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3강 공회 앞에 서신 예수(14:53-65) B

2013-02-18 19:47 관리자 1584
웨셀(W. W. Wessel)과 산너(A. E. Sanner)는 어쩌면 거짓 증인들의 증언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13:2)과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요 2:19-22)을 악의로 혼합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들의 증언도 서로 맞지 않은 것에 대해, 마가는【59】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6:60에는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라고 하여 증언이 성립되었음을 나타내었다. 아마 시간을 끌면서 억지로 맞췄거나, 그렇지 않으면 후대의 삽입일 것이다.
마가는 대제사장이 본격적으로 나선 것에 대해,【60】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라고 하였다.

증인들의 증언이 충분하지 못했으므로, 공회의 의장인 가야바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직접 피고인 예수님을 심문하였다.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이 두 질문은 한 질문, 즉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에 대해 아무 대답도 없느냐?’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아무튼, 가야바 대제사장의 질문은 불순한 동기에서 나온 일종의 유도 심문이었다.

그러한 속셈을 아시는 예수께서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은 것(山口 昇)에 대해, 마가는【61】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7. 참조: 사 42:1-4)라고 한 예언을 성취하셨다. 박해받는 의인의 침묵에 관한 모범이 시편에도 나온다.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입에는 변박함이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낙하시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망자 존대할까 하였나이다”(38:14-16. 참조: 시 39:10).

히에버트(Hiebert)1)와 빅켈스테트(E. Bickersteth)는 예수께서는 권위 있게 침묵을 지키실 뿐, 자신의 입을 열어 자신을 변호하시지 않았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독특한 위대성을 엿볼 수 있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자신의 길을 가시는 인자는 침묵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난이나 죽음에 대해서조차도 외적으로나 혹은 내적으로 강력히 저항하게 된다. 인자는 저항하시지 않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겸손히 받아들이신다.”라고 하였다.

가야바 대제사장은 침묵을 지키시는 예수님 때문에 초조해 하면서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질문하였다. 이 조롱 조의 질문은 “모든 핵심을 찌른 것이다”(E. Bickersteth).

찬송받을 자의 아들의 찬송받을 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완곡한 용어이므로,2) 아들은 그리스도와 동격이다(8:29의 주석을 보라).

레인(W. L. Lane)은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인간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물음은 단순히 예수님이 메시아인지에 대한 물음이었고, 예수님의 신성 여부와는 상관없는 물음이었다.”라고 하였다. 다만, 그는 예수님의 메시아 자의식을 짐작했으므로, 그 자의식을 공회 앞에서 고백하도록 유도하고, 그 고백을 증거로 삼아서 신성 모독죄와 메시아 사칭 죄로 몰아 죽일 궁리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6:63에는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가 첨가되어 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맹세하도록 유도할 때나, 법정에서 피고로 하여금 서약하게 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의 진실성에 대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이 맹세는 “맹세 중 맹세이었다”(W. Hendriksen).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W. W. Wessel.
2) J. Gnilka, 하권, p. 370: ‘찬양을 받으실 분’으로 하느님을 표현한 것은 유다교 문서들에도 그 병행구를 가지고 있지만(Billerbeck, II. 51. Bauer, Worterbuch, 638),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이란 표현은 병행구가 없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렇다면, 가야바 대제사장은 살아 계신 하나님까지 이용하면서 매우 교활한 질문을 한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대답하면 신성 모독죄와 메시아 사칭죄로 정죄하고, 아니라고 대답하면 그 동안 메시아인 체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한 점을 들어 사기꾼으로 정죄하려는 교활한 의도에서 질문한 것이다.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그러한 질문을 한 자신의 머리가 비상하다고 자부할지 모르나, 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영적 무지와 교활한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올가미에 걸려들게 하느라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이다.

가야바 대제사장의 교활한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이 비로소 입을 여신 것에 대해서, 마가는【6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예언의 말씀을 따른 용기 있는 침묵을 보이신 예수께서, 이제는 용기 있는 발언을 하신다. 예수님은 침묵할 수 있는 용기와 발언할 수 있는 용기의 표본이셨다. 예수님은 침묵해야 할 때와 말해야 할 때를 분별하는 지혜의 표본이셨다.

