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김구(金九, 1875. 7. 11∼1949.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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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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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본명은 창암(昌巖), 이후 창수(昌洙)로 개명.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에서 빈농이었던 부친 김순영(金淳永)과 모친 곽락원(郭樂圓)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1892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듬해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을 만났으며, 1894년 해주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안태훈(安泰勳, 안중근의 부) 진사를 찾아가 몸을 의탁하며 고능선(高能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 곧 만주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의 의병에 가담하여 평북 강계를 습격하려다가 재차 실패하여 귀국했다.

1896년 2월 황해도 안악에서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그 해 5월 체포되어 인천의 감리영(監理營)에 옮겨져 사형언도까지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어 사형을 면했다. 1898년에 탈옥, 전국을 방랑하다가 한때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입산하기도 했으나 곧 환속(1899)하여 안악에 돌아갔다. 1902년 여옥(如玉)이라는 처녀와 약혼하는데, 이듬해 그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이듬해인 1904년 최준례(崔遵禮)와 결혼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도처에서 일제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이 이루어졌다. 이때 그는 진남포 엡윗청년회 대표로 서울에 올라와 상동교회에 머물면서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을 결의하고 그 해 11월 26일, 도끼상소에 참가했다. 1차 상소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진압되고 수십 명이 체포되자, 상동교회에 다시 모인 지도자들은 상소와 같은 구시대적인 방법을 바꾸어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한 교육사업에 진력하기로 하였다. 이후 그는 고향에 돌아와 1906년 해서교육회 총감, 1908년 안악 양산학교 건립, 1909년 재령 보강(保强)학교 교장 등으로 교육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신민회를 통한 구국운동에도 앞장섰다.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서간도에 세울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모으다가 일제에 의해 검거되자, 일제는 이를 총독암살자금이라고 날조하여 사건을 확대시켰으며, 많은 황해도 민족지사들을 검거하는데, 그 또한 1911년 1월 5일 체포되어 17년형에 처하였다(옥중에서 이름을 구, 호를 백범이라 고침).

그 후 그는 1914년 7월 가출옥하여 농촌계몽운동에 힘쓰다가,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을 지냈고, 1923년 내무국장에 취임했다. 이어 1926년 임시정부의 원수인 국무령(國務領) 취임, 1927년 헌법개정으로 위원제로 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취임, 1928년 이동녕·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 조직, 1929년 재중 거류민 단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그가 단장을 맡아 독립투사를 양성하였고, 이듬해 1월 8일 일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과,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등을 지도하였다. 한편 윤봉길의 의거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1933년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으며, 1939년 여러 곳을 전전하다 중경으로 옮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1941년 12월 9일, 곧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그 다음날, 그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하였고, 이어서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작전에 진력하였다. 이어 1944년부터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훈련을 준비하다가 본격적인 국내유격전을 전개해 보지도 못한 채, 연합군에 의해 타율로 8·15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1945년 11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강요에 의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얼마 뒤인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5년간 위임통치를 결정하자, 곧 반탁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가 조직되어 총리에 취임했으며, 1947년 1월 비상국민의회가 개편된 국민의회 부주석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그는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반탁투쟁을 추진했다. 백범의 반탁투쟁 목적은 분명했다. 그것은 곧 항일 세력의 통합으로 외세에 의한 분단을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백범은 1947년 11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를 지지하고, 이듬해인 1948년 4월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 협상을 하는 등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된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반탁전선을 빙자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던 이승만은 그를 소련의 앞잡이로 내세워 모략하는 등 불화가 계속되었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고, 그의 장례는 1949년 7월 5일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집례되어 효창공원에 영면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백범은 한마디로 항일 투사이며, 민족자주평화통일운동의 화신으로 진정한 애국자였다. 여기서는 특히 해방 후 그의 통일 노력 속에 드러난 사상적 지향을 살펴보려 한다.

그때 백범의 사상적 지향은 셋으로 요약된다.

첫째, 군사 통치의 배격­이는 미·소 양국에 의한 점령군 통치, 나아가 미·소에 의한 세계 분할과 강대국의 자기 생존을 위한 동서냉전 이데올로기를 배격하자는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은 “미·소 양군은 철퇴하라”는 말에 분명히 드러나며, 이 점에서 백범의 사상은 2차 대전 이후 동서냉전에 대립하는 최초의 아시아적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둘째, 반외세 반제국주의 투쟁­그는 조국의 분단을 강요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이 일제와 동일한 침략자임을 인식했으며, 마찬가지로 소련이 단독정부를 옹호하며 우리 민족의 통일적 발전을 박탈하는 한 똑같은 침략자임을 분명히 했다. 즉 우리 민족의 통일적 발전과 일치할 수 없는 일체의 외세는 모두 물러가라는 것이다.

셋째, 두 개의 한국 반대, 즉 통일의 쟁취­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들어서면 그것도 독립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분단을 합법화하는 것이다. 그는 분단의 합법화가, 곧 민족의 자주통일 운동을 합법적으로 적대시할 조건으로 변한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면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것이다.

-저서:《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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