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9 강

2006-09-18 20:18 관리자 1523
<<제 9 강>>

2. 예수의 이적[1:21-45]

예수님의 첫 선교에 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여기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축귀(1:21-28),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일(1:29-31),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일(1:32-34), 새벽 기도 및 순회 선교(1:35-39), 그리고 나환자를 고치신 일(1:40-45)로 구성되어 있다.

가.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귀신 쫓음<1:21-28>
    <비교 : 눅 4:31-37>

베드로의 회상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본문은 마가와 누가에 의해 기록된 첫 기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이적의 기사가 복음서 중에 기술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의 초자연성”(山口 昇), 즉 메시아적 인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일을 언급한 마가는, 이어서 그들에 관해 【21】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라고 하였다.
가버나움(Καφαρναούμ)은 구약성경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요세푸스(Josephus)와 랍비 문헌에는 드물게 언급되었다. 이 곳을 오늘의 찬 민예(Chân minje)로 이해하는 학자들(Stanley, Carr)이 있으나,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텔훔(Tell-Hum)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대다수이다.
가버나움은 현재에는 폐허로 남아 있으나, 그 당시에는 동서 교통의 요충지로 인구가 조밀하였고, 어업이 왕성하여 매우 번창한 곳이었다. 이 곳에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의 집이 있었던 것 같다(막 1:29, 마 8:14, 눅 4:38).
행정상으로는 “안티파스의 관할 구역에 가까웠고, 따라서 관세나 통행세를 받는 세관이 있었다(막 2:14)”(F. C. Grant, A. E. Sanner). “갈릴리 바다 서안의 디베리아스가 대표적인 로마인 도시인 것처럼, 가버나움은 대표적인 유대인 도시였다”(이상근).
무엇보다도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선교의 중심지로서 그 의의가 있는 곳이다(마 4:13).
안식일(사바신, σάββασιν)은 일하다가 쉰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에 쉬신 것을 기억하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한 것이다(출 20:11).
현재의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인 안식일은 반드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 즉, 안식일은 거룩한 날일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거룩한 날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안식일로 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날이며, 신자의 정신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예배일로 만들었다. 따라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민 15:32-36, 출 31:14, 15).
■안식일 제도는 포로 후에 생긴 것이라는 학자(마인홀드)가 있으나, 출애굽 시대에도 안식일을 지킨 것 같으며(출 16:23), 문헌에도 주전 9세기(왕하 4:23) 포로 이전 새 달 잔치(사 1:13, 호 2:11, 암 8:5)와 관련된 것 같다. 그러나, 안식일이 시편(92편 제목 제외)이나 욥기나 잠언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포로 후에 국민 생활을 강화하면서부터 느헤미야가 안식일법을 강행하였다(느 10:31, 13:15). 마카비 시대에는 안식일이 유대인의 표가 되었다.
극단론자들은 안식일에는 원수가 쳐들어와도 방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맏다디아는 안식일에도 정당방위는 물론, 필요하면 무기를 잡아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안식일을 복수로 쓰기 시작한 것은 매주 제7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외에 다른 날들도 안식일로 지킨 때부터였다. 그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새 달 첫 날을 안식일로 지켰다. 그 다음은 초막절과 속죄일과 유월절의 첫날과 마지막 날들을 안식일로 지켰다. 제7년 곧 안식년(레 25:1-7)과 희년(해방의 해, 49<7■7>년 다음 해)은 그 전부를 안식일로 생각하였다.
안식일에 대한 구약의 간단한 법은 랍비들 손에서 복잡한 규칙으로 변했다(탈무드의 사받편). 그런데 예수께서는 안식일(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에 대한 규칙뿐 아니라, 안식일 자체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므로(막 2:27) 사람들을 속박하는 랍비들의 안식일 법규는 안식일의 근본 정신에 어그러지는 일이라고 하셨다.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율법과 예언서를 읽는 것과 강의를 듣던 관습(막 1:21, 눅 4:16, 13:10)이 기독교의 주일 예배로 변하게 되었다(행 13:14, 15:21, 17:2).■(골 2:16의 주석).
회당은 쉬나고겐(συναγωγὴν)이며 ‘같이 모이다’라는 뜻이다. 회당에 관사(τήν συναγωγὴν)가 있어 저명한 회당이었음을 표시한다.
