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8 강
2006-09-12 00:31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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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8 강>>
나. 첫 제자들을 부르심<1:16-20>
<비교 : 마 4:18-22, 눅 5:1-11>
이 전승은 마르코 이전에 독립적으로 성립하였다.......부름에 관한 설화가 두 개인 것으로 보아 제베대오의 아들들에 대한 부름이 나중에 비로소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의 부름에 첨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두 개의 부름을 각각 분리된 것으로 주장하는 주된 논증은, 첫 형제들의 활동인 고기잡이는 야간에 하는 작업인 반면, 그물 수선은 낮에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편집적인 구조를 보면 하나의 상호 연관된 전승이 가능하다. 시칭(時稱)이나 동사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구조적인 틀에 있어서의 율동적인 조화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반복을 피하려고 노력한 이야기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J. Gnilka, p. 88).
베드로의 회상에 근거한 것으로 짐작되는 이 기사는, 【16】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로 시작된다.
이 구절은 안드레가 자기 형인 베드로를 인도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한 일(요 1:40-42) 이후로 생각된다. 이 때에 비로소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갈릴리(1:14의 주석을 보라.) 해변의 해는 탈라스산(θάλασσαν)이며, ‘바다’라고 하는 의미이지만, 셈계의 언어에서는 이 말이 호수라고 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山口 昇). 실제로는 물이 맑은 내지의 호수이다.
베드로(Πέτρον : 헬라 이름이며 ‘반석’의 뜻)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시몬(Σίμωνα : 히브리 이름이며 ‘들음’의 뜻)에 대해 마태복음에는 요나의 아들로(16:17), 요한복음에는 요한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1: 42, 21:15-17)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는 기혼자이었고(1:30, 마 8: 14, 눅 4:38, 고전 9:5), 동생인 안드레와 함께 가버나움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1:16, 21, 29). 그의 성격은 열렬하고(8:32, 14:29-31, 47, 마 14:28-33, 요 18:10) 충동적이며(8:32, 10:28, 마 14:28, 16:22, 17:4, 요 13:8, 18:10) 변덕스러운 데(마 26:33-35, 69-73)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열 두 제자 중 지도자가 되고, 모든 사도의 목록에서 첫 번째로 언급된다(3:16-19, 마 10:2-4, 눅 6:14-16, 행 1:13).
시몬의 동생인 안드레(Ανδρέαν)는 어부였다가 스승인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3:18, 마 4:18, 눅 6:14, 요 1:40-41). 시몬 곧 베드로와 빌립과 함께 벳새다 사람인데(요 1:44), 나중에 가버나움으로 이사한 것 같다(참조 : 1:29, 마 8:14, 눅 4:38).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의 그물은 암피발론타스(ἀμφιβάλλοντας)이며, 손을 사용하여 기술적으로 물 속에 던져 넣는 것인데, 그때의 모양은 펼쳐진 우산과 같았다. 이 그물은 한국의 좽이(투망)와 비슷한 것이다.
당시의 유대 어부들이 사용한 또 한 종류의 그물은 sagēnē[사게네, σαγήνη]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예망 트로올 그물이었다. 이 그물은 아래 부분이 무겁기 때문에, 고물에서 펼쳐 내리면 물 속에 곧추 세워질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 배가 전진하면, 그물의 네 모퉁이가 함께 당겨져 물 속으로 끌려가면서 물고기들을 가두는 큰 가방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W. Barclay).
당시의 어부에 대한 평판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예컨대 Qid( 미쉬나, 토세프타, 탈무드의 문서) 4, 13에 의하면 그 평판은 좋지 않은 반면에, 라삐 예후다(Jehuda : 150년경)에 의하면 경건한 부류로 여겨졌다”(Billerbeck I, 187). 또한, “버질의 melam. 3, 585 이하에 의하면 그들은 가난한 계층에 속한다”(J. Gnilka, pp. 89-90).
예수께서 어부들인 베드로 곧 시몬과 그의 동생인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신 것에 대해, 마가는
【17】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나를 따라오너라(δεύτε ὀπίσω μου)는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예수께 대한 개인적 시중을 포함하는 것으로서의 제자직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E. P. Gould). “이 소명은 믿는 자로서의 일반적인 소명이 아니라, 사도가 되게 하기 위한 특수한 소명이다”(J. Calvin).
