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김창희(金昌熙, 1923. 3. 4~1988. 9. 19)

인물사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조회
890
감독. 호는 우석(隅石)


서울에서 출생. 일찍 증조모 때부터 정동제일교회의 입교인으로서, 조부모, 부모를 이어 4대째 예수를 믿는 신앙의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경기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감리교신학교 3년을 수료했으며, 재학중에는 황민화교육반대시위사건으로 퇴학당하기도 했다. 1953년 연희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서울 장사동교회를 필두로 연지동교회, 용산교회, 종로교회 등에서 시무하였고, 1964년에는 정동제일교회 부목사로 부임하여 1966년까지 시무하였다. 중부연회 총무를 거쳐 1970년부터 총리원 총무국장으로 시무해 오던 중 1974년 12월 총회에서 제12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70년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에 선임되었고 감독 선출과 동시에 유지재단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서울중앙YMCA 이사, 원주기독병원 이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김창희 목사는 한국 감리교회 분열 합동의 역사 현장에서 목회를 하였다. 1954년 3월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해방 후 제3회 총회는 감리교회의 2차 분열로 기록되는 총회다. 김응태, 변홍규, 박설봉 목사 등 반(反) 류형기 감독파는 총리원이 범한 정치적, 재정적 부정을 폭로하며 공격하였다. 이 같은 공격의 배경에는 류형기 목사를 중심한 이북 출신의 교세인 성화파(聖化派, 해방 전 평양의 성화신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진 감리교 세력)의 교권 독점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류형기 감독 반대 세력은 자연히 이남, 특히 충남 출신의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1954년 3월 20일 류형기 감독의 재선이 확정되자 류 감독의 자격을 문제 삼아 총회장을 퇴장한 엄재희, 박설봉, 조화철 목사 등은 1954년 4월 20일 서울 중앙교회에 모여 별도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 후 1955년 3월 1일 충남 천안에서 총회와 연회를 소집하고 김응태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고 총회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호헌파\" 감리교회가 생겨났다. 그리고 연회에서는 정동제일교회에 김응태 목사, 중앙교회에 엄재희, 만리재교회에 박설봉 목사 등을 파송하였는데 이때 김창희 목사는 장사동교회로 파송받아 목회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동부연회에서는 불법적인 호헌연회의 파송을 받고 호헌총회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고명균 목사 등에게 교직 정지처분을 내렸고, 중부연회에서는 김응태, 박설봉 등과 함께 김창희 목사에 대하여 같은 이유로 제명처분을 단행했다. 이로써 김창희 목사는 첫 목회를 감리교회 두 번째 분열의 역사 현장에서 시작하였다.


1974년 10월 23일 개회된 제12회 총회에서는 감독 선거가 초점이 되었다. 27일까지 13차에 걸쳐 투표를 하였으나 홍현설 목사와 김창희 목사가 대립하여 결말을 보지 못하고 12월 10일 다시 속회하여 감독 선거를 24차까지 실시하였다. 그래도 감독이 선임되지 않자 먼저 감독선거수습특별위원을 각 서클별로 2명씩 택하여 대화를 한 후 감독 선거를 하기로 하였으나 타결이 되지 않자 12월 12일 조피득 목사가 \"퇴장 선언문\"을 낭독하고 회원 40여 명과 함께 퇴장하였다. 그 후 제25차 투표에서 총투표수 1백 82표를 얻은 김창희 목사가 감독으로 당선되었다. 한국 감리교회의 분열 속에서 시작한 목회 20년 만에 다시 감리교회의 분열 속에서 감독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1974년 12월 15일 정동교회에서 열린 감독 취임예배에서 김창희 감독은 다음과 같이 감독의 취임사를 했다.


\"여러분이 기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총회에서는 지난 10일에 이어 제12회 총회를 속개하고 감독이라고 하는 무거운 직책을 불초교제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무겁고 떨리며 송구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더욱이 오늘 이 중책을 감당해 나가겠다고 취임을 약속하는 마당에 이르고 보니 앞으로 다가올 많은 문제들로 인해 눈앞이 캄캄할 따름입니다. ……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총회를 거의 끝맺을 무렵에 총대 중 몇몇 분이 따로 나가서 모였는데 우리 총회는 교단의 총화를 위해 계속 노력해 왔으며 앞으로도 대화와 타협을 계속하는 등 포용적인 태세로 그 형제들을 대할 것입니다. ……\"(《隅石 金昌熙》, 115~117쪽)


김창희 감독은 취임 시에 자신의 일차적인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간 형제들과 하나 되는 화합의 과제였다.


김창희 감독은 자신의 4년 임기 중에 세 가지 큰 일을 해냈다. 하나는 특별총회를 열고 복수 감독제를 도입함으로 감리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을 성취한 것과, 둘째, 떨어져 나간 형제들과 화합한 것이며, 셋째, 5천 교회 100만 신도운동을 일으킨 일이다. 이 외에도 감독직을 끝낸 후에는 혜명교회를 담임하였으며 영명학원 재단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분열과 통합의 세월을 보낸 김창희 목사는 \"노내기를 씹는 마음\"이라고 표시할 만큼 마음이 상했어도 그것을 참는 마음과 슬기로운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또한 거의 매일 남산의 거지굴을 찾아 도와주며 살았고 거지굴이 철거되자 서울역을 다니며 방황하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였다. 언제나 주머니에 동전을 두둑히 준비해 가지고 다니며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한 주먹씩 나누어주었다 한다. 늘 나누어주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이지 않게 실천하며 살았던 교단의 행정가이자 목회자며 이웃이었다.


-참고문헌:《隅石 金昌熙》, 김창희 감독 추모집간행위원회, 1989.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