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44 강
Author
최세창
Date
200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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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Salvation Before Jesus Came/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44 강>>
13. 유대 교권자들과의 논쟁[7:1-23]
이 긴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승사적 관점에서 매우 다양하게 평가해 왔다. 불트만(R. Bultmann)은 이사야의 인용문을 들어 율법 학자들에 대해 논쟁하는 1-8절을 이 단화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여기에 마가가 전승사적인 교회 공동체의 논쟁인 9-13절을, “또 가라사대”(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통상적인 접속 공식으로 덧붙인 다음, 또 다른(가장 오래된) 전승 요소인 15절을 연결했다고 한다. 여기서 마가는 군중을 가르치신 것과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을 구별하였으며ㅡ이 구별은 마가에게 있어서 전형적인 것이다ㅡ18절 후반과 19절은 전승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끝으로, 20-23절은 마가 자신이나 “헬레니즘계의 저자”에게서 유래했다고 본다.
그와 달리, “디벨리우스(M. Dibelius)는 고르반 관습에 의한 넷째 계명의 위반에 대한 고발인 9-13절을, 손을 씻는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가장 오래된 통일된 단락으로 본다. 그 다음 단락은 15절의 내용인데, 17-19절과 20-23절은 이 15절에 대한 해설로서 15절의 철저성을 충실히 지키지 못한 교회 공동체의 가르침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1-5절은 마르코가 작성한 것이지만, 이사야 29:13을 적용한 6-8절은 다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들을 묶어 주는, 아마도 마르코 이전에 이미 작성된 연결문이라는 것이다”(J. Gnilka, pp. 350-351).
이러한 견해들 외에도 여러 견해가 있지만, 앞의 두 견해와 마찬가지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정확한 분석‧평가를 뒷받침해 줄 만한 근거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8절은 구조에 있어서 2:23-26을 상기시키는 논쟁 대화이다. 제자들의 행동에 관련된 적대자들의 구체적인 항의에 이어 구약을 인용하는 예수님의 원칙적인 대답이 나온다. “이 전승은 칠십인역에 의존한 이사야 문구 때문에 헬레니즘적 유다-그리스도교적 교회 공동체에 돌려야 하는데, 여기서 제기된 물음 역시 이 공동체에서 문제되었던 것이다. 2절과 11절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3-4절의 삽입구는 유다교를 멀리했던 이방 그리스도교적 청중으로 하여금 제기된 물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삽입구는 ‘모든 유다인’이라고 말함으로써 과장이 섞여 있고, 역사적으로도 옳지 않으며 어느 정도 공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러 저자들이 이 삽입구를 마르코 이후에 작성된 각주로 보려 한다. 그러나, 이 삽입구가 5절로 이어짐으로써 2절의 이야기 줄거리가 5절에서 반복되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르코의 작성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J. Gnilka, pp. 351-352).
접속 공식인 “또 가라사대”로 미루어 마가는 전승으로부터 물려받은 9-13절의 단락을 첨가하였다. 그리고 마가가 14절의 도입구를 만들었거나 새로 형성했다 하더라도 군중을 가르치신 일과 제자들을 가르치신 일을 구별한 것은 마가 이전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긴 이야기가 여러 전승의 결합체이며, 특히 이방인 독자들에게 의식적 정결과 참된 의미의 정결인 영적‧도덕적 정결을 가르치기 위한 의도를 담은 것이라는 정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부정(不淨)의 문제(7:1-8), 부모 공경과 고르반(7:9-13), 그리고 부정(不淨)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7:14-23)로 구성되어 있다.
가. 부정(不淨)의 문제<7:1-8>
유대의 유전을 둘러싼 논쟁의 기사는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에 있어서도 심각한 문제이었다. 특히, 유대인 교인들에게는 유대의 유전이 어느 정도의 구속력을 갖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마가는 첫 단락(1-8절)을 【1】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로 시작한다.
바리새인들은 2:16의 주석을 보고, 서기관은 1:22의 주석을 보라.
이 구절 첫머리의 의미는 (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일 수도 있고, (2) 바리새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으나 서기관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테일러( Vincent Taylor)는 후자를 취하지만, 일반적으로 전자를 취한다.
지방의 교권자들의 요청(J. Gnilka, p. 354, 마경일)과 산헤드린의 명령을 좇아 이 곳에 온 예루살렘의 교권자들(W. Hendriksen)은 지방의 종교 권위자들보다 더 엄격하고 정통적이다(F. C. Grant). 따라서, 그 학자들(교권자들)은 그 권위가 알려져 있었으며(J. Gnilka, p. 354), 어디를 가든지 굉장한 존경을 받았다(黑崎幸吉).