현재 가버나움의 폐허에는 고대 회당이 보존되어 있다. 회당에는 회당장과 장로들이 있었고, 이 곳에서 안식일의 예배 외에 아이들 교육도 하였다. 안식일 예배 때에는 율법을 봉독하고 해석하며 기도하였다. 회당장의 허락 아래 나그네(순회 랍비)들도 자유로이 설교할 수 있었다(이상근).
손네(Sonne)는 “회당의 기원은 확실히 알 수 없다. 랍비의 자료들은 무엇이나 핵심적인 것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탈굼(Targum), 특히 위-요나단(Pseudo-Jonathan)의 것과 미드라쉬(Midrash)에 있는 여러 구절들은 유대 민족의 초기부터 회당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같은 사상이 사도행전 15:21의 사도 야고보의 말에 나타난다.
필로(Philo, Life of Moses, Ⅲ. 17)와 요세푸스(Josephus, Apion, Ⅱ. xvii. 75)는 그 제도가 모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명백하게 진술하고 있다.”라고 함으로써, 유대 민족의 초기부터 회당 제도가 시작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시는 것(4:16)과 그 곳에서 가르치시는 것( 요 18:20)은 하나의 습관이셨다. 예수님은 혁명론자가 아니다. 즉, 그분은 자기 백성들의 정상적인 종교 생활을 따르셨다. 그러나, 미구에 유대인의 배척을 받아 회당을 떠나시게 된다. 그와 같은 일은 바울의 선교 여행에서도 발생하였다.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반응에 대해, 마가는 【22】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라고 하였다.
교훈은 디다케(διδαχή)인데, 여기서는 교리(AV)가 아니라 가르침을 뜻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내용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하지 않은 것은 마태복음과 비교해 볼 때에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놀라니는 엑세플레스손토(ἐξεπλήσσοντο)이며 “두려움, 경이, 넘치는 기쁨과 같은 강한 느낌에 의해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을 나타내는 놀라움을 의미한다”(E. P. Gould). “같은 동사가 충격적인 말(막 10:26), 또는 능력 있는 행위(막 7:37)의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J. Gnilka, p. 97).
뭇사람이 그토록 놀란 까닭은 예수님의 권위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기관들(그람마테이스, γραμματείς)은 바벨론 포로 후기의 율법의 전문적인 해설자요 교사들이었다.
본래의 서기 또는 소페르(sôphēr)는 ‘계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켰으며, 여기서 서기관 또는 대서인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서기관이라는 말은 매매 증서와 같은 법적 문서의 책임을 맡고(렘 36:26. cf. 32:15-16), 또한 왕궁에 특실을 가진 공무원에 적용되었다( cf. 왕하 18:18, 렘 36:12). 서기관인 사반은 일종의 재무 행정을 맡았고, 히스기야 통치 때의 서기관인 셉나는 정부의 대신이었다(사 36:3. cf. 22:15). 이와 같이 바벨론 포로 후기의 서기관은 종교적 업무가 아니라, 세속적인 업무에 종사하였다.
또 다른 계급이 있었는데, 이는 제사장 계급이었으며, 율법의 보호자들이었다. 고대의 서기관들이 겨우 그 이름을 제공해 주는 데 비해, 후기 유대교의 서기관들의 신령한 조상들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율법의 제사장적 해설자들이었다.
율법 박사라는 전문적인 계급으로서의 서기관은 바벨론 포로의 상태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율법은 모든 유대 생활의 중심이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연구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이 초기의 서기관들은 단순히 좁은 뜻에서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잠언이나 다니엘 또는 전도서 등에서 ‘현자’, ‘지각 있는 자’, ‘의인’ 등으로 불렸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선택‧확정함에 있어서 바벨론 포로 후기의 율법 박사들에게 혜택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문서들을 해석하는 동시에 함께 모아 소유하는 거룩한 저술가들이었다. 덧붙여 말하면, 그들은 필경사, 편집자, 그리고 성경 본문의 순수성에 대한 보호자이었다.
소페림이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전문적인 율법 교사‧해석자로서 나타난 것은, 서기관인 에스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재건 운동이 일어나던 때이었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 이후의 최초의 율법 박사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스 7:6, 11-12, 느 8:1, 4, 9, 13, 2:26, 36). 그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서기관[학사]으로(스 7:6),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스 7:10). 해석자, 교사의 이중 기능은 전문직의 특징이었다. 율법 교사는 신약성경의 교법사 또는 서기관과 동일하다(눅 5:17. cf. 2:46, 7: 30).
제사장 겸 서기관(cf. 스 7:12)인 에스라처럼 재건기의 서기관들은, 우리의 자료에 의하면(느 8:7, 대하 34:13), 조합 또는 씨족을 이루는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의 가족 중에서 나왔다(대상 2:55).
