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6강 성전을 정결케 하심(11:15-19)

Author
최세창
Date
2012-07-21 15:06
Views
1325
3. 성전을 정결케 하심[11:15-19]

<비교: 마 21:12-17, 눅 19:45-48, 요 2:13-17>

이 기사는 네 복음서가 다 같이 다루고 있으나(마 21:12-17, 눅 19:45-48, 요 2:13-17), 요한복음의 경우는 공생애의 초기의 기사이므로 문제가 된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사를 같은 사건으로 보는 학자들(Drummond, Sanday)1)이 있으나, 서로 다른 시기에 행해진 사건으로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2) 마이어(Meyer)는 초기의 숙청은 예언자적이었으나, 말기의 숙청은 메시아적이었다고 비교하기도 하였다.3)

공관복음서의 기사 중에서는 누가복음의 기사가 가장 간략하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사는 충분히 병행되지만, 마가복음의 기사가 더 생생하다. 아마 목격자인 베드로의 증언에 의거해서 그럴 것이다.

마가는 이 기사를【15】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로 시작한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다.

성전은 히에론(ἱερόν)이며 성전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 성전은 주전 19년에 헤롯 대왕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작업이 계속되어 주후 64년에 완공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이 성전의 영역은 시온산의 산정을 덮었고, 넓이는 약 121,410㎡이었고, 한쪽 길이가 333m, 다른 한쪽 길이가 433m나 되는 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에서 오는 사람들은―예를 들면 벳새다 근교에서―북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동쪽 성벽은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이상근.
2) J. Calvin, “Bruce, Alexander”(in 이상근), J. A. Bengel, W. Hendriksen, C. E. G. Swift, 黑崎幸吉, 米田豊.
3) in 이상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러 해 뒤에 황금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을 경유하여 성전 경내에서 시내를 건널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해서 겟세마네 동산, 베다니, 감람산으로 가거나, 또는 반대로 올 수 있었다(11:1, 11, 16, 요 18:1).

남쪽에서 오는 사람들은―예를 들어 아래 도성(Lower City)에서부터―훌다의 두 문을 이용하여 이방인의 뜰에 도달할 수 있었다. 두 문 중 하나는 이중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삼중 문이었다. 밖에서 들어오거나 안에서 나갈 때, 모든 문 중에서 이 두 문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윗 도성(Upper City)에서 오는 사람들은 네 개의 서문을 이용하여 성전 경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서문 중 두 개는 두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매우 유용하였다. 그러한 것들의 잔해는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바깥 성벽에는 높은 기둥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기둥마다 잘 다듬어진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쪽과 서쪽과 북쪽에는 세 개의 기둥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고, 남쪽에는 네 개의 기둥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이것은 전승에 의하면, 솔로몬의 궁전이었다는 왕의 행각이 세 개의 방을 가졌던 반면에, 삼 면은 각기 두 개의 방이 나란히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기둥들을 지나서―바깥 성벽으로부터 더 먼 곳에―매우 넓은 이방인의 뜰이 전체 둘레에 있었다. 이곳은 가장 양질의 다채로운 대리석으로 길이 포장되어 있었다. 이 뜰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가 마음대로 있을 수 있었지만, 이방인들은 조금이라도 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의 뜰’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그 제한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방인의 뜰에 의해 직접 둘러싸인 더 좁은 구역은, 헬라어와 라틴어로 ‘타국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전 둘레의 담과 장벽 안으로 들어오지 말 것. 위반한 자는 누구든지 죽음이 따르는 책임을 질 것임.’이라는 경고문이 쓰여진 널빤지가 붙어 있는, 약 1.4m 정도의 높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솔로몬의 행각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이방인의 뜰을 지나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미문을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여인들은 물론, 남자들도 여기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인들은 이 뜰까지만 들어올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큰 방들이 있었고, 보물 창고에 접근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벽과는 반대되는 방향에 헌물과 세금을 두는, 나팔 모양을 한 열 세 개의 금고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훨씬 더 안까지, 즉 비교적 좁은 뜰인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곳과 ‘제사장의 뜰’ 사이에는 단지 낮은 구분이 있었으므로, 어떤 저자들은 이 두 영역을 하나로 생각하였다.