이들이 온 목적은 예수님과 그분의 일행에 대해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가가 예수께 대한 반대의 중심지로 예루살렘을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3:22).
적들의 정탐 행위가 이내 소득을 얻은 것에 대해, 마가는 【2】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라고 하였다.
부정한 손의 부정한은 코이나이스(κοιναίς)이며, 문자적으로는 ‘보통의’라는 뜻이다. 후기 헬라어에서는 ‘정상적인’, ‘통속의’, ‘선택 또는 신성한 것과 구별되는 세속적인’ 등을 의미하였다(E. P. Gould). 그러므로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었다는 것은 단순히 손을 씻었다거나 씻지 않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규례대로 씻었는가 규례대로 씻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위생적인 위반이 아니라 제의적인 관습의 위반에 대한 것이며, 그들의 경건성을 문제삼는 것이다”(J. Gnilka, p. 355). 누가복음 11:38에 의하면, 예수님도 제자들과 같이 행동하셨다.
부정한 손을 씻지 아니한 손이라고 설명한 것은 이방인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레인(W. L. Lane)은 주로 손을 씻는 것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였다.
밀접한 병행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Letter of Aristeas ■ 305)에 있다. “모든 유대인들의 습관과 같이 손을 씻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씻어야 한다는 성경적 명령(출 30:19, 40:13)은, 팔레스틴과 디아스포라 유대교에 의식적 씻음이 널리 퍼진 관행이었다는 것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준다. 적어도 주전 2세기밖에 안 된 이른 때에 많은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제사장들의 정결법을 취해 아침 기도 전에 규칙적으로 손을 씻었다(E.g. Judith 12 :7 ; Letter of Aristeas ■ 305 ; Sibyline Oracles III. 591-593). 이어 드리는 감사 기도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를 위한 것이었다. 즉, “오, 주여, 우주의 왕이시며, 율법으로 우리를 성결케 하시고, 손을 씻도록 명하신 당신께 감사하나이다”(TB Bearchoth 60b).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은 또한 제사적 관행에 근거되었다. 매일의 음식은 마치 그것이 제사적 음식인 것처럼 먹어야만 한다는 확신에서 주후 3세기에는 씻지 않고 먹는 것은 강력하게 단죄되었다(TB Bearchoth 62b).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명백한 경향이었던 것 같다. 바리새인들은 의식적 부정에서 자기들을 보존하는 열심에 있어서 제사장들을 능가했고, 제사적 규정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의무로 고려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신자의 제사직’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들이었다(레 20:26).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엄격한 훈련이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에 필요한 전조가 된다고 확신하였다(E.g. TB Nazir 23b : “사람으로 율법을 배우게 하고 불순한 동기로라도 계명들을 준수케 하자. 이는 때가 되면, 그가 선한 동기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레위적인 정결 예법에 대해서는 그닐카(J. Gnilka, p. 355)가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유다교의 레위적인 정결 예법은 오늘날에는 실행하기 어려운 종교적 관행이다. 이 예법은 구약성서-유다교만이 아니라, 수많은 고대 종교에서 발견되는 사람‧짐승‧기구‧일 등에 있어서 청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을 전제한다. 처음에 이런 구별을 할 때에는 하나의 표상이 있었는데, 그 표상이란 인간이 거룩한 것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고양된 상태에 있어야 하며, 신성을 손상하거나 신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들에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예비적인 정결 행위로써 인간은 신과 만날 수 있는 정결하고 거룩한 상태를 부여받게 되며, 속죄하는 정결 행위를 통해 부정한 것과의 접촉에 의해 상실될 수 있는 이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레위기 11-15장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구별되어 있으며, 성교, 임신, 질병들로 인해 생긴 부정한 것들이 언급된다(레위 11:19, 23-25, 신 14:3-21, 19:5, 1-4). 이 규정의 중심에는 이스라엘이 거룩하고 깨끗한 땅에 사는 거룩하고 정결한 백성이어야 한다는 사상이 담겨 있지만(레 20:7), 거룩을 물질적으로 규정한 데서 빚어지는 위험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다. 레위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은 부정한 인간이나 부정한 사물에 물질적으로 덧붙어 있으며, 따라서 씻거나 물을 뿌리거나 물에 담금으로써 벗겨낼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레위적인 정결이 윤리적인 정결의 상징이 될 수도 있지만, 특히 예언자들은 표면적인 레위적 정결 요구에 항거하고, 그 요구를 문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예수는 이렇게 비판함으로써 예언자들의 계열을 이어받고 있다.
