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6강 종말론(13장) 성전 파괴(13:1-2)

2012-10-04 01:01 관리자 963
6. 종말에 관한 교훈[13:1-37]

<비교: 마 24:1-51, 눅 21:5-38>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강화는 종말에 관한 교훈이었다. 이 13장은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과 비교하여 ‘소묵시록’이라고 일컬어진다. 본서에서 4장의 비유 말씀 다음으로 길고, 또한 가장 어렵고 복잡한 부분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240)는 “이 말씀은 비유의 장과 분명히 구별된다. 4장이 늘 새로운 서두를 통해 단화들로 뚜렷이 구별되었지만, 예수는 13:5의 도입 장면 다음에, 장면에 대한 언급 없이 13:37까지 계속되는, 그리고 편집 작업의 통일성을 시사하는 말씀을 시작한다. 이 말씀은 이야기 속에서 부름말이 끊임없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만 보더라도 인위적인 결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자료는 대체로 묵시문학적 예고들과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의 로기온과 편집자의 주석 그리고 무화과의 문지기에 관한 두 비유이다. “그러나 어느 부분이 각각 어느 범주에 속하는가에 대하여 커다란 의견 대립이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방식으로 자료를 분류하는 작업은 곤란한 작업이기 때문에 이 방법에 대해서 회의가 일어나게 되었다”(W. W. Wessel).

비아슬리-무레이(Beasley-Murray)1)는 이 강화가 예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할 만한 강력한 이유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웨셀(W. W. Wessel)은 “다만 예수님이 이 내용을 한꺼번에 말하였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마가가 동일한 주제에 대한 설교라고 생각한 자료들을 예수님의 교훈의 의도와 의미를 살려 편집한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 부분은 예수님의 교훈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마가가 그 교훈의 의도와 의미를 살려 자신의 신학적 목적에 따라 편집한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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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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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제는, 이 장의 교훈의 목적과 마가복음에 포함된 이유가 무엇인가 함이다. 이 강화가 성격상 묵시문학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는 구약의 다니엘과 신약의 요한계시록, 그 외에 묵시문학들과 마찬가지로 종말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목적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권면 및 준비를 위한 것이라는 성격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웨셀(W. W. Wessel)은 “마가복음 13장은 온통 권면과 훈계로 채워져 있다. 5-37절을 읽어보면, 열아홉 가지의 명령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강화가 주어진 가장 큰 목적은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교훈을 주려는 데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이 강화에서 종말론과 권면의 말씀을 결합시키시는데, 강조되고 있는 것은 오히려 후자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과 더 나아가 교회로 하여금 그들에게 대적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레인(W. L. Lane)도 “13장의 기본 기능은 비전적인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권고와 대변동의 때에 믿음과 복종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임을 지시해 준다. 심오한 목회적 관심으로, 예수님은 핍박과 선교가 필연적으로 따르는 미래를 위해 제자들과 교회를 준비시키셨다.”라고 하였다. 웨셀(W. W. Wessel)은 “마가복음에 이 강화가 포함된 이유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강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내용적으로 구분하여 주석하는 과정에서 고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1) 이 강화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13:1-2), 종말의 징조(13:3-8), 대환난(13:9-13), 멸망의 가증한 것(13:14-20),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13:21-23), 인자의 재림(13:24-27), 무화과나무의 비유(13:28-31), 그리고 그 때를 위해 깨어 있어라(13:32-37)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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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장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13:5-37을 예수님의 진정한 말씀으로 보는 山口 昇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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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성전 파괴<13:1-2>

그닐카(J. Gnilka, 하권, p. 242)는 “이 종말론적 말씀의 서막은 대체로 마르코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가 일치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기사를【1】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로 시작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신 것에 대해 맨 나중에 언급한 곳은 11:27이다. 그런데 이 13:1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가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닐카(J. Gnilka, 하권, p. 243)는 “예수는 11:27 이후부터 줄곧 머물러 있던 성전을 떠난다.”라고 하나, 11:27과 13:1 사이에 기록된 사건들이 모두 성전 구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본장에서는 전혀 다른 때에 일어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방하다(W. W. Wessel, 山口 昇).

