업 관리자(1923), 철원지방 장로사(1924), 경성지방 장로사(1929), 남감리회 조선연회장(1930)을 역임하였다. 1928년에는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국제선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귀국 길에 덴마크를 시찰하고 돌아와서 《農民의 樂園인 丁抹》을 편찬하는 등 한국 교회 농촌사업에 공헌하였다.

뛰어난 교회 조직가, 행정가인 양주삼 목사는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크게 역할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신학교 일을 맡으면서 자교교회 담임목사직도 1년간 겸임하였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는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활동하였다. 충실한 설교와 헌신적인 뜨거운 봉사로 저다인, 왓슨, 윤치호, 홍병선 같은 이가 그에게서 감화 받고 은혜 받았다. 1918년에는 미국 남감리회가 외국 선교를 시작한 지 100년을 맞아 선교백년기념사업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양주삼 목사가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는 1923년까지 이 운동을 총지휘하면서 \"교회와 민족에게 새 힘과 새 소망을 불어\" 넣어 큰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각 지방마다 전도대를 조직해서 순회하며 전도하고, 전도문서를 나누어준 결과 4년 만에 남감리회의 교회 수와 교인 수가 배 이상으로 증가하는 놀라운 결실을 이루었다.

\"今年은 우리 敎會에 恩惠가 내린 해요 感謝할 해라 하겟슴니다 今年 統計表를 볼 것 갓흐면 地方마다 新設敎會가 만코 信者의 數爻와 捐補의 金額이 만히 增加되엿슴니다 萬福의 根源되시 하님感謝榮光을 돌닙세다.\"(〈南監理敎會 朝鮮每年會 第六回會錄〉, 1923, 60쪽)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창립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제1회 총회에서 초대 총리사로 선출되고 제2회 총회에서도 재선되어 8년간 뛰어난 조직력과 행정력을 발휘하여 한국 감리교회를 이끌었다. 총리사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만주선교사업에 자원하여 만주지역 교포선교에 전력을 기울였다.

일제 말기 일제의 탄압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강제송환되자 선교부 재산을 위임받아 관리하였으며 기독교서회까지 관장하였다. 그러나 1942년 왜정은 기독교서회를 적산이라 하여 양주삼 총무를 축출한 후 일본인 곤도에게 관리인직을 맡김으로 기독교서회 사업은 사실 마비되었으며, 교회재산까지 전쟁명목으로 모두 수탈해 갔다. 1943년경부터는 자택에서 은거하면서 《양씨족보》, 《조선양씨일람》 등을 집필하면서 보냈다.

1949년 3월 신사참배, 징병 권유 연설 등을 행한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기도 했다. 1949년 10월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로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1950년 8월 23일 공산군에 의해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겼다. 이호운 목사의 말대로 \"그의 일생은 그대로 민족의 수난사였고 그의 헌신은 우리 감리회 발전을 위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를 빼놓고 한국 감리회사를 알기 어렵고 그의 공헌이 없었던들 우리 감리회의 발전이 적잖게 늦어졌을 것이다. 그는 우리 감리회의 혜성적 존재였고 산파였으며 또 유모이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 감리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종이었으며 한국 감리회의 후란시스 애스베리였다.\"(《그의 나라와 그의 생애》, 1쪽)

-저서:《양주삼 총리사 저작 전집》(전5권), 한국감리교회사학회, 1991.

-참고문헌:이호운, 《그의 나라와 그의 생애》, 감리교대전신학대학 출판부,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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