예수 시대에 유다교에서 행한 정결을 위한 관행에 대해, 우리는 쿰란 문서를 발견한 이래 보다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바리사이파의 관행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에쎄네파에서도 바리사이파에서도 사제의 관습과 습관을 일반인들에게까지 적용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제의적으로 씻는 일과 목욕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미쉬나에서는 열 두 장 이상(전체의 마지막 부분)이 정결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A.D. 70년 이전의 시기를 추론할 수 있다. 부정의 다양한 정도에 대해 결론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부정하게 하는 그릇들과 기구들이 언급되어 있고, 물을 담는 정도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구별되어 있다. 세부적인 규정들이 종교인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윤리적인 정결이 제의적인 정결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보다 많은 자유를 주장하는 증언들도 찾아볼 수 있다.
에쎄네파는 외부 사람들의 정결을 인정치 않았으며, 그 서열에 따라 에쎄네파 사람들은 정결의 상이한 단계에 속한 것으로 구별되었다. 오늘도 쿰란 유적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이 제의적인 공동 식사를 하기 전에 사용했던 목욕탕 시설을 살펴볼 수 있다. 레위적인 정결을 강조하면서도 사람들은 생활 태도의 갱신이 절실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호수나 강에서는 자신을 성결케 할 수 없으며 어떤 물로 씻어도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없다. 하느님의 법을 무시하고 그의 권고를 따라 정숙하게 살지 않으면 그는 부정한 상태에 남아 있게 된다”(종도의 규례 3, 4-6). 율법학자들에 의해 확정된 식탁에서 손을 씻는 일은 식사 전과 식사 후에, 경우에 따라서는 식사 도중에 행해졌으며 사제들의 성전 식사에서 점차 일반 식사에서까지 행해진 것으로 설명된다. 손을 씻지 않는 사람은 레위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이 습관의 근거를 대기 위해 사람들은 레위기 15장 11절을, 특별한 경우에는 레위기 20장 7절을 내세운다. 사람들이 관습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는 감옥에서 손을 씻지 않고 먹기보다는 차라리 굶기를 바랐던 라삐 아카바의 이야기가 잘 말해 준다.
마가는 계속해서 부정한 손에 대해, 【3】(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유대인들의 모든(판테스, πάντες)이라는 관형사는 성경에서 종종 그러하며, 오늘날의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그러하듯이 막연하게 사용되고 있다. 즉, ‘아주 많은’, ‘대다수의’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W. Hendriksen).
“실제로,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규정을 준수했고, 일반 백성은 이 규정들에 대해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더군다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사제들의 관습을 일상적인 종교 생활에까지 적용하는 데 대해 항거하였다”(J. Gnilka, pp. 356-357).
장로들의 유전의 장로들은 프레스뷔테론(πρεσβυτέρων)이며, ‘옛 사람들’, ‘조상들’, ‘노인들’, ‘선조들’을 의미한다.
장로란 원래 ‘늙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었으며, 따라서 장로의 권위의 참 근원은 나이에 있었다. 장로란 연장자(욥 32:4)나, 한 가문의 어른(창 10:21)이나, 한 지파의 장(레 4:15)에게 적용된 명칭이었다. 장로는 씨족 사회, 또는 부족 사회의 권위 있는 존재이었다(출 18:13-). 신명기 1:13에는 관원으로 되어 있으나, 출애굽기 18:12에는 이미 이 같은 관리들이 선출되기 전에 장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민수기 11:16 이하에는 이스라엘 노인 중에 관원인 장로들 중에서 70인을 선정하여 이스라엘의 장로회를 구성한 것을 말하고 있다(비교 : 출 24:1, 9). 그들은 전투 지휘자, 논쟁의 재판관, 충고와 권면자, 혹은 행정상의 증인 등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대표하는 공동체의 초점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레 4:13-21, 신 21:1-9).
{“그 후부터 장로는 유대인 생활의 전통적인 특색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예언자의 친구로서의 장로(왕하 6:32)나, 왕의 충고자로서의 장로(왕상 20:8, 21:11)나, 국가의 정사를 맡아보는 행정관들의 동료로서의 장로(에 10:8)를 찾아볼 수 있다.......장로들은 회당의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설교는 하지 않았으나 회당의 행정과 질서를 맡아보았고, 또 회원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였다”(W. Barclay).}(벧전 5:1의 주석).
