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리드(Clarence Frederick Reid, 1849. 7. 19~1915.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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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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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감리회 최초의 한국 선교사. 한국명 이덕(李德)

미국 뉴욕 주의 신앙이 두터운 의사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7세에 부친을 잃은 후 모친과 함께 삼촌 댁에서 성장하여 공립학교와 사범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평신도 선교운동(The Laymen\'s Missionary Movement) 총무로 활동하였고 1874년 전도사 직첩을 받았으며 같은 해 9월 남감리교회 켄터키연회 학습회원으로 입회하였다. 1878년 남감리교 켄터키 연회원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그 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어 서주(徐州)지방의 선교사업을 관할하는 감리사(장로사)가 되었고, 1886년에는 중국 선교연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중국에서 17년간 선교 경험을 쌓았다.

1893년 3월 미국 유학중에 있던 윤치호가 모교인 에모리대학 총장 캔들러에게 한국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는 데 쓰도록 2백 달러를 청탁한 것을 계기로 남감리회의 동양 선교를 주관하는 헨드릭스(E.R. Hendrix) 감독이 선교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때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해온 리드가 동행하게 되었다. 1895년 10월 이들은 상해를 떠나 제물포(인천)에 도착하였다. 당시 한국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난 직후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고종을 만나 한국에 훌륭한 교사들을 많이 보내서 문화 발전에 기여해 달라는 당부를 들었고, 이에 헨드릭스 감독은 즉각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리드 목사는 이미 한국 선교를 시작한 미감리회 선교사인 스크랜턴의 주선으로 현재 한국은행이 있는 곳에 선교기지를 구입하고, 1895년 10월 20일 서울을 떠났다가 1896년 5월 두 번째 내한하여 주택을 수리하고, 상해로 가서 가족을 데리고 8월 14일에 다시 내한하였다. 1897년 5월 선교연회에서 중국 선교의 연장으로 한국 선교처를 인정하고 리드를 그 관리자로 임명하였고, 1907년에 이르러 중국 선교와는 별도의 한국 선교가 이루어졌다.

리드가 내한하여 전도사업에 힘쓸 때 미감리회 스크랜턴 목사가 자신이 맡고 있는 상동교회의 청년 김주현(金周鉉)과 김흥순(金興順)을 리드 목사에게 보내어 협조하도록 했다. 1896년 12월부터 리드는 두 사람의 한국인 전도자와 함께 서울 근교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897년 5월 2일 리드 목사의 집례로 고양읍에서 장년 24인, 유년 3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함으로 남감리회 최초의 고양읍교회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한국인 전도자 중 김흥순은 1911년 10월 1일 정춘수, 주한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남감리회 목사가 되었다.

1897년 6월 21일에는 서울 리드 목사의 집에서 처음으로 공중예배를 시작하였고 이때 윤치호가 설교하였는데 이 교회가 후에 광희문교회로 발전하였다. 같은 해 9월 10일 리드 목사의 사회로 제1회 한국지방회를 개최하고 서울구역과 개성구역으로 분할하였으며 리드 목사는 한국지방 회장이 되었고 윤치호는 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리드 목사는 부인의 병환으로 1899년 4월 20일 귀국하게 되었고, 그의 부인은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01년 5월 17일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선교를 잊지 못한 리드 목사는 그 해 9월 14일부터 18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제5회 선교회 때에 한국에 와서 선교 관리자로서의 모든 선교 업무를 처리하고 귀국하였다. 1904년부터는 미국 태평양 연안에 거주하는 동양인에게 선교하는 사무를 관리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중국인 교회와 일본인 교회를 설립 전도하였으며, 1906년에는 한국인에게 전도하여 한국인 교회를 창립하고 양주삼과 함께 〈대도〉(大道)란 월간 잡지를 발행하였다. 1910년에는 남감리교회 평신도선교사업의 총무로 피선되어 활동하다가 1915년 10월 7일 켄터키 주에서 66세로 별세하였다.

그의 아들인 이위만(W.T. Reid, M.D, 李慰萬) 의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07년부터 경기도 개성에서 의료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아버지 리드 목사가 미국에서 벌인 모금운동으로 버지니아 주의 아이비(W.C. Ivey)에게 의연금 5천 달러를 기증받아 1907년 개성에 아이비기념병원을 설립하였고 이 병원을 중심으로 의료활동을 하였다. 1909년에는 100만명구령운동을 주도하는 등 의료사업과 복음사업에 전력하다가 1928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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