제자 중 하나라고 한 마가에 비해, 마태는 “제자들”, 누가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아마 예루살렘 성전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도취한 제자―베드로?―가 처음으로 탄성을 발했을 것이고, 다른 제자들 역시 그의 의견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컸을 것이다(W. Hendriksen).

제자들이 감탄함으로써 예수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대상물에 대해 마가는 돌들과 건물들, 마태는 “건물들”, 누가는 “미석과 헌물들”이라고 하였다. 이 모든 대상물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들이었다(예루살렘 성전은 11:15의 주석을 보라).

제자들이 새삼스럽게 예수님께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성전을 보시라고 한 것은, 예수께서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8. 참조: 눅 13:35)라고 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즉, “너희 집” 곧 예루살렘이 황폐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성전까지도 그렇게 된다는 것인가 하는 제자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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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은 황폐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는 예언은 약 40년이 지난 후에 거의 글자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성취되었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과장된 비유는 예언된 파괴의 철저성을 시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예수님의 예언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하여 반역했을 때, 베스파시안 황제(Vespasian: 주후 69-79년)의 아들인 디도(Titus)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성취되었다. 로마 군인들은 돌과 돌 사이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 돌을 하나씩 헐어 내면서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리고 그 도시에 거주했던 100만이 넘는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참전했고, 또한 산 증인이었던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의 전투가 거의 종결된 직후에 「유대 전쟁사」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엄격히 말해서, 비록 요세푸스(Josephus)의 친 로마적 성향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의 이야기는 대체로 믿을 만한 것이다. 이 노작은 7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데, 특별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은 4-6권이다. 그 중에 이 구절의 성취를 조명해 볼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그 건물(예루살렘 성전)이 화염에 휩싸이도록 판결을 내리셨다. 그러나 이제 그 운명의 날, 즉 예전에 바벨론 왕에 의해 그 건물이 불태워진 ‘루스 월’(the month Lous)의 주기가 다시 돌아왔다.······상관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막중한 임무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어떤 초자연적 힘에 충동을 받은 한 군인이 불붙은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꺼낸 후에 동료 군인의 도움을 받아 황금 창고를 향해 던졌다.······화염이 치솟았을 때, 유대인들의 비참하고도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예전에 그들이 그토록 애쓰며 지키려고 했던 그 성전이 폐허로 변해 가고 있었다”(VI권, 250-253).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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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성전이 불타고 있었을 때,······나이에 대한 동정이나 지위에 대한 경의도 찾아볼 수 없이 아이들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제사장들까지도 하나같이 학살당했다”(VI권, 271).

“황제는 가장 높은 망대들인 파사엘, 히피쿠스, 마리암느, 그리고 그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서쪽 성벽만을 제외한 전 도시와 성소를 완전히 파괴하도록 명했다.······그 도시를 에워싸고 있었던 나머지 성벽은 미래의 방문객들이 그 현장을 방문할 때, 그 곳에 일찍이 그러한 건물이 있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다”(VII권, 1-3).1)

이 성전 파괴의 예언은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도 말했던 것이다(렘 7:1-15, 26:6, 18, 삼하 17:13, 미 3:122)). 그러나 그 무서운 경고의 예언들을 경홀히 여기거나 무시해 버리고, 오로지 종교의 외적 치장과 형식에 치우쳐 종교적 외화 내빈에 처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랑삼던 성전마저 파괴되도록 버려 두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전 파괴의 예언은 “그러한 일시적인 것에 눈을 멈추고, 마음을 빼앗긴 채, 감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경고로서 뜻이 있다. 그와 동시에 성전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의 이스라엘의 예배 장소이며, 거기서 그들은 희생을 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는데, 이 성전이 붕괴되는 것은 옛 계약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 시대가 올 것을 암시하고 있다”(山口 昇).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라고 하셨다. 이제 구주 예수로 말미암아 산이나 예루살렘 성전 등 어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된 것이다(요 4: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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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Hendriksen, W. Barclay, A. E. Sanner, W. L. Lane, J. Gnilka, 하권, p. 244, 黑崎幸吉, 山口 昇, 이상근, 마경일.
2) A. Barnes는 자신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유대인 저술가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디도의 군대 장관 가운데 하나인 테렌티우스 루푸스(Terentius Rufus)가 보습으로 성전의 기초까지 파헤침으로써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고’(미 3:12)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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