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1강 부활 문제(12:18-27)

2012-08-25 21:36 관리자 915
라. 부활 문제<12:18-27>

<비교: 마 22:23-33, 눅 20:27-40>

그닐카(J. Gnilka, 하권, p. 210)는 “양식상으로 이것은 논쟁 대화이다. 견해와 견해가 서로 대립되며 질문자를 바로잡고 비판하는 대답이 (질문자의) 물음과 대립된다. 이 대답은 ‘아포프테그마’[주 198을 보라.] 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 논쟁이 실제 신학적 토론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불트만(R. Bultmann)은 “이 논쟁이 문학적 전승 부분으로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면, 이것은 확실히 교회 내부의 신학적 토론에서 온 것이리라.”1)라고 하였다.

도입문의 “부활이 없다 하는”은 마가가 삽입한 설명일 것이다. 또, 26-27절은 25절과 결어인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사이에 첨가된 마가 이전의 첨가문으로 가정할 수 있다.

이 단화는 뚜렷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부분(18-23절)은 책잡으려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물음에 집중되는데, 이 물음은 처음에는 단지 짧은 두 진술이 나오고, 모세의 계명을 인용하여 논점을 제기한 다음, 마지막으로 물음을 제시한다. 둘째 부분(24-27절)은 예수님의 이중적인 대답인데, 잘못 생각한다는 질책으로 시작해서 질책으로 끝난다.

마가는 이 단화를【18】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로 시작한다.

본서에서는 여기에만 언급된 사두개인들(Σαδδουκαίοι)은 “대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및 다른 지도층의 단체를 구성하는 귀족 계급이었다고 추측된다. 실제로 그들의 정치적‧신학적 경향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기원과 발달의 문제는, 확실한 사두개 문서들이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확실하다.······사두개인들과 성전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에 관한 이론은, 그 자체가 후기의 자료와 추측에 근거한 것이다”(W. L.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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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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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대왕이 아나넬(Ananel)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때까지의 107년 동안에 28명의 대제사장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난 벤 하난(Hanan ben hanan)만이 사두개인이었다. 그나마 그도 불과 3개월밖에 시무하지 못했다(Josephus, Antiquities, XX. ix. 1).1)

레인(W. L. Lane)은 “사두개와 바리새적 서기관들 사이의 논쟁들은 성전에 대한 분명한 관심을 보여 주지만, 성전의 위계 제도가 사두개인의 신념이라든가, 혹은 사두개파의 전승을 따르는 경향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못 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들은 수적으로 바리새인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들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있었다”(Josephus, Antiquities, XVIII, 17[i. 4]).2) 특히, “그들은 제사장적 귀족 계급이었고 부호였다.······부호들이며 귀족적인 당파들이었으므로, 평온과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적에 대해서도 자연히 협력자가 되었다”(W. Barclay). “그들은 대중의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그들 역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W. W. Wessel).

그들은 성문화된 성서만을 받아들였으며, 모세 오경을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중시하였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많은 구전 율법이나 관습이나 규칙이나 규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그들은 영생을 믿지 않았고, 영혼과 천사, 또는 영적 존재도 믿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부활의 교리가 아주 후대의 성서(사 26:19, 단 12:1-3, 시 73:24?)에만 나오고, 초기 성서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사후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들 중에 더러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나, 그 영혼은 육체와 함께 소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사두개파의 가르침은 사도행전 23:8과 그들을 에피쿠로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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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L. Lane.
2)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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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1)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한 말에 대해, 마가는【19】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선생님이여는 12:14의 주석을 보라.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중 하나인 신명기 25:5-10에 나오는 수혼법(嫂婚法)을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수혼법이란, 아내가 아들을 낳기 전에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의 형제―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가까운 친척(참조: 룻 4:1-8)―가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낳은 첫아들은 죽은 남편의 아들로 간주되어 그의 혈통이 이스라엘의 가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수혼을 거절하는 사람에 대한 권고 사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수혼법이 절대적 구속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계명을 거역할 경우에는 수치를 당하였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오난은 마지못해 수혼을 한 후에, 출생할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땅에 설정했다가, 그만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창 38:8-10).

아무튼, 그런 결혼 형태는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도 행해졌다는 것이 창세기 38:8과 룻기 4:1-12에 의해 확증된다.

수혼법을 말한 사두개인들의 본의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나타난다.【20】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21】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22】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23】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C. R. Erdman), 단순한 이론적 가설인지(W. W. Wessel)는 알 수 없다.