성소와 지성소를 포함한 성소 내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제사장의 뜰’이었다. 성전의 동편에는 매우 큰 번제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성소와 약간 더 가깝고,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물두멍이 있었다. 이 물두멍은 열두 마리의 큰 사자상의 등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놋그릇이다.

끝으로, 성소 자체가 있었는데, 그 규모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일층의 높이가 60규빗(약 27.4m), 길이가 60규빗, 넓이가 20규빗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60규빗의 길이는 다시 나뉘어 첫 부분(성소)은 40규빗으로 되어 있고,······제일 안쪽 부분(지성소)은 20규빗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장엄한 성소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면과 양 옆면을 금으로 장식했으므로, 보기에 놀라운 광경이었음이 틀림없다. 이 성소는 이중의 날개가 달린 행각이나 현관을 경유해서 들어갔다. 성소의 출입구 정면에는 아름답게 착색된 바벨론산 베일 또는 휘장이 쳐져 있었다(마 27:51, 히 6:19. 참조: 9:3, 10:20).

복합 건물인 성전은 동쪽에서부터 서쪽 또는 북서쪽까지 갈수록 높아졌다. 즉,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까지는 14계단을 올라가야 했고, 거기서 이스라엘의 뜰까지는 15계단을 올라가야 했으며,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제사장의 뜰에 이를 수 있었고, 거기서 성소 입구까지는 12계단을 더 올라가야 했다.

성소의 높이는 솔로몬의 성전이 45피트(약 13.5m)인데 비해, 60피트(약 18m)나 되었다(왕상 6:2). 여기에 전 성소를 덮고 있는 윗방의 높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인 60피트가 더해진다. 행각을 제외한 전 성전은 백향목의 박공지붕으로 덮여 있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새들이 지붕 위에 앉아 더럽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성전 꼭대기에는 날카롭게 튀어나온 금못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구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성소에는 금촛대, 진설병상, 분향단이 있다고 한 요세푸스(Josephus)는 덧붙여 말하기를, “그러나 여기(지성소)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금촛대나 일곱 가지로 장식된 촛대는, 디도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로마에서 벌어진 승전 행렬에서 전시했던 성전 보물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1)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답고 웅장했지만, 성전 안에는 교권자들과 종사자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할 정도였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셔서 숙정하신 것이다.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의 매매하는 자들은 안나스와 대제사장들의 가족에게 고용되었거나(W. Barclay, D. W. Burdick) 결탁된2)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물과 제물에 필요한 술, 기름, 소금 향 등을 순례자들에게 팔았다. 그런데 그 상인들은 제사장들에게서 성전 경내에서의 판매권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지불했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폭리를 취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제사장들과 상인들의 부당한 이윤 추구의 대상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순례자들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도 충격적이다.

실은, 순례자들이 임의로 제물로 쓸 동물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도중에 병들거나 죽거나 하여 몹시 불편하고 힘들었으며, 또한 검열에 합격하기도 무척 어려웠다.

“본래는 성전 경내의 일부로 고려된 감람산에 순전한 제물을 살 수 있는 네 군데의 시장이 대제사장이 아닌 공회의 권한 아래 있었다.······ 30년경에는 제도로 확립된 것은 아니지만, 가야바의 허가장을 갖고 경내에서 제물을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W. L. Lane). 그런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참조: W. Barclay, 특히 W. Hendriksen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2) W. Hendriksen, E. Bickersteth, 이상근, 마경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에는 성전이 부당한 이윤 추구의 속된 시장으로 전락되어 버렸던 것이다. 더욱이, 끌고 온 짐승(레 17:1-6, 렘 17:26)이 검열관에게서 불합격 판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거의 모든 순례자들이 성전에서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기도의 준비 장소였던 이방인의 뜰은 소란과 동물들의 울음소리, 불결, 악취 등이 뒤섞여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이 격분하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이 바치게 되어 있는 반 세겔의 성전세(출 30:13-15. 참조: 마 17:24-27)를 옛 히브리나 두로의 돈으로만 받았으므로(F. C. Grant, E. Schweizer), 헬라나 로마나 애굽이나 기타 나라에서 통용하는 돈을 가지고 있는 순례자들을 위해 환전상들이 있었다. 환전상들은 수수료1)를 받을 수 있었으며, 국내 사정을 잘 모르는 교포들을 상대로 얼마든지 바가지씌울 수 있었다.

