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박승호(朴承浩, 1900. 8. 15~2000.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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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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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도사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현 서대문구 신촌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박경진은 권사로서 창천교회에 출석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속장이었다. 7세 때 최병헌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화학당을 거쳐 1916년 이화여중을 졸업했다.

18세가 되던 해 여름, 중한 병이 들어 한 달간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의식이 희미해지며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심방온 사람들은 그날 밤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며 박승호의 부모를 위로하고 돌아갔다. 의식이 없는 가운데 어디선가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께로 가리라\"라는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고 박승호는 이를 부르고 또 불렀다. 이튿날 죽었으리라고 생각되어 교회에서 심방을 왔는데, 그때 의식을 찾은 박승호는 그 찬송가를 부르며 이제 주님께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 신학교에 보내달라고 목사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몸이 약해 내년부터 공부를 시작하자는 목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석에서 일어난 지 15일 만인 1918년 9월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1924년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10월 태화성경학원의 교사가 되어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4년 10월 동대문교회에 전도사로 첫 파송을 받아 1926년까지 봉사했다. 그 후 계속해서 목회하는 중에 처녀의 몸으로 목회를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껴, 어느 목사의 소개로 신광호(辛廣浩)와 결혼했다.

1926년 3월부터 1928년까지 황해도 사리원교회 전도사와 유치원의 일을 겸임했고, 1928년 3월부터 1936년까지는 서울 상동교회에서, 1936년 10월부터 1938년까지는 서울 도화동교회에서 목회했다. 1938년 4월부터 서울 아현교회 전도부인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말기(1940. 4~1943. 4)와 한국전쟁(1950. 6~1953. 5) 때 잠시 아현교회를 떠나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아현교회에서 목회를 도왔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 문제로 전도사직을 사임하고 아현교회를 떠나게 되었는데 해방 직후에도 정식으로 전도사로 복귀하지는 않았지만 아현교회 주일학교와 심방을 맡아하면서 목회를 도왔다. 1951년 2월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 아현교회의 장세환(張世煥) 장로와 함께 보수동교회를 설립했다. 1952년 연회에서 협동회원으로 복귀하면서 보수동교회 전도사로 취임하여 교인들을 심방하면서 신앙을 지도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서울북지방 여선교회 총무를 역임했고, 1953년부터 1958년까지는 명덕학사 이사로 일하였다.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서울 신길동의 명신고아원에서 이사로 봉직했다. 1953년 보수교회에서 성역 30주년 기념 표창을 받았고, 1960년 10월에는 그의 회갑을 맞아 아현교회에서 성역 38주년 및 회갑 축하예배를 드렸고 기념 표창을 받기도 했다.

동대문교회 전도부인으로 목회를 시작한 지 47년, 아현교회 전도부인으로 부임한 지 33년 만인 1971년 3월 1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중부연회에서 정년 은퇴하였고, 3월 28일 아현교회에서 박승호 전도사 은퇴 찬하예배를 드렸다. 정년 은퇴한 후에도 아현교회에 출석하며 여선교회와 선교부, 교육부 활동을 적극 도왔다. 이후 100세를 사는 복을 누리고 2000년 1월 8일 별세하였다. 아현교회 예배당에서 엄수된 장례식에는 박승호 전도사의 유언대로 찬송 495장을 불렀다.

-논문:\"삭군과 일군\", 〈기독신보〉, 1930.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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