이 어려운 문제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논쟁할 때에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고 믿는 불합리성을 나타내려는 데 본의가 있었다(A. E. Sanner, 마경일).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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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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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된 일곱이라는 숫자는 “이야기를 보다 흥미 있게 만들고, 부활 신앙을 더욱 허무맹랑한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었다”(W. Hendriksen). 또한, 이 숫자는 일곱 남편을 사별한 라구엘의 딸 사라를 간접적으로 상기시킨다(토빗서 3:8, 6:14. 참조: 사 4:1).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는 예수님을 당황하게 만들고, 부활의 모순성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즉, 모세가 부활을 사실로 믿었다면 수혼법을 주었을 리가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213)와 이상근 님은 바리새인들이 같은 질문을 들었다면, 첫 남편의 아내가 된다고 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가는【24】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논박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잘못은 구약성경(율법)과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26절의 후반부에 나오는 성구를 가리키는 것이고, 후자는 창조주 하나님의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시대에도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참조: 벧전 1:11, 벧후 1:20-21, 딤후 3:16)1)을 자기 나름의 합리적 사고의 틀 속에 제한함으로써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이 내주하시는 신령한 자(고전 2:15, 3:1, 14:37, 갈 6:1)가 되어 영적 지각과 지혜와 총명을 갖춰야 한다(골 1:9. 참조: 요 16:13, 고전 12:8).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의 오해함이 아니냐는 플라나스테(πλανάσθε)이며, 직역하면 ‘잘못 생각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규정하신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유다적인 판결과 같으며, 일종의 칭호인 듯한 인상을 준다(지혜 1:16, 17, 에티오피아 에녹서 102:6, 그리고 Suhl, Funktion, 69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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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사도행전 1:16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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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여기에 이미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교회 공동체 측의 변호가 나타나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J. Gnilka, 하권, p. 213, 주 12).

흥미 있는 것은 플라나스테라는 말이다. 이 말은 ‘유랑하다’, ‘길을 잃다’, ‘속다’, ‘잘못하다’, ‘잘못된 곳에 빠지다’ 등0을 의미한다. 즉, 사두개인들이 바른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책망이다.

계속된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가는【25】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예수님의 진술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할 때에는 인류의 멸절을 방지하는 결혼은 필요가 없다. 이것은 부활 때의 인간의 존재와 생활 양식 그리고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부활의 몸은 썩어질 혈과 육으로 구성된 것(고전 15:50)이 아니라,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이다(고전 15:44, 요 3:5).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후의 천국 생활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물론, 부활한 존재의 삶의 자리는 물질 세계인 현세가 아니라, 영적 세계인 내세이다(계 21:1, 요 14:2, 18:36).1)

이어서 예수님은 부활한 의인들에 대해 하늘에 있는 ‘천사들’(1:13의 주석을 보라.)과 같으니라라고 하셨다.

黑崎幸吉은 “부활한 후의 상태는 천사들과 같이 탐욕도 색욕도 없고,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는 영체(신령한 몸)의 존재뿐이다. 남편과 아내와는 서로 알아볼 수는 있으나, 이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고, 다른 이는 배척하려는 그러한 생각은 이미 없고, 모두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써 그러한 상태로 사람을 부활시킨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빅켈스테트(E. Bickersth)는 “부활 후의 복받은 자들은 천사들처럼 순결하고, 행복과 영광으로 특징이 되는 불멸의 영생을 지닌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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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로마서 1:4의 주석과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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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세계에서 부활한 자들이 천사와 같다는 사상은 묵시문학의 사상과 일치한다. 즉, 부활한 자들은 저 세상의 높은 데 거하며, 천사들과 같고(에티오피아 에녹서 51:4. cf. 104:4, 시리아의 바룩서 1:9-), 별들과 같다는 것이다(sBar 51, 10. 참조: 에티오피아 에녹서 104:6). 천사들은 먹지도 않고(토빗서 12:19), 결혼도 하지 않는다(에티오피아 에녹서 15:7).

또한, 내세에서는 부활한 자들이 먹거나 마시지도 않고, 아이를 낳아 번식하는 일도 없고, 장사나 무역도 하지 않고, 질투와 미움과 다툼도 없으며, 의로운 자는 머리에 관을 쓰고 앉아서 하나님의 광채를 즐길 것이다(b Ber 17a).1)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26】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였다.

여기의 모세의 책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키는 것이고,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은 출애굽기 3:1 이하의 글(특히, 3:6, 15)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하의 말씀은 출애굽기 3:6을 인용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출애굽기 3:6을 해석하시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지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고 칭하시지 않았다. 즉, 현재형을 사용하신 것은 그들이 모세의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죽은 자들이나, 하나님 안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된 자들이며, 현세의 삶에서 내세의 초월적인 삶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다(눅 16:19-31, 빌 1:21-23).2)

예수님의 결론적인 답변에 대해, 마가는【27】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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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E. Schweizer, W. Barclay, J. Gnilka, 하권, pp. 213-214.
2) 필자의 누가복음 16:19-31의 주석과 빌립보서 1:21-2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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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이 단언은 하나님께서 죽어 없어진 자에게 하나님이 될 수 없고, 부활 이전이든 이후이든 간에 살아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되신다는 뜻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도 구원 행위도 신실성도 다 허구일 수밖에 없다. 영원불변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 약속과 구원 행위는 인류의 죽음을 한계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이 끊을 수 없는(롬 8:38-39)1) 영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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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로마서 8:38-39의 주석을 보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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