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9강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
2013-03-28 19:06
관리자
2602
<비교: 마 27:45-56, 눅 23:44-49, 요 19:25, 28-30>
a. 1. 운명하신 예수<15:33-37>
불트만(R. Bultmann)은 “33-39절의 보도는 전설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고 있다. 34절은 분명히 37절의 예수의 단순한 부르짖음을 시편 22:2에 의해 이차적으로 해석한 것이다(37절에는 ‘다시’가 없는데 마태에는 첨가되어 있다).”1)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들의 십자가상의 말씀들을 보아 각각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불트만(R. Bultmann)과 그닐카(J. Gnilka, 하권, p. 412)는 35, 36b절도 동시에 이차적임을 말해 준다고 한다. 불트만(R. Bultmann)은 “36a절이 더 옛 것인지, 혹은 더 후기의 삽입인지를 꼭 결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아무튼, 그 서술은 전설적이며, 시편 69:22에 의거한 것이다.”2)라고 하나, 그닐카(J. Gnilka, 하권, p. 413)는 원래적인 것으로 본다. 또, 불트만(R. Bultmann)은 “33절과 38절은 같은 소속의 것으로 예수가 죽을 때의 기사들과 이것을 본 이방인에게 미친 인상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옛 보도가 아니고, 기독교적 전설이다.······39절도 전설적인 발전작에 속한다.
40-41절의 증인인 여인들의 이야기는 역사성이 없다. 도망친 제자들을 등장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용한 것이다. 이 부분은 따로 떨어져 있던 전승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3)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만한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기사가 복음서들 사이에 서로 상이한 점들이 있기는 해도, 이 기사가 존속된 사실을 보아 여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33】제 육 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로 시작한다.
우리의 시간으로 정오쯤부터 오후 3시경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계속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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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346.
2) Ibid.
3) Ibid., p.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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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ὄλην τὴν γήν)은 지구(K. Grayston)1)라기보다는 온 나라 곧 유대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2)
어두움에 대해 시로코(sirocco: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로 부는 열풍) 안개로 생각하는 학자들(Lagrange, Schmid)3)과 자연의 두려움, 또는 자연의 동정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W. Barclay, J. N. Davies)이 있다. 웨셀(W. W. Wessel)은 “아마도 어두움은 태양을 가리는 구름 때문에 생겼든지, 또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인 4월에 예루살렘에서 보통 나타나는 검은 열풍(Black sirocco)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추측도 그럴 듯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마가가 이 어두움을 하나님의 특별한 이적인 초자연적 현상으로 이해한 것4)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현상은 아모스 8:9의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의 성취이다.
이 어두움에 대해 (1) 악마적인 세력의 표현이라는 설(Danker, 50f),5) (2) 죽음의 어둠에서 동트는 새로운 창조의 표징이라는 설(Chrysostom),6) (3) 심판의 예언적 상징이라는 설7)(사 5:30, 60:2, 욜 2:30, 31, 암 5:18-20, 습 1:14-18, 마 24:29, 30, 행 2:20, 벧후 2:17, 계 6:12-17) 등이 있다.
성경의 근거들로 보아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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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424, 주 69.
2) J. Calvin, “Luther, Zahn, Ridderbos”(in W. Hendriksen), M. Henry, W. W. Wessel, “Klostermann”(in J. Gnilka, 하권, p. 424, 주 69), F. C. Grant, E. Bickersteth, D. W. Burdick, R. Earle.
3) in J. Gnilka, 하권, p. 424, 주 70.
4) W. W. Wessel, C. E. G. Swift, W. Hendriksen, D. W. Burdick, 山口 昇, 이상근.
5) in J. Gnilka, 하권, p. 425, 주 73.
6) in J. Gnilka, 하권, p. 425, 주 74.
