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백사겸(白士兼, 1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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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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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
맹인전도자

평남 평원군 순안면 성주동에서 태어남. 어려서 부모를 잃고 아홉 살 때 안질을 앓아 맹인이 되었다. 형과 함께 구걸하던 그는 당시 보통 맹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생계를 위해 점치는 법을 배웠다. 천부적인 재치와 노력으로 15세에 복술선생에게 \"산통\"(算筒)과 \"죽장\"(竹杖)을 물려받고 복술가로 나서, 이후 23년간 평양, 서울, 원주, 이천 등지로 다니며 명복(名卜)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그가 기독교를 접한 것은 고양읍에 자리잡았을 때다. 눈치로 남을 속여 점을 치는 기술에 한계를 느끼던 그는 나름대로 \"참 도\"를 구하기 위한 종교적 수행을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 전래 민간인들이 취한 방법이었다.

\"그때부터는 진심갈력을 하야 축원을 하였다. 자기 집 후원에다 제단을 모아놓고 매일 첫 새벽이면 이러나서 냉수에다 세수를 하고 의관을 정제한 후에 제단 우에 청수를 떠 올려놓고 그 앞에 가 꿀러앉어서 기도를 하였다. \"오 천지신령님이여! 하날에 일월성신님이여! 이 더러운 인간의 축원을 하감하사 소란한 이때를 평정시켜주시고 시화년풍하게 하소서.\"\"

이 땅의 민중들이 사찰이나 교당을 찾지 않고도 천지를 주재하는 신에게 소원을 빌던 가장 보편적인 종교 행위였다. 기도의 대상은 물론 \"천지신령\"(天地神靈)이고 \"일월성신\"(日月星辰)이었다. 그는 이외에 민간주술에 가장 널리 사용되던 \"태을보신경\"(太乙補神經)을 낭송하는 철야기도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종교 수행을 18년 동안 지속했으나 참 도를 발견한 기쁨을 느끼지 못해 불안해하던 중, 마지막 수단으로 백일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저녁 하늘 별이 보이기 시작해서 새벽 별이 지기까지 계속해서 \"태을보신경\"을 낭송하는 고행이었다.

작정했던 백일 철야기도가 끝나는 날(1897. 1. 12) 아침, 백사겸은 낯선 손님의 내방을 맞았으니 남감리회 매서인 김제옥(金濟玉)이 전도하려고 그의 집을 찾은 것이다. 김제옥은 \"인가귀도\"(1894년 정동교회에서 발행한 80쪽짜리 소형 책자로, 한 집안의 가장이 술과 아편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전도를 받고 회개한 후 그의 가정이 축복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란 제목의 작은 전도책자를 백사겸에게 주고 돌아갔는데, 그 책을 받은 당시 그는 \"독한 벌레가 손에 닿은 듯 섬뜻하였다\"고 회고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예수교를 \"사교\"(邪敎)로 여겨 그 책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백일 치성에도 속시원한 응답이 없어 정신적 갈등은 더욱 심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가 전도책을 부인에게 주어서 궤 속에 감추어 둔 후 몇 날이 못된 어느날 밤이었다. 자리에 누어 잠이 아리아리 들 때에 자기 몸이 별안간 총알같이 빠르게 어디인지 모르게 한없이 올라가서 하날나라라는 곳에를 당도하게 되였었다. 평소에 소경이라 그는 역시 거기 가서도 소경이 되여 지척을 헤아릴 수 없어서 잠시 주저하고 있을 때에 자기 좌우편에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을 알게 되였었다. 그러자 우편에 있는 사람이 자기에게 은산통을 손에 쥐어 주면서 하는 말이, \"나는 예수이다. 내가 주는 의의 산통이니 받어가지라.\" 이 말을 마치고 어디로인지 사라저 버린 것 같고 좌편에 있든 사람도 역시 아무 말도 없이 산통 한 개를 쥐여주는데 받고보니 아무 것도 들지 않은 산통이었다. 그는 두 손에 산통을 받어주인 채로 깜짝 놀라 깨니 꿈이였다.\"