비둘기는 가난한 자의 제물이며, 여인의 정결을 위해(레 12:6, 눅 2:22-24), 문둥병이 깨끗해졌을 때(레 14:22), 그 외의 목적을 위해(레 3: 14, 29) 사용되는 제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난한 자를 위한 제물로 정해 주신 비둘기조차도 그들에게는 아주 좋은 폭리거리였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성전 밖에서는 9펜스밖에 안 되는 비둘기 한 쌍이, 성전 안에서는 15실링을 지불해야 했다.”라고 하였다. 또한, 탈무드에 랍비 시몬 벤 가말리엘(Simon ben Gamaliel)이 성전 안에서는 비둘기 한 쌍의 값이 금화 한 개의 값어치에 해당하나, 그것을 은화 한 개의 값으로 내려야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는 기사가 있다.2)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Billerbeck(I, 764)은 라삐들이 전해 준 이야기에 의하면, 돈을 바꿔 줄 때, 사람들은 2.1퍼센트 내지 4.2퍼센트의 웃돈을 받았다고 한다고 하였다(in J. Gnilka, p. 하권, p. 174). 비교: W. Barclay는 2펜스의 수수료를 받았다고 한다.
2) in W. Barclay.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성전을 폭리와 사취와 착취의 장소로 바꾸어 버린 자들, 즉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격렬한 행동은 성격상 개혁이나 직접적인 혁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E. Schweizer, W. L. Lane). “예수님의 행동, 즉 비누하스가 자신의 열심에 의해 호소했던 적극적인 경건주의의 흐름 속에서(민 25:6-12, 시 106:28-31, 집회의 서 45:23-, I Macc. 2:54), 혹은 자기 성전에 오시는 주로서 정결케 하신 것은 심판에 대한 직접적 전조(말 3:1-5)로 설명될 수 있다”(W. L. Lane). 그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결케 하여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M. Henry). 그러므로 그 행동은 내용이 상실되고, 형식주의와 종교적 위선으로 변질된 옛 종교(유대교)에 대한 상징적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메시아적인 영적 권위의 발로로서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전혀 새로운 성전의 건설을 상징하는 행위인 것이다”(E. Schweizer).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케 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랍비들처럼 성서적 정당성을 부여하셨다. 이 사실에 대해, 마가는【16】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라고 하였다.

본서에만 나오는 이 말씀은 베드로의 기억에 근거한 것 같다고 생각되어 왔다. 아무튼, 이 말씀은 성전 모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의 서쪽에 이르는 지름길로 성전 경내가 애용되었음을 알려주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1) 이것은 또 하나의 성전 모독이고,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다. 원래 성전에 대해 ‘미쉬나’(1:22의 주석을 보라.)의 베라코트(Berakoth) IX. 5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지팡이나 신이나 돈주머니 또는 발에 먼지를 묻힌 채로 성전의 산으로 가서는 안 되고, 또한 성전을 지름길로 삼거나, 그 곳에 침을 뱉어서도 안 된다.”2)라는 규정이 있다.

성전이 시장이나 길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Billerbeck, II. 27”(in J. Gnilka, 하권, p. 174).
2) 참조: W. Hendriksen, W. Barclay, W. W. Wessel, 山口 昇.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주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그가 상대적인 성결에 대해서까지 강한 신념을 가지고 계셨으며, 하나님께 특별히 봉헌된 장소와 시간에 대해 합당한 존경을 바쳐야 한다는 강한 견해를 가지고 계셨다”(J. Wesley)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언급된 들고 다니는 물건은 일상적인 짐이 아니라 제의에 필요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스큐오스(σκεύος: ‘기구’, ‘도구’)란 말을 사용한 것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1) 이 해석에 의하면, 마르코 이전의 보도는 이미 성전에 대한 예수의 행위를 성전의 숙청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성전 제의에 대한 폐지의 표현으로 보았던 셈이다”(J. Gnilka, 하권, pp. 174-175).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랍비들처럼, 성서적 정당성을 부여하신다”(R. A. Cole).

