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김진호(金鎭浩, 1873. 10. 20~1960.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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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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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경북 상주군 이안면의 가난한 농부 김규진(金奎晋)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수학했고 15세 되던 해 결혼했다.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 한문 공부를 계속하다가 27세 때(1899) 친척의 권유로 상경하여 말죽거리와 남대문 근처에서 훈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잠시 경북 의성에서 세무주사로 근무했다.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민영환(閔泳煥)의 자결과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夜放聲大哭)으로 마음에 변화가 왔다. 그 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찾아가 대화하는 중에 크게 깨닫고 그때부터 상동교회에 출석하며 전덕기 목사의 지도를 받아 1907년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다. 1908년부터 상동교회 안에 세워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과 공옥학교(攻玉學校)에서 조선역사, 성경, 한문 등을 가르쳤다. 상동교회에서 신앙훈련을 쌓는 한편으로 전덕기 양기탁 이동휘 이동녕 등의 민족운동가들이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여 민족운동의 발걸음도 내디뎠다. 김진호는 자신의 신민회 가입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조용한 시간에 석오(石吾, 李東寧)와 전 목사(전덕기)는 나를 불러 우리 단체에 참가하기를 권한다. 나는 두 분 선생의 사상과 신앙을 무조건 숭배하는 중이라 무엇이든 두 분 선생의 말을 순종할 터이니 바른 길로 인도하여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하루 저녁에 두 분을 따라 서소문 외 임치정(林蚩正) 씨 댁에 갔다. 그 자리에는 우강 양기탁(雩岡 梁起鐸) 씨가 있어 입회식을 주장하고 사상 문답이 있었고 서약하는 몇 중요 문답이 있었다. 나는 그 후로부터 가슴이 선듯하고 이 몸은 내 몸이 아니오 하나님께 바친 몸으로 생각되었다. 그 회의 이름은 신민회인데 절대 비밀이요 그 간부가 종종 교회 지하실에 모혀 방침을 협의하엿는데 신민회의 형식은 상동교회 청년회이고 선전기관은 대한매일신보이고 교육으로는 상동학원이다. 그때에 지하실에 모인 사람은 전덕기, 이동녕, 양기탁, 이회영, 이승훈 씨 등이다. 그 회의 집회는 매주 목요일 하오 7시에 교회에 모여 잠간 예배보고 난 후에는 여러 지사들의 열렬한 강설이 있었고 이준, 이상설 씨도 자주 와서 강설하였는데 예전 독립협회 후신들이다.\"


1911년 상동교회 권사가 되어 전덕기 목사를 도와 교회 일을 맡아보다가 1912년 피어선성경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1913년 선교사 데밍(C.S. Deming)에 의해 정식 감리교 권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1914년 협성신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하지는 못하고 2년을 수료했다. 1913년 11월 상동청년학원이 문을 닫고 1914년 3월 전덕기 목사가 별세하면서 당시 YMCA 총무이던 신흥우의 주선으로 YMCA 학원에서 한문과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이듬해 신흥우가 배재학당 당장이 되면서 그를 초청해 이때부터 배재학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16년 3월부터 배재학당에서 성경과 한문을 교수하면서 \"제군들은 자기 몸만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 아니요 나라 위하여 민족 위하여 하나님이 내 몸을 주시고 나를 교육하시는 줄 믿으라 가르치고 나의 한 몸의 성패가 곧 나라의 흥망이 달렷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라고 가르쳤고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배재 학생을 중심으로 전도대를 조직하여 전국순회전도를 실시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이필주 목사의 위촉으로 독립선언서를 서울 시내 각 국 영사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아 배재 학생 오흥순, 장용하를 통해 이를 전달하였다. 또 배재 학생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구치소에 구금되었다.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중 일경의 구타에 의해 신장염을 얻어 그 해 9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사상불온자로 주목을 받아 생활에 곤란을 겪었으나 인천지방 감리사 오기선 목사의 주선으로 1920년 3월 인천 내리교회로 부임하여 교회 내의 알력을 극복하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내리교회에서 시무하던 중인 1920년 10월 연회에서 본처집사로 안수를 받았고, 1924년에는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22년 배재학교의 아펜젤러 교장이 그를 초청해 그 해 3월 다시 배재학교 교목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배재 전도대를 조직하여 학생들과 같이 전도하였고, 이태원에 전도하여 없어졌던 교회를 새로 건축하였으며, 홍제원에도 전도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야학도 시작하여 학생들에게 \"예수 도깨비\"로 불리기도 했다. 배재에서 19년 6개월을 시무한 후인 1935년 4월 당국의 주의가 너무 심하여 나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다.


배재학교를 사임하고서는 1937년 \"협동회원\" 자격으로 궁정동교회와 삼청동교회를 맡아보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1940년 6월 함경남도 청진에 개척 전도로 파송되어 5개 교회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이유도 없이 검거되어 고문을 받는 등 공산당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1947년 6월 유득신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청진을 떠나 평양을 거쳐 해주 용당포에서 밀선을 타고 월남하였다. 1947년 9월 궁정교회에 다시 부임하여 1950년 말 피난할 때까지 시무하였다. 1960년 3월 감리교 선교 75주년 기념식에서 공로목사 표창을 받고, 그 해 9월 만성위장염으로 서울 자하문 자택에서 별세하여 10월 3일 배재고등학교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한편 김진호는 \"목사 전덕기 약사\"(1922)와 \"전덕기 목사 소전\"(1949)이란 기록을 남겨 전덕기 목사를 재발굴할 수 있도록 했으며 1922년 6월 상동교회에 건립된 \"고 목사 전공 덕기 기념비\"에 비문도 남겼다. 새겨 넣은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神佑東方 公乃挻生(하나님이 우리 나라를 도우사 선생이 나시었네)
畏心鐵血 其身犧牲(두려운 마음과 쇠 같은 피 그 몸을 희생하시고)
\"悟天酌 牧羊盡忠(하늘이 내리신 뜻 묵묵히 깨닫고 충성으로 양떼를 먹이셨네)
敎育泰斗 宗敎棟梁(임께선 교육에는 태두시며 교회에는 동량이시어라)
干干我民 何法拯救(오! 우리 움한 백성을 어떻게 구원할꼬)
居常痛懷 臨命哀禱(평소에 아픔 속에 계시다가 하늘에 오르실 때 애도로 보내려니)
再臨何日 復觀面目(재림이 어느 땔까 다시 그리운 님 뵈올 날이)
衆心感泣 以堅片石(여러 마음 느껴 울며 뜻 기려 돌에 세우노라)


-저서:〈病中錄〉(미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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