랍비[서기관들 중 최고의 칭호]의 전승에 따르면, 재건기에 이은 시기는 대 회당 사람들의 규례에 의해 특징을 이루었다. 이 전설적인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서기관들에게서 나온,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었던 것 같다.
초기 헬라 시대에 영향력 있는 평신도 서기관들이 백성들 중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대중적인 평민 정당을 형성하는 데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이 곧 바리새인들이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뛰어난 계급을 대표하였다. 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함께 공회(산헤드린)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유대 관료 제도에서 대제사장과 그 가족들 다음가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대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에 고착되었고,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파에 고착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서기관들의 주요 사업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하까다[Haggadah : 진실, 미담, 교훈, 주술까지 포함된 것이며, 주로 모세와 족장들의 이야기이다.] 또는 종교적 강화를 교화하는 것과는 달리, 주로 할라카[Halachah : 모세 율법에 포함되지 않는 일상 생활의 규범으로 구전이나 관습으로 지켜 내려온 것이다. 이것의 집성을 ‘미드라쉬’나 ‘미쉬나’라고 하는데, 모세 율법 다음가는 권위를 갖는다.]에서 알려진 전통적이며 합법적인 판단을 전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서기관들의 실제적 관심은■이것은 특히 바리새적 서기관들에 적용된다■본문의 쉬운 의미보다 본문 위에 세워진 법적 체계의 보존에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율법의 전문가들인 서기관들(이들 중 최고의 칭호가 랍비이다.)의 의무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율법의 위대한 도덕적 원리로부터 삶의 모든 가능한 정황을 위한 규칙과 규율을 뽑아 내는 것이다. 분명히 이 일은 끊임없는 작업이다. 유대교는 위대한 도덕법으로 시작되었고, 끝없는 규칙과 규례를 만드는 것으로 끝났다. 그것은 종교로 시작되었고, 율법주의로 끝났다.
둘째, 율법과 그 발전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연역되고 뽑아 내진 규칙과 규례들은 결코 기록되지 않았다. 이것은 구전법으로 알려진다. 유대인들은 성문법보다 구전법을 더 구속력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수 세대에 걸쳐 서기관들에게서 구전법을 기억하도록 배우고 전달받았다.
셋째,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 판단을 제공할 의미가 있었다. 당연히 모든 개인의 경우는 새로운 율법을 만들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서기관들의 권위는 적절한 율법 해석에서 파생되었다. 그들 고유의 권위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남의 권위를 빌려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유의 독자적 권위로 가르치셨다. 그분은 권위자들과 전문가들을 인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소리의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요 8:26]. 그분의 대단하고도 긍정적인 확신은 서기관들의 주의 깊은 인용과는 정반대이었다. 그분의 개인적 권위의 음조는 모든 사람의 귀를 사로잡는 음조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요 1:14)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님의 교육 방법과 서기관들의 교육 방법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시나(요 14:6, 18:37), 많은 서기관들의 설교의 특징은 부패하고 회피적인 이성이다(마 5:21-).
둘째, 예수님은 위대한 가치의 문제‧인생 문제‧죽음‧영원을 제시하시나, 서기관들은 종종 사소한 것들로 시간을 낭비하였다(마 23:23, 눅 11:42).
셋째, 예수님의 설교에는 체계가 있었으나, 탈무드(Talmud)가 증거하는 것처럼 서기관들은 종종 잇달아 두서 없이 말하였다.
넷째, 예수님은 보편적인 실례를 사용함으로써 호기심을 자극했으나(막 4:2-9, 21, 24, 26-34, 9:36, 12:1-11), 서기관들의 말은 종종 먼지처럼 건조하였다.
다섯째,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서 청중들의 영원한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말씀하셨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서기관들의 사랑의 결핍은 마가복음 12:40 등과 같은 문장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의 설명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예수님은 단순한 이론적 교사가 아니라 교훈의 구현자이시며 실천가이셨다는 것이다. “마르코에게 있어서 예수의 말의 권위는 권위 있는 행위들이 수반되는 데 나타난다”(J. Gnilka, p. 98).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서기관들은 단지 이론을 위한 교사이었다(12:39-40, 마 15:1-9, 23:2-4, 13-14, 23, 25, 27, 30-34, 눅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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