이 점에 대해, 마가는【17】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라고 하였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는 “예수의 분노와 시위도 그로 인한 어떤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임을 나타내 준다”(마경일).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데에 집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는 이사야 56:7 후반(LXX)의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니라”를 그대로 인용하신 것이고,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는 예레미야 7:11 전반(LXX)의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를 자유롭게 인용하신 것으로, 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전자는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성전에서의 예배가 허용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마가는 만민이라는 말까지 인용함으로써 보다 깊은 신학적 식견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단순하게 “내 집은 기도하는 집”(마 21:13, 눅 19:46)이라고 하였다. 즉,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Schlatter, 212를 참조하라”(in J. Gnilka, 하권, p. 174).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하나님의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란 단순히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방인의 뜰이 더럽혀져 있는 상태만을 의식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렇게 만든 원흉인 교권자들과 유대교가 표명하고 있던 배타성과 분리주의를 겨냥하신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성전의 참 모습을 “희생 제물과의 관계 속에서 은밀한 영적 헌신과 기도와 명상 그리고 교제를 하기 위한 장소라는 것이다(왕상 8:29, 30:33, 시 27:4, 65:4. 참조: 삼상 1:9-18, 눅 18:10, 행 3:1).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그 자신이 유대와 이방을 하나로 만드는 희생 제물이므로(요 11:51, 52), 이사야 56:7에서 제물에 관한 것은 생략하셨다는 점이다”(R. A. Cole).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와 이방을 하나로 만드신 제물로 이해하고 있다(엡 2:13-14, 18, 갈 3:28, 골 1:21-22, 3:11).

그렇다면, “마가는 성전 청결을 순전히 유대인에게 국한된 제도의 원칙적 폐기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E. Schweizer).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와 찬양의 영적 제물이 계속되고 영원히 남아야 되는 복음 교회의 모형으로서 성전을 취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M. Henry).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는 유대인들이 순례자들과 부정직하게 거래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들이 상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예배할 이방인들의 정당한 권리를 강탈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W. W. Wessel). 또한, 이 말은 상인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다교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을 향한 비난이다. 이 비난은 복음서에서 유다교에 대한 매우 혹독한 비난들 중의 하나이다(J. Gnilka, 하권, p. 175).

예수님의 권위 있는 태도에 대한 교권자들의 반응에 대해서, 마가는【18】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라고 하였다.

대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 서기관들(1:22의 주석을 보라.)은 \\'바리새파\\'(2:16의 주석을 보라.)로서, 산헤드린(공회)의 주된 구성원들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대제사장이 복수로 된 것은 전직 제사장들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때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이었고, 전임자는 그의 장인인 안나스이었다(요 18:13).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행 23:9)이 예수님을 죽이는 음모에 일치한 것(참조: 11:27, 14:1, 43, 53)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제휴하여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 것(3:6)과 같다. 나중 일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죄로 인해 원수 관계였던 헤롯과 빌라도가 친구가 된 사실도 수많은 교파로 나뉘어 있는 교계 현실에 비추어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교권자들의 살기를 띤 격분에 대해, 레인(W. L. Lane,)은 “엄격한 서기관식의 율법 읽기와 일치하는 예수님의 행동의 빛에서 볼 때에 참으로 묘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살해 계획은 예수님의 행동과 교훈에 탄복하는 무리 때문에 즉시 실행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종들인 그들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만 두려워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반면에, 백성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행동과 가르침에는 매료되었지만, 베일에 가려진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 점은 나중에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공범자들이 된 것으로 뒷받침된다.

마가는 이 기사를【19】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밖으로 나가더라로 마무리지었다.

예수님은 다른 순례자들처럼, 저녁이 되자 예루살렘에서 나와 베다니에서 유하셨다(마 21:17).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Total Reply 0

Number Title Author Date Views
Notice 관리자 2012.05.23 4100
172 백남신 2024.04.13 259
171 백남신 2024.03.27 488
170 최세창 2023.10.03 302
169 최세창 2023.09.25 251
168 최세창 2023.09.11 264
167 최세창 2023.08.29 251
166 최세창 2023.08.19 278
165 최세창 2023.08.11 276
164 최세창 2023.08.02 255
163 최세창 2023.07.25 253
162 최세창 2023.07.19 242
161 최세창 2023.07.11 233
160 최세창 2023.07.01 246
159 최세창 2023.06.21 268
158 최세창 2023.06.12 238
157 최세창 2023.05.31 253
156 최세창 2023.05.24 245
155 최세창 2023.05.17 251
154 최세창 2023.05.12 248
153 최세창 2023.05.05 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