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제11강
2006-09-25 19:4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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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11 강>>
나. 시몬의 장모를 고치심<1:29-31>
<비교 : 마 8:14-15, 눅 4:38-39>
이 기사는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기사가 공관복음서에 다 기록된 것을 보아 베드로의 위치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또한, 다른 두 복음서들보다 본서의 기사가 훨씬 더 자세한 것을 미루어 베드로의 회상에 기초한 것 같다.
마가는 이 기사를 【29】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로 시작한다.
원문의 첫머리에 ‘그리고’(카이, καί)가 있어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온 후 이내 있었던 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야고보와 요한은 1:19의 주석을 보라.
시몬과 안드레(1:16의 주석을 보라.)의 집이라고 한 것을 보면, 형제가 한 집에 같이 살았고, 그 집에서 시몬(베드로)이 장모를 모셨던 것 같다. 요한복음 1:44에는 안드레와 시몬(베드로)의 고향을 벳새다라고 했으므로, 언젠가 그 형제가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그 집에 예수님 일행이 방문하였다.
그런데 좀 곤란한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30】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라고 하였다.
시몬(베드로)의 장모라는 말은 베드로가 기혼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베드로는 나중에 선교 여행에 아내를 동반하기도 하였다(고전 9:5).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베드로의 아내가 베드로의 여인 전도를 도왔는데, 이는 규방의 여인 선교의 사도적 선취라고 하였다(Stromata, iii. 6, p. 536, ed. Potter). 그는 또한 베드로와 빌립에게 자녀들이 있었고, 빌립은 자신의 딸들을 며느리로 주었다(Ibid. p. 535, ed. Potter, quoted Eus. H. E. iii. 30. 1)고 하나, 딸들의 이름은 알려 주지 않는다.
베드로가 기혼자라는 사실을 들어, 릴리(J. C. Ryle)는 “천주교의 성직자의 독신의 교리는 성경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다.}(눅 4 :38의 주석).
그렇기는 하나, 신경 쓰고 돌보아야 할 가족들이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데 더 좋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결혼 생활만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독신 생활도 하나님의 뜻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라고 하였다.
시몬의 장모의 상태에 대해 열병으로 누웠는지라라고 표현됐는데, 마태복음에는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마 8:14)으로 표현되었고, 누가복음에는 영의 세계를 아는 의사의 글답게 “중한 열병”(눅 4:38)으로 표현되었고, “붙들린지라”(눅 4:38)로 표현되어 그 중한 열병이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병은 그 악한 영들을 축출함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다.
그 병[퓌레스수사, πυρέσσουσα]은 탈무드에서 ‘불 같은 열병’이라고 하는 것이다. “탈무드에서는 실제로 그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전체가 쇠로 된 칼을 꼰 머리카락으로 가시 돋친 관목에 매달고, 병이 계속되는 날 동안 처음에는 출애굽기 3:2, 3을, 다음에는 3:4을, 마지막에는 3:5을 반복해서 읽게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마술적 처방이 분명하였다. 그와 같이 하여 병이 낫는다고 가정하였다”(W. Barclay).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예수님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예수께 베드로의 장모의 상태를 고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직접 도움을 줄 형편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중개 역할을 하였다. 물론, 사랑의 실천가가 더없이 필요하지만, 또한 사랑의 중개자도 필요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께 대해, 마가는 【31】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에게 지대한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사랑을 행할 준비를 갖추신 예수님은, 열병을 앓는 베드로의 장모에게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예수님이 여인, 그것도 병중에 있는 여인의 손을 만지신 것은 그 당시의 관습을 깨뜨리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제약을 뛰어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 결과에 대해서, 마가는 열병이 ‘떠나고’(부정 과거형인 아페켄, ἀφήκεν)라고 하였다. 즉,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복됐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독특한 권위와 능력에 의한 그녀의 회복은 순간적이며 완전한 것이었다. 이 점은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로 뒷받침된다. 이 말은 또한 은혜를 받은 자의 감사와 헌신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마태와 마가와 누가 모두가 치유됐다거나 나았다거나 고치셨다고 하지 않고, ‘떠났다’(부정 과거형인 아페켄, ἀφήκεν)라고 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의사이며 역사가인 누가는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눅 4:39)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의 원인이 어떤 영의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재도 그러한 원인의 정신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병들이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나 능력 행함의 은사(고전 12:10)를 받은 이들의 기도로 회복되거나 치유되는 일들이 있다. 그러한 일들 중 많은 경우는 먼저 귀신이 축출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성령을 좇아 나타나는 이러한 경험을 하지 못한 이들은 부정하지만, 그들 역시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거나 목격하면 견해가 바뀔 것이다. 자신이 모르거나 체험하지 못한 현상에 대해서는 ‘없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완전히 회복된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었다. 그녀는 앓느라고 못한 일들을 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그들을 섬겼다. 구원받은 우리는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어떤 위대한 스코틀랜드 가족은 ‘섬기기 위해 구원받았다.’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다”(W. Barclay). 주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충분히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랍비들은 여자가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예수께서는 이를 허락하신 점에서 보다 자유스러웠다는 것이다”(E. Schweiz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