7) M. Henry, W. W. Wessel, A. E. Sanner, W. Hendriksen, R. A. Cole, E. Schweizer, F. C. Grant, W. L. Lane, J. Gnilka, 하권, p.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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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드릭슨(W. Hendriksen)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예수님의 중심에서 다 타 버렸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대속자(10:45)로서 가장 극심한 고뇌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저주와 무시무시한 고독감, 그리고 버림받으심 등의 고통을 겪으셨다.”라고 설명하였다. 마경일 님 역시 “예수의 죽으심을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세계의 암흑과 비참으로 이해하는 일이 보다 중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어두움은 심판에 대한 예언적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버림받는 세계의 암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점은 다음 구절인【34】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로도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가상 칠언(架上七言)1) 중 마가의 유일한 기록인 엘리(엘로이, ἐλωῒ: 히브리어 음)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시편 22:1의 아람어이다.
엘로이(ἐλωῒ)가 마태복음 27:46에는 엘리(’Ηλί)로 되어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에 대해, 이상근 님은 “예수께서는 일생을 통해 하나님을 늘 ‘아버지’로 대하셨으나, 이 때만은 ‘하나님’으로 부르셨다. 사적 친교의 대상이 아니라 공적 직무의 대상으로 대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동사는 사박다니(σαβαχθανεί)이며, 그 역사적 의미는 하나님의 도움이 철회되어 적들 손에 넘겨져서 훼방과 조롱 속에서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는 시편 기자가, 밤낮으로 신음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묵묵 부답인 데 대해 하나님께도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서 나온 절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절망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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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상의 칠 언의 순서: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마 27:46).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6) 다 이루었다(요 19:30). (7)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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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도 깊은 신뢰감으로 장차 하나님의 구원이 올 것을 찬미하였다(시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 대해서는 (1) 예수께서 시편 22편을 생각해 내시고는 이 시편 전체를 신앙의 표현으로 말씀하시려고 했지만, 너무 쇠약해지셨기 때문에 서두의 부분만 겨우 말씀하신 것이라는 설,1) (2) 예수께서 실제로 버림받으신 것이 아닌데, 버림받으신 것 같은 고독감에 빠지신 것이라는 설,2) (3) 세상 죄를 지심으로써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고통을 토로하신 것(사 53장, 고후 5:21, 갈 3:13, 벧전 2:24)이라는 설3) 등이 있는데,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이 옳다.
테일러(Taylor,p.549)는 “예수의 이 말씀은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타당한 해석은 이 말씀이 극도의 고독감에서 튀어나온 부르짖음이라는 해석이다. 즉, 극도의 고독감 속에서 그가 죄의 끔찍함을 느꼈고, 성부와의 친밀한 교제가 잠시 중단되었기 때문에 이 부르짖음이 튀어나왔다는 것이다.”4) 라고 하였다. 웨셀(W. W. Wessel)은 “어떤 이들은 우리를 위하여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지옥의 정수, 즉 하나님과의 분리를 맛보는 예수님의 완전한 고통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라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무서운 위력을 보게 된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신 예수님이 겪으신 하나님과의 분리의 고통은, 우리 인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유익이 되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예수께서는 죄인이 되신 고통과 죄의 장벽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이중의 고통을 겪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분담하실 수 없거나, 충분히 이해하실 수 없는 인간 경험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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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W. Wessel과 山口 昇.
2) in 山口 昇.
3) E. Schweizer, W. Barclay, “Cranfield”(in A. E. Sanner), A. E. Sanner,“Taylor, p. 549”(in W. W. Wessel), W. W. Wessel, J. Gnilka, 하권, p. 426, 山口 昇, 이상근, 마경일.
4)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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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성부께 버림받은 성자가, 실은 성부의 마음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버림받음이 바로 구원의 뜻을 세우신 성부께 대한 절대적 순종이기 때문이다. 마경일 님은 “이 경우의 예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일이라는 역설(paradox)이야말로 영원과 시간,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이 세상과의 화해의 질서를 표시해 준다.”라고 하였다.
시편 22편을 전체로 보면, 절망 속에서도 깊은 신뢰감으로 장차 여호와의 구원이 올 것을 찬미하는 시이므로, 예수께서 세상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면서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복종하며 기도하시는 심정을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려 보기는커녕, 예수님의 처절한 부르짖음조차도 제대로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실에 대해, 마가는【35】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라고 하였다.
