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7강 종말의 징조(13:3-8)
2012-10-11 19:33
관리자
944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시고 성전을 나가실 때에 성전 파괴를 예언하신 후, “베다니로 가시던 길이었던 것 같다”(山口 昇, 마경일). 그때의 일에 대해, 마가는【3】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라고 하였다.
감람산과 성전은 11:15의 주석을 보라.
얼레(R. Earle)는 “감람산 꼭대기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약 61m 아래에 있고,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까지의 거리는 약 800m이다.”라고 하였다. 이 감람산은 예언적 강화에 의해 적절한 무대라 할 수 있다(참조: 겔 9:3, 10:18-, 1:23, 슥 14: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1:16의 주석과 1:19의 주석을 보라.)가 종용히 묻자온대라고 한 마가에 비해, 누가는 명백히 제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단순히 “그들”이 질문을 제기했다고 하고, 마태는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라고 하였다. 역시 마가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다.
종용히(κατ’ ἰδίαν)는 ‘개인적으로’, ‘사적으로’라는 뜻이다. 즉, 제자들이 사적으로 종말의 비밀을 가르쳐 주실 것을 원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서의 독자들은 이제까지 그들이 몰랐거나, 올바로 알지 못한 사실을 제자들을 통해 알게 된다”(J. Gnilka, 하권, p. 245).
사적으로 질문한 내용에 대해, 마가는【4】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하였다.
이런 일과 이 모든 일에 대해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 견해1)와 다른 사건, 즉 전자를 예루살렘 멸망으로, 후자를 세상의 종말인 종국적 완성으로 보는 견해2)가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E. P. Gould, “De Wette, Meyer, Cranfield”(in 이상근), “Marxen”(in J. Gnilka, 하권, p. 245), R. Earle, 마경일.
2) H. Alford, E. Schweizer, D. W. Burdick, J. D. Stevens, C. E. G. Swift, J. A. Bengel, A. E. Sanner, W. W. Wessel, W. Hendriksen, “Lange”(in 黑崎幸吉), C. R. Erdman, “Grundmann”(in J. Gnilka, 하권, p. 245), 黑崎幸吉, 山口 昇.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병행구인 마태복음 24:3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서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와 예수님의 답변을 근거로 삼고 있는 후자가 옳다.
제자들의 질문을 보면, 예루살렘 멸망을 세상의 종말 곧 종국적 완성 직전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생각이 옳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가는【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하였다.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의 미혹을 받지는 플라네세(πλανήσῃ)로서, 플라나오(πλανάω: ‘미혹하다’, ‘속이다’, ‘방황하게 하다’, ‘방랑하다’, ‘배회하다’, ‘빗나가다’ 등0의 의미)의 부정 과거 가정법 능동태 삼인칭 단수이다.
청중에게 미혹하는 자들을 주의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우선적인 경계는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즉, “종말론적 호기심이 아니라, 종말론적 각성이 청중을 지배하도록 하려는 것이다”(J. Gnilka, 하권, p.249). “이 경고의 기본 요소는 자기 백성들에 대한 깊은 목회적 관심이 동기가 된 것이다”(W. L. Lane).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6】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의 이름은 9:37의 주석과 9:39의 주석을 보라.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이 예언이 기독교의 공동체를 향하며, 예수님을 내세워 종말적 구원이 이미 현존한다고 주장하거나, 주장할 수 있는 현실적이거나, 또는 있을 수 있는 미혹자들과 관련된다(J. Gnilka, 하권, p. 249, E. Schweizer).
