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서은숙(徐恩淑, 1900~1977. 7. 2)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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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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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
교육자

경기도 제물포에서 태어났다. 어촌에서 아버지 서기범(徐箕範)과 어머니 최대비다(崔大琵多) 사이의 2남 2녀 중 다섯째로 출생하였다. 처음 호적명은 정순(貞順)이며, 1933년에 개명하였다. 영화여학교(永化女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에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 1923년에 이화학당의 대학과를 제9회로 졸업하였다. 고등과에 들어가서는 선배인 김활란(金活蘭)과 후배인 유관순(柳寬順) 등과 기숙사의 한방을 쓰며 우의를 돈독히 하였고, 대학과 시절인 1922년에는 김활란을 도와 대학기독교여자청년회연합회(YWCA) 창립에 참여하였다.

여자기독청년회(YWCA)는 1922년 4월 20일 김필례ㆍ유각경ㆍ김활란 등에 의해 창설된 국제적인 기독교 여성운동 단체다. 동경여학원에서 유학하던 김필례는 동경YWCA가 경영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중 YWCA 이념과 사업의 귀중함을 몸소 체험하고 이 운동에 뜻을 품은 채 1916년에 귀국하였다. 1921년 선교사들과 YWCA 창설을 논의하던 중 당시 이화학당장이던 아펜젤러의 소개로 김활란을 만나게 되었으며, 1922년 3월경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서은숙을 비롯하여 신의경, 유각경 등과 함께 모임을 갖고 그 해 3월 27일 경성여자교육협회에서 제1차 한국YWCA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그 해 4월에는 \"이 불우한 시기에 처해 있는 전 국민, 특히 여성들의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는 중지를 모으고 1922년 6월 13일부터 12일 동안 협성여자성경학원에서 제1회 하령회 및 발기총회를 개최, 조선여자기독청년회 기성회를 결성함으로써 한국YWCA가 세계 속에서 독립된 YWCA의 역할을 해나가게 되었다.

또한 서은숙은 \"미감리회 부인회\"의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한국인으로 부인회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지휘를 받으며 2년 이상 일하였고 고등보통학교 과정에다 전문분야 고등교육을 2년 이상 받은 고학력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영어회의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의 어학실력도 필요했다. 이러한 자격을 갖춘 한국인이라도 부인회 전체 회원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이같이 까다로운 자격 기준이 있었음에도 1925년 부인회 회원으로 안수경, 김활란, 이효덕 등과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대학과 졸업과 함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학당대학 예과의 교사로 부임하여 2년 정도 근무한 뒤, 1925년 아펜젤러(A.R. Appenzeller)의 천거로 평양에 있는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로 옮겼다가 1927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8년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Cincinnati)사범대학에 입학하고, 1930년 김활란이 박사 과정에 있는 뉴욕 콜롬비아대학(Columbia)에 진학하여 아동교육학을 전공,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이화보육학교의 학감을 지내다가 1939년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문리과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공부하였다. 이듬해에 귀국하여 김활란의 권유로 이화여자전문학교의 회계 과장직을 맡아 이화의 재정을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1943년 8월 재단법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자 이사직을 맡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동창회장직도 겸임하게 되어 1956년까지 계속하였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는 이화여자대학교 사무국장, 1954년부터 1961년까지는 대학 학생처장을 역임하였다. 1965년에는 한때 이화여자대학교 제8대 총장서리를 맡아보기도 하였으며, 1970년 김활란이 죽자 후임으로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직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YWCA연합회 이사를 맡아 활동하였고, 1948년부터 1962년까지 이 연합회 감사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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