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김영섭(金英燮, 1888. 10. 2∼1950.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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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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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호는 탁오실(濯悟室)

경기도 강화읍 관청리에서 태어남. 그는 8세 때 강화공립소학교에 입학해서 13세(1900)에 졸업하고 1902년부터 2년간 한학자 박승태 선생에게 한문을 공부했다. 1904년 독립운동가 이동휘(李東輝)가 설립한 보창중학교 중학과에 입학해서 공부하다가 이듬해 한성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했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군대의 해산과 함께 무관학교가 폐교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1907년 보창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황해도 연안에 있는 사립 봉남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0년 방학을 맞아 연안에서 고향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죽음 직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게 되었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결심한 그는 곧 교사직을 던져버리고 교역자가 되기 위해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1911년 일본 와세다대학 문과에서 3년간 수학한 뒤 귀국하여 인천지방 전도사로 시무하다 재차 도일 1914년 아오야마 신학부에서 4년을 공부한 뒤 1918년 6월 귀국하여 인천 내리교회 부목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12월 북경에서 열린 감리교동아총회에 한국 감리교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1920년 5월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회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총회가 끝난 후 그대로 머물러 아이오와 주 심프슨대학에서 세계문화사를 1년간 공부하고 이듬해 하트포드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뒤 1923년 졸업하였다. 졸업과 함께 미국 감리교 뉴욕 동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뉴욕한인교회 담임목사로 2년간 시무하였다.

귀국해서 1925년 6월 서울 중앙교회 담임자로 시무하면서 협성신학교 교수를 겸임하였다. 1927년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파송을 받아 1934년까지 시무했으며 그 후 1935년부터 1938년까지 중앙교회,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정동제일교회를 번갈아가며 다시 담임하였다. 1938년 정동제일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신흥우가 조직한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어 2개월 동안 고난을 당했다. 그 동안은 신간회, 적극신앙단, 흥업구락부 등에 가담하여 사회개혁과 민족구원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이 사건으로 사상전향 성명을 발표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혁신교단의 중심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정동제일교회를 떠나 인천 내리교회로 목회지를 옮겼다.

1943년 10월 혁신파 인사가 조직한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통리:정춘수)의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어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는 친일의 모습을 보였다. 해방을 맞아서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형성했던 친일인사들이 만든 남부대회에 참여하여 ‘대회부회장’이란 임원을 맡았으며, 대한독립촉성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교회를 돌보지 않았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주재 한국총영사로 부임해서 일하다가 1950년 4월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다시 부임해서 한달 만인 5월 갑자기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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