내가 그로라라고 하는 미혹자들의 사칭은 “단순한 동일시(Beasley-Murray)가 아니라, 구약성서의 계시 공식을 가리키며, 미혹자들을 정당한 메시아적 구원자로 입증하려는 것이다”(J. Gnilka, 하권, p. 249).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람들을 미혹하는 가짜 그리스도들의 출현은 예루살렘 멸망 전에도 있었다(살후 2:1-12, 행 5:36-37, 8:9-10, 20:29-, 21:38, 요일 2:18). 그 후에도 저스틴(Justin, Apology, I. 26:1-3)의 보고에 의하면, 마법사 시몬(Simon)과 같은 사람들은 기도 중에 하나님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더욱이, 이레니우스(Irenaeus, Heresies, I. 23:1)는 시몬(Simon)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아들’(The Son)로,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는 ‘아버지’로,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성령’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1) 또, 바 코치바(Bar Cochiba: A. E. Sanner에 의하면 132년)라는 자는 스스로 완전한 메시아라고 주장하였다(R. A. Cole, D. W. Burdick). 이러한 메시아 사칭자들은 그 후에도 종종 나타나곤 했고,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가짜 메시아의 출현은 종말의 첫째 징조이다. 이 가짜 메시아들에게 미혹을 당하는 것은 재산과 몸과 마음을 빼앗기는 결정적인 손실과 목숨을 잃거나, 심지어 영원한 생명까지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영생을 상실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단의 폐해란 온갖 죄악의 종합 무대인 전쟁의 폐해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종말의 둘째 징조는 전쟁이다. 이 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7】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8a】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라고 하였다.
8절 전반은 7절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난리(폴레무스, πολέμους)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는 전쟁들과 전쟁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전쟁들과 전쟁 소문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있어야 하되는 게네스타이(γενέσθαι: ‘발생하다’)이며, 묵시문학의 특징을 이루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신다는 필연성을 나타내고 있다. “전쟁은 묵시문학적 환난에 속하는데,2) 이 환난은 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E. Schweizer.
2) äth Hen 99. 4; sBar 48, 30 이하, 70, 2 이하; Sib 2, 153 이하; bSanh 97a 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쟁에 의해 시작된다. 따라서, 유다 전쟁이나 성전 파괴와 결부될 뿐 아니라, 메시아적 미혹자들과도 결부될 수 있다.······그러나 이 사건들이 종말의 표징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J. Gnilka, 하권, p. 250). 또한, 그 이후에 있었던 모든 전쟁들, 그리고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전쟁들은 종말의 징조일 뿐이지 종말의 표징은 아니다.
이 점은【8b】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다.
이 8절 후반은 종말의 셋째 징조이다.
어떤 전쟁이나 기근 및 지진 등0의 천재지변을 종말의 표징으로 해석하는 견해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종말의 표징이 아니라 종말의 징조이다. 그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일뿐이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재난(오디논, ὠδίνων)은 해산의 진통을 의미하는 상징어(사 26:17, 66:8, 렘 22:23, 호 13:13, 미 4:9-10)로 랍비 신학에서 메시아의 진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굳어졌다.1) “이것은 종말 이전의 재난의 때를 나타내며, 재난의 때로부터 일종의 고통스런 해산을 거친 다음에 메시아적 구원의 때가 출현할 것이라는 뜻이다”(J. Gnilka, 하권, p. 251).
알렌(W. C. Allen)은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고난에 관해 말하였다. 그 어법에 의해서 그들은 메시아적 구원에 앞서 있을 공전의 고통의 때를 의미하였다(Volz, J\"ud.. Eschat. p. 173ff. Sch\"urer, II. ii. 154-156. 참조: 랍비 엘리아살의 제자가 그에게 사람이 메시아의 고난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세 가지의 재앙, 즉 메시아의 고난, 게힌놈의 심판, 그리고 곡과 마곡의 전쟁. 마지막 날들의 악들에 관한 묘사들<2 Es 15. 16, Apoc. Bar 27. 48:31-37, 70:2-10, Jubilees 23\"16-25, 2 Es 5:1-12, 61:8-25, Enoc 99:4-7, 100:1-6>).”라고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Billerbeck, I. 950. Beasley-Murray, * 38. 주후 90년경의 라삐 엘리에제르(Eliezer)가 이런 상징어를 사용한다”(in J. Gnilka, 하권, p. 251, 주 15).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