내가 그니라(Ἐγω εἰμί)는 대제사장의 교활한 질문에 대한 노골적인 대답이다. 마태복음 26:64에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로 되어 있다. 즉, 내가 참으로 찬송받을 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제 메시아임을 감춰야 할(참조: 1:43) 시기는 다 지나갔다. 이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메시아임을 밝혀야 할 때이다. 더구나 그 곳은 공회이었고, 대제사장이 공공연하게 질문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견해에 의문을 품는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다른 해석을 한다. 그런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山口 昇이 잘 논박하고 있다.

쿨만은 내가 그니라[의 원문](Ἐγω εἰμί) 앞에 σύ εἶπας ὄτι(당신은······라고 말하였다)를 삽입한 사본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채용하여 예수님은 “당신이 나를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라고 대답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자기를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한 사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을 인정은 하셨지만, 대제사장이 쳐 놓은 올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그리스도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피하셨다는 것이다(「신약성서의 그리스도론」). 그러나 이렇게 읽는 것은 마태복음 26:64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마태에 있어서의 헬라어 σύ εἶπας는 긍정적인 뜻이 있다는 것을 쿨만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헬라어 σύ εἶπας를 아람어 ‘아마르다’로 번역해 놓고는, 아람어 ‘아마르다’는 명확한 긍정적인 뜻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쿨만의 논의는 난처해지는 감마저 든다(쿨만과 같은 견해는 R. H. 풀러,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론의 기초」에서도 볼 수 있다).

반면에 한(Hahn)은 헬라어 Ἐγω εἰμί[내가 그니라]는 분명히 긍정적 의미라고는 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그리스도론적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직접 예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고 하여, 그 역사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그리스도론적 칭호」).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되신 이유를 설명하기가 곤란해진다. 십자가상의 죄명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긍정하시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예수님의 계속된 대답은 보충적인 것으로, 그 자신에 의해 마지막 심판이 언급된 것이다. 이 말씀은 시편 110:1과 다니엘 7:13에 관련된 것이다.

인자(2:10의 주석을 보라.)가 권능자, 즉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것은 운명하시고 부활하신 {그가 우주의 지배자이시며(빌 2:9-10, 골 1:18, 벧전 3:22. J. Calvin, W. Hendriksen, 베어), 대제사장이시며(롬 8:34-35, 38-39), 심판자로서의 영광과 존엄(고후 5:10, 딤후 4:1, 8)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오른편은 하나님과 버금가는 최고의 지위이다’(黑崎幸吉).}(엡 1:20의 주석).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13:26의 주석을 보라.

살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불꽃같은 시선 아래 멸망의 심판을 받을 때가 올 것이다.
예수님의 목숨을 건 대답이 대단한 반향을 초래한 것에 대해, 마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는【63】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라고 하였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는 격분한 대제사장의 행동이 아니라, 신성 모독의 말을 들은 재판관의 의례적인 행위로 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의 신성 모독이 입증되면 재판관들은 미쉬나1)의 규정을 좇아 일어나서 자기들의 옷을 찢어야 한다(Sanh 7:5. 참조: 왕하 18:37, 19:1).2) 원래 이 행동은 극심한 분노 또는 슬픔과 고통의 표현이었다(창 37:34, 44:13, 민 14:6, 수 7:6, 삼하 1:11-12, 13:31, 왕상 21:27, 왕하 2:12, 5:7, 8, 18:37, 에 4:1, 애 9:3, 행 14:14).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실상 가야바는 악마적인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공회원들도 거의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똑같은 율법을 좇는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 동기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심지어 악한 살의와 악한 동기로도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사제가 심문할 때, 대사제복을 입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대사제복은 주후 6-37년에는 로마인들에 의해 안토니아 성전 망대에 보관되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이 재판의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 중요했다.3) 그러나 이 보도에서 역사적 세부 사항을 기대할 수는 없다. 복수 형태(키토나스, χιτώνας)는 아주 일반적인 의미의 옷들을 의미할 수 있다”(J. Gnilka, 하권, p. 372). 레위기 10:6과 21:10에 의하면, 제사장복을 찢는 것이 금지되었고, 에스겔 42:14과 44:19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미쉬나(Mishnah)는 구전과 그 해설을 집성한 탈무드의 본문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그 본문을 주해한 부분은 게마라라고 한다. 미쉬나는 대부분 주후 70~220년경에 살았던 랍비들의 토론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이들의 율법적 토론은 점차로 집성되고, 탄나임(Tannites)으로 알려진 학자의 계속적 노력에 의해 성문(成文)이 되었다. 이것을 현재의 형태로 집대성한 최후의 편집자는 랍비 유다 하나시(Rabbi Judah ha-Nasi Patriarch, 주후 135-220)이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버금가는 것으로 유대교도의 신앙생활의 규준인 탈무드의 기초가 되고 있다.
2) 참조: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372, 山口 昇.
3) “Winter, Trial, 16-20”(in J. Gnilka, 하권, p. 372, 주 41).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의하면 대제사장복은 성전 밖에서는 입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때에 가야바 대제사장은 예복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공회의 의장으로서 입는 옷을 입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대담하게 메시아임을 자인하신 것은 예수님의 유죄를 입증하는 일치된 증거를 찾기 위한 공회원들의 노력을 덜어 주었다. 가야바 대제사장은 겉으로는 몹시 분개하고,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라고 하였다.

