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김창식(金昌植, 1857. 2. 22~1929.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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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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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창식은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촌 바리봉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다가 스물한 살 되던 해에 집을 떠나 8년 동안 막일을 하며 전국을 떠돌았다. 1886년에 결혼하면서 서울에 정착하였다.


그때 서울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소문의 내용은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 사람들, 특히 어린아이들을 유괴하여 삶아 먹는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었다. 아이들의 눈을 뽑아서 약으로 쓰거나 사진을 찍는 데 사용하고 있다, 아이들을 외국으로 싣고 가서 노예로 팔아먹고 있다, 서양 사람들의 눈이 파란 것은 조선 아이들의 눈을 많이 파먹어서 그렇다는 등의 말도 돌았다. 이 소문이 급속히 퍼지면서 흥분한 군중들은 1888년 6월 이화학당을 습격하기도 했다.


사건이 확대되자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공사관들이 개입하여 조선 정부에 항의하고 대응 조처를 요구하였다. 다급해진 조선 정부는 고시문을 내붙이고 순찰을 강화했다. 이로써 심각하게 전개될 조짐을 보이던 사건은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진정되었다. "영아 소동"(baby riot)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보수 세력이 문호개방으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유입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껴 의도적으로 조작해 낸 것이었다.


김창식도 이 소문을 듣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마침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무영이 찾아와 서양 사람의 집에서 일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했던 김창식은 마땅한 직업도 없던 터라 이것을 받아들여 미감리회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 茂林吉)의 집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


올링거의 집에서 김창식에게 주어진 일은 문지기였다. 그는 문지기 노릇을 하며 서양 사람들의 생활을 세심하게 관찰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에게서 조금도 불의한 행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본받을 만한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김창식의 마음은 열리기 시작했고 결국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후 아펜젤러(H.G. Appenzeller)에게 세례를 받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새롭게 탄생하였고 1892년 미감리회 조선선교회에서 정식으로 허락한 전도인이 되었다.


1892년 의료선교사 홀(W.J. Hall, 賀樂)이 평양 선교 개척의 임무를 맡으면서 김창식도 홀과 함께 평양에서 일하게 되었다. 1893년 4월 평양 서문 밖에 임시 예배당과 시약소 형태의 병원이 설립되자 김창식은 평양으로 이주하여 평양의 선교활동을 주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평양기독교인박해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평양의 보수 세력이 기독교 확장을 시기하여 1894년 5월 10일 김창식 등 교인을 체포 구금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894년 2월(음력 정월)에 동네 부랑배들이 홀을 찾아와 성황제를 지낼 비용을 요구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홀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 대신 사신(邪神)을 숭배하는 것은 죄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큰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보수 세력들은 기독교인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 후 홀은 그의 부인과 아들을 평양으로 데려 왔다. 5월 8일 도착한 이들이 평양에 나타난 첫 백인 여성과 아이라 군중들은 낯선 이들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호기심에 가득 차 밀려드는 군중으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보수 세력들은 이 소동을 이용하여 선교사를 내쫓고 교인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로 김창식 등 평양 교인들은 1894년 5월 10일 새벽에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했다. 회유와 많은 매질을 당하고 사형에 처하겠다는 위협도 받았다. 그래도 김창식은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도 바울처럼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히 옳다"(행 5:29)며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는 순교자의 모습을 지녔다. 그의 믿음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관리들은 결국 그를 풀어주고 말았다. 이미 교인을 석방하라는 지시가 서울 외아문에서 내려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풀려난 김창식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배를 인도했다.


박해사건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던 무렵에 평양에서 또 다른 큰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세력 다툼을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민중들에게는 고통을 가져다주었지만 기독교에게는 복음 확장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김창식 등 교인들은 전쟁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교회에 맡겨진 민중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피난처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때부터 교인들이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다.


김창식은 본처 전도사로 역할하며 혼자서 평양 감리교인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1895년에는 선교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우리 조선인 교인의 헌금과 노동으로 평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 남산현예배당을 건축하는 일도 주도하였다. 그는 이미 양떼를 지극한 정성으로 잘 돌보는 모범적 목회자로 성장하여 평양뿐 아니라 강서, 용강, 삼화, 함종, 증산, 상원 등의 지역을 순회하는 전도사업에 헌신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평양의 교회확장사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그는 1898년부터 1901년까지 삼화읍에 거주하며 복음사업을 전개하여 그 기반을 잡는 역할도 했다.


한편 김창식은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신학회를 통해 신학교육을 받았다. 신학회는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으로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해 임시적으로 운영되던 신학교육 과정이다. 신학회는 서울 이외의 지방에서도 실시되었고, 한국인 전도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김창식은 1901년에 4년 과정을 마쳤다.


1901년 5월 14일에는 서울 상동교회에서 김기범(金基範)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목사 안수는 한국인에게 주어진 최초의 목사 안수였다. 1908년에는 장로(정회원)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김창식은 평안도, 황해도와 경기도 수원지방을 순회하면서 목회했다. 그가 파송된 지역은 1901년 황해도 수안, 1902년 황해도 신계, 1904년 북지방, 1905년 황해도 연안, 1906년 황해도 신계, 1907년 평북 영변, 1909년 평북 신창 자파 양덕, 1912년 평양서지방, 1913년 영변지방, 1918년 수원지방, 1919년 제암 남양 안산, 1920년 수원서구역, 1921년 해주지방 등이었다. 이 중에서 1912년 평양서지방의 활동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감리사직을 수행한 뜻 깊은 것이었다.


그는 어느 한 교회에 정착하여 목회하지 않고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1924년 은퇴할 때까지 30년 동안 목회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른 것에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주의 복음을 전하는 데만 헌신하여 한국 감리교회 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고집 때문에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했고, 물을 건너다 익사할 위기도 넘겼으며, 불량배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또 그는 항상 검소하고 겸손하여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수원지방에 파송받아 그곳에 처음 부임할 때에 교인들은 멀리까지 마중을 나갔다가 그를 만나지 못하고 늦게까지 기다리다 그냥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교인들은 그가 양복을 입고 훌륭한 차림으로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수룩한 옷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그를 장사꾼으로 오해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이 일로 교인들은 김 목사가 사치도 모르고 겸손하며 전도하는 일에는 용감한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전도인의 태도를 가진 그는 곧은 외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은퇴한 후에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해주에 머물며 요양생활을 하였다. 해주에는 당시 구세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아들 영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년을 아들과 함께 보내다가 1929년 별세하였다.


-저서:"나의 교역 생활", 《승리의 생활》, 조선예수교서회, 1927.


-논문:"마음 우희 꽃피는 거시라", 〈조선크리스도인회보〉, 1897. 5. 17;"권면의 유익이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8. 2. 23;"졔셩 권면위쟈문이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 1. 4~11;"금생에 예비래생지사는 사람의 본분이라",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9. 8. 16;"식견이 부족이면 시여미시라", 〈신학월보〉, 1901. 10;"겸손한대 거하야 사업을 크게 함", 〈신학월보〉, 1901. 10;"전도인의 재덕", 〈신학월보〉, 1904. 2;"상례는 맛당한 것만 행할 일", 〈신학월보〉,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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