오른쪽에 있던 예수가 준 의(義)의 산통, 왼쪽의 이름 모를 인물이 준 빈 산통의 의미를 깨닫기 위한 긴 고민이 시작되었다. 점치는 것이 업이었던 그였으나, 꿈에 본 점구(占具) 은산통의 의미를 깨닫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은산통을 김제옥이 주고 간 전도책자로 해석하게 되었고, 부인에게 《인가귀도》를 꺼내다 읽게 하여, 그 내용에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위안과 감격을 느끼면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김제옥에게 기별하여 자기 뜻을 밝혔고, 그의 아내와 함께 고양읍교회에 처음 나가던 날, 개종 기념으로 점칠 때 쓰던 북과 산통을 선교사에게 기증한 후 자원해서 기도했는데, \"하나님 아버지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한마디를 한 후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해 잠시간 통곡만 하고 내려왔다.

그 해 5월 2일 고양읍교회에서 부인(엘리사벳)과 두 아들(남석, 남현)이 함께 남감리회 리드(李德)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날은 남감리회 첫 번째 교회인 고양읍교회가 조직된 날로 장년 24인과 유년 3명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한편 이 예배당은 윤치호가 남감리회의 첫 열매를 기념하기 위해 바친 것이다.

교인이 된 후 백사겸은 거짓되게 모은 재물을 정리하였다. 가구를 파니 3천 냥이나 되었다. 그는 깨끗하게 벌지 못한 이 돈을 어디다 쓸까 고민하고 있는데, 얼마 후 이 돈을 몽땅 도적질당하였다. 그는 허탈하기는 하였으나 불의한 재물을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고양 군수가 이 사실을 알고 얼마간 도와주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집을 거저 남에게 주고 가족을 이끌고 행주 땅으로 이주하였다. 행주에 도착하니 소문을 듣고 전도를 해 달라는 이들이 많아, 그는 간증을 하기 시작했다. 남감리회에서는 이런 그를 사역자로 임명하였고, 그는 1899년부터 리드 선교사와 함께 개성으로 파송되어 개성, 장단 등지에서 13년간 전도하였다. 그의 전도구역은 개성, 장단 외에도 철원, 김화, 평양, 사리원, 풍덕, 나주, 평강 등 광범위하였으며, 장단읍교회, 감암리(甘岩里)교회, 개성남부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은퇴 후에도 짚신과 돗자리를 만들어 팔면서 전도를 계속하였다.

양주삼은 그를 \"한국의 삭개오\"라 불렀으며, 성결교의 박소천은 1938년 그의 신앙생활 40년을 기념하여 전기집 《숨은 보배》를 펴냈다. \"회심행도가\"(回心行道歌) 등 49종의 노래가사와 20여 종의 설교필기를 남긴 그는 한국 교회의 전설적 전도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아들 남석은 에모리대학을 나온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하면서 한국주일학교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다음은 그가 전도할 때 간증과 함께 불렀던 중 \"회심행도가\" 제44장 \"영혼의 불쌍한 사정\"의 10~11절이다. 이 노래를 들으며 한 많고 슬픔 많은 민중들도 덩달아 울며 은혜를 체험하였다.

잠깐 되는 세상 살 동안 영혼의 복을 구치 않고
육신의 복만 구하다가 영혼이 음부에 들어간 후
육신은 산에 장사하니 고요적막한 궁벽처에
묘중 석상에 누웠으니 두견새 울 뿐 처량하네

뼈는 썩어서 흙이 되고 살은 썩어서 물이 되여
시내강수에 살섞은 물 합수가 되여 흘러가니
영웅호걸 그 수 얼마냐 인생육신 가련함이여
아침이슬과 안개로다 잠시있을 육신만 위해
죄를 짓고 영고 말고서 우리 인생에 영생 위해
죽고서 다시 부활하신 예수 앞에 영생하라

-참고문헌:박소천, 《숨은 보배》, 1938;오명동 편, 《맹인 전도자 백사겸 이야기》, 한들출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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