계속된 가야바 대제사장의 말에 대해, 마가는【64】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라고 하였다.

피고인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증언한 참람한 말(2:7의 주석을 보라.)을 공회원(대제사장을 포함해서 71명) 모두가 다 들었는데, 더 이상 무슨 증인이 필요하겠느냐는 것이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일에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과연 신성 모독죄에 해당되고,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라면 그분을 믿기는커녕 신성 모독 죄인으로 단정하는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신성 모독 죄인들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심각한 위기에서, 살의를 가진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이 일치된 사형 판결은 정식 선고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를 지나야 하고,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 역사적인 불법 재판이 피고인 예수님에 대한 공회원들의 멸시와 조롱으로 끝난 것에 대해, 마가는【65】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1)라고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D a f syp는 변경된 본문을 제공한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리웠다는 말은 생략되었다. Benoit,* 97-99는 이 본문을 택한다. Blinzler,*는 164f에 의하면 이 축소된 본문은 병행구인 마태오복음 26:67절에 동화된 것이다. 이 판단에 동조할 수 있다. 예언하라는 촉구는 여러 사본들에서 역시 병행구인 마태오복음 26:68절에 동화되었다: ‘그리스도여(1242), 그대를 때린 자가 누구인지(Χ Θ 33, 565‧700) 우리에게 예언하겠는가?’”(in J. Gnilka, 하권, p. 374, 주 48).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롤릴슨은 “우리는 이 구절 초두에 주어가 바뀌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면서 마가의 문장 구조가 부정확하다.”1)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에 대해 웨셀(W. W. Wessel)은 “65절 초두의 혹은이나 64절의 다나 둘 다 공회원들을 가리킨다. 공회원들이 그처럼 야만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혹은이라는 주어가 공회원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후반절에 하속들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주어가 변경된 것이 아니다.”라고 논박하였다.

침을 뱉으며는 극심한 경멸을 나타내는 것이다(민 12:14, 신 25:9, 욥 30:10). 이것은 이사야 50:6의 성취로 볼 수 있다.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는 이사야 53:3-5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이 희롱조의 요구는 때리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히라는 것(마 26:68, 눅 22:64)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예언자적‧메시아적인 전권에 관한 것이다. 문맥상으로 이 요구는 성전에 관한 예언자적 말씀에 연결된다.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지참자가 지혜와 특별한 통찰력을 지닐 것으로 기대하였다.2) 레인(W. L. Lane)은 “눈을 가리우고 치면서, 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라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주장하신 데 대한 조롱과 희롱의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이사야 11:2-4에 대한 랍비적 해석에 의하면, 메시아는 보지 않고도 냄새만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하속들도 상전들에게 질세라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때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짓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에 맞아떨어지고 있는 것임을 알 리가 없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W. W. Wessel.
2) “Volz, Eschatologie, 222”(in J. Gnilka, 하권, p. 374, 주 51).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첨부파일

이전 2013-02-18 마가복음 103강 공회 앞에 서신 예수(14:53-65)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