“훌륭한 랍비도 제자들을 모았는데, 그 제자들은 랍비에게서 토라[율법]를 배웠으며, 또한 그를 따르며 섬길 의무가 있었다”(G. Bornk- amm). 이 밖에 바리새인들에게도 제자가 있었다(마 22:16).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제자 된 자들의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에 의한 것이다(본절, 1:20, 2:14). 이 부르심은 예수님과의 개인적 결속과 그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른캄(G. Bornkamm)은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 교사들 식으로 율법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교훈을 준다거나, 혹은 그분이 자신의 율법 해석의 전달자로 만든다고 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 p. 91.)는 더욱 자세하게 “예수께서 하느님의 위임을 내세우지 않고, 독자적인 권리에 의해 제자들을 임명하듯이, 제자들은 예수께로부터 학자처럼 토라를 배우는 게 아니라, 바로 예수 자신을 알도록 배우고 그의 가르침을 배운다.”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성직자들, 공회원들, 랍비 학파, 귀족 계급, 부유층 등이 아니라 어부들이었다. 즉,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대한 구체적 지식을 가지고 구주를 대망하였고(요 1:40-42),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산너(A. E. Sanner)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바쁘고 용감한 사람들을 부르고 계셨다.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바다의 위험에 익숙하고, 어부에게 요구되는 인내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필요한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스위프트(C. E. G. Swift)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부르실 때에는 어떤 사람인가보다는 어떤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표준으로 삼으신다.”라고 하였다. 탁월한 지도자는 사람의 현재가 아니라 그의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을 잡은 물고기들로 표현하는 것은 분명히 원시 그리스도교적 선교 용어가 되었다(눅 5:6, 요 21:6)”(J. Gnilka, p. 90).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렘 16:16, 겔 29:4-5, 암 4:2, 합 1:14-17). 구약에서는 주로 심판의 측면에서 비유된 것이고, 여기서는 예수님의 복음에 의한 구원의 측면에서 비유된 것이다. 특히, 시몬과 안드레가 어부인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이 비유는 참으로 적절하였다.
고기를 잘 잡는 어부가 되려면 좋은 장비가 있어야 하고, 물고기의 생태와 어장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물고기를 잡는 기술이 뛰어나야 하고, 부지런해야 하는 것처럼, 전도자는 복음의 진리를 소유해야 하고, 지역 및 지역 주민의 특성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부지런해야 하고, 사람을 끄는 신앙 인격과 언행이 있어야 한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시몬 곧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18】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라고 하였다.
곧(유튀스, εὐθέως : 1:10의 주석을 보라.)은 시몬과 안드레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따른 것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경우에 말씀은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때늦은 순종이란 순종의 가치가 반감되거나 없어지는 것이다.
시몬과 안드레는 생계 수단인 그물(디크튀아, δίκτυα : 그물 전반을 가리키는 말)을 버려 두고 좇았다. 그 형제가 그물을 비롯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은 것(눅 5:11)은,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그 예수님께 자신들의 미래의 운명을 내맡기는 결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결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권위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실상, 이 결단은 생면 부지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으며,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몬은 안드레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요 1:35-42). 그러나, 시몬과 안드레가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눅 4:38-39, 요 1: 35-42)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선택하는 결단에 있어서 이렇다 할 동기가 된 것은 아니다. 이 점은 후에 예수님의 선교 활동이 활발했을 때, 예수님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마 13:55, 요 6:42). 따라서, 그 형제의 결단에 있어서 결정적인 동기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인격과 권위임을 알 수 있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20절의 주석에서 “그것은 본질적인 면에서 은혜의 사건에 의해 뒷받침된 새로운 양식의 행위와 사고이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또 다른 형제를 제자로 부르신 일에 대해, 마가는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라고 하였다.
이 장면의 생생한 묘사는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그 목격자인 베드로의 증언에 접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A. E. Sanner).
세베대(Ζεβεδαίου)는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의 아버지로서만 알려졌고(막 3:17, 10:35), 현재의 사건과 관련해서만 언급되었다(마 4:21, 막 1:20). 그의 아내는 성모 마리아의 자매인 살로메이다(마 27:56, 막 15: 40, 요 19:25).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Ιάκωβον)와 요한(Ιωάννην)은 베드로 다음가는 제자들로서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특별한 신임을 받는 제자 중 제자가 된다(마 10:2, 17:1, 26:37, 막 3:17, 14:35, 눅 6:14). 이 형제에게, 예수님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주셨다(막 3:17 ). 형제의 이름이 함께 나올 때에는 대개 야고보가 먼저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야고보가 형인 것 같다(마 4:21, 10:2, 17:1, 막 3:17, 14:35, 눅 6:14. 비교 : 행 12:2).
특히, 이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의 깁는데는 카타르티존타스(καταρτίζοντας)이며, ‘부족한 것을 온전케 하다’(벧전 5:10), ‘실수나 죄로부터 바로잡다’(갈 6:1), ‘수리하다’(4:21), ‘깨어진 조화를 회복하다’(고전 1:10), ‘순서를 정하다’, ‘정돈하다’(히 11:3), ‘준비하다’, ‘선한 일에 온전케 하다’, ‘보충하다’, ‘활을 세우다’(히 13:21) 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배에서 그물을 수선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신 일과 그 형제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20】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의 부르시니(에칼레신, ἐκάλεσεν)는 단순히 소리쳐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 따르도록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 형제는 가족과 생계 수단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선택하는 어려운 결단을 하였다.
삯꾼들과 배에 대해 말한 것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비해 세베대의 가정 형편이 좀더 부유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