리츠만(Lietzmann)은 유대인이라도 예수님의 소리를,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오해할 수 없다 하여 부정한다.1) 그러나 오해할 소지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십자가의 고통 중이었기 때문에 발음이 명확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엘리야를 부르는 것 같이 들렸을지도 모른다(E. Schweizer). 둘째, 엘리야가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 준다는 전설이 구약 후기에 발달되었다.2) 셋째, 어둠 속에서 갑자기 들려 온 소리인지라 있음직한 일이다(E. Bickersteth, 마경일). 넷째, 엘리야는 메시아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는 신앙이 있었다(W. W. Wessel).
위와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엘리(엘로이)······’를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분위기를 미루어 조롱하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헨드릭슨(W. Hendriksen)과 그닐카(J. Gnilka, 하권, p. 426)는 엘로이와 엘리야의 혼동은 음향에 있어서나 언어학적으로 있을 수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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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마경일.
2) W. W. Wessel, “Cranfield”(in 이상근), 마경일,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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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로, 의도적인 왜곡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즉, 희롱이요 야비한 농담이라는 것이다. 엘리야를 부르는 주제에 메시아 행세를 했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이 한 조롱에 대해, 마가는【36】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라고 하였다.
웨셀(W. W. Wessel)은 “만일 여기에 언급된 음료가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마셨던 신포도주인 포스카(posca)라면, 그것을 가져간 사람은 아마도 병사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융은 스퐁곤(σπόγγον)으로서 ‘해면’, ‘스펀지’를 의미한다.
그 군인은 해융에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였다. 요한복음 19:29에는 우슬초1)로 되어 있는데 갈대와 같은 종류의 식물이다.
가만 두어라는 단수인 아페테(ἄφετε)이므로, 그 군인이 이하의 말을 한 것 같이 이해되나, 마태복음 27:49에는,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군인의 행동을 막는 사람들에 대한 그 군인 자신의 말로도 해석할 수 있고, 그 군인의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한 말로도 해석할 수 있고, 그들 중 한 사람이 한 말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는 동정심이나 “기대감”(J. Gnilka, 하권, p. 427)이 아닌 조롱으로 한 말이다(시 69:12).2)
예수님의 임종에 대해, 마가는【37】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라고 하였다.
큰 소리를 지르시고에 대해 고울드(E. P. Gould)는 임종 직전의 마지막 고통 소리로 이해한다. 그러나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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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슬초는 휘스소포(ὑσσώπῳ)로서 ‘히솝풀’ 또는 ‘우슬초’를 말하는 것이며, 옛날에는 약용으로 쓴 박하의 일종이다. 유대에서는 의식(儀式)과 치병(治病)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우슬초가 마태복음 27:48과 마가복음 15:36에는 “갈대”로 되어 있는데 같은 종류의 식물이다.
2) E. Schweizer, W. Barclay, D. W. Burdick, W. W. Wessel,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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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대개 기운이 전혀―특히, 죽음에 임박해서는―없다는 사실을 미루어 받아들일 수 없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들어, 예수님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면서 운명하신 것으로 이해한 묵시 문학적 정신을 가진 교회가 덧붙인 장식으로 취급하였다.1) 그렇다면, 큰 소리를 지르셨다고 하지 않고, 승리의 소리로 기록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아 후대의 첨가로 보기 어렵다.
예수님의 가상 칠언(架上七言)을 미루어, 기진 상태인 예수님께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E. Bickersteth)이 제공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사람들의 죽음과는 달랐으며, 그의 큰 소리는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헐떡거림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예기하는 승리의 외침이었다(W. L. Lane, W. W. Wessel). 일반적으로 그 큰 소리는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하는 승리의 외침으로 이해되고 있다.2)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여기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를 포함시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큰 소리는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고 아버지의 구원의 뜻을 이루셨다는 의미에서의 승리(골 2:15)와 아버지께 대한 전적 의탁의 외침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운명하시다는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게 되어 운명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Tertullian, Augustine 등).3)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던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운명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죄와 저주와 죽음과 마귀에 대해 승리하셨고,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승리하신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라고 하였다. 이 죽음은 이사야 53:12의 성취이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1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