신약 시대의 각 유대 공동체에는 장로회가 있었다. 디아스포라에서는 장로회를 보통 게루시아(γερουσία)라고 하였고, 장로들을 아르콘테스(ἄρχοντες)라고 불렀다. 물론, 장로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71명으로 구성된 의회인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이었다. 산헤드린(공회)은 유대 민족의 ‘절대적 법정’으로 봉사하였다.
{장로 제도를 가지고 있던 민족은 유대만이 아니었다. 스파르타의 지도층은 ‘장로회’란 뜻인 게루시아(γερουσία)라고 불렸다. 로마의 의회는 ‘원로원’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노인이라는 뜻인 세넥스(senex)에서 유래되었다. 영국에서는 공동체의 사항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장로들’이란 뜻인 알더멘(aldermen)이라고 불렀다. 신약 시대의 애굽에는 어느 마을에나 공동체의 문제를 처리하는 장로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장로에는 오랜 역사가 있었으며, 거의 모든 사회에 장로와 같은 지위가 설정되어 있었다(W. Barclay).}(딤전 3:1의 주석).
{“소아시아에서도 협의회의 회원들이 장로들이라고 불렸다. 심지어 이교 세계의 종교 단체들에도 훈련을 책임진 ‘장로 제사장들’이 있었다. 우리는 소크노파에우스(Socnopaeus) 신전에서, 지나치게 머리를 길게 기르고, 양의 털옷을 입었기 때문에 비난받고 있던 어떤 제사장의 문제ㅡ제사장은 여자 같이 하는 것과 사치의 죄를 범해서는 안 되었다ㅡ를 처리한 ‘장로 제사장들’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W. Bar- clay).}(약 5:14의 주석).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교회가 ‘장로’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전부터 유대 세계나 그리스와 로마 세계 등에서 명예로운 칭호로 사용되고 있었다.
교회의 장로직은 유대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처음 얼마 동안은 나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장로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러다가 교회가 점점 부흥하게 되니까 조직적인 교회 관리와 지도를 위해 장로 제도를 만든 것 같다. 그러나, 교회의 장로들이 처음 임명된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이스톤(B. S. Easton)은 “야고보서의 말씀(약 5:14)은 장로들의 통치 아래 있는 교회의 공적 조직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다.”라고 하였다. 깁손(E. C. S. Gibson)은 “장로 제도의 시작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장로들은 사도행전 11:30에 이미 있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행전 14:23에서,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첫 선교 여행 때에 설립했던 모든 교회 안에 장로들을 임명했다는 것을 안다.”라고 하였다[참조 : 딛 1:5]. 간혹 사도들이 자신들을 장로라고 부르기도 했지만(벧전 5:1), 일반적으로 장로는 사도들보다는 낮은 지위(이상근)로서 교회를 대표하는(黑崎幸吉, 박윤선) 지도적 위치를 가진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다(J. Calvin, M. Henry, R. R. Williams).}(약 5:14의 주석).
장로들의 임무는 병자를 심방하여 기도하고(약 5:14), 교훈과 권면을 해 주고(롬 11:8, 살전 5:12), 가르치는 일을 힘쓰고(딤전 5:17), 재정 관리를 하고(행 11:30), 다스리고 심령을 돌보는 것이다(행 20:28-29).
여기의 장로들은 힐렐이나 샴마이 같은 고대의 율법 대가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전은 파라도신(παράδοσιν)이며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교리’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기록된 율법과 더불어 구전으로 전하게 한 구전법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오히려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전자가 물이라면 후자는 포도주와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 구전은 모세가 먼저 아론에게 전하고, 아론은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또한 12지파의 대표인 72인에게, 그리고 72인은 각 족장에게, 그들은 모든 회중에게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구전은 주전 66-70년경에 바리새인들에 의해 성문화되어 미쉬나(Mishna)라 불렸으며, 유대 민족의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다(마 15 :2, 6 막 7:3, 13, 살후 2:15).}(골 2:8의 주석). 그러나, 예수님은 유전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으셨다.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의 부지런히는 Δ 사본에는 생략되었고, A, B, K, L, X, Θ, Π 사본 등에는 퓌그메(πυγμῇ : 주먹)로 되어 있고, א, W 사본 등에는 퓌크나(πυκνά : 흔히)로 되어 있다. “이 낱말은 (1) 손목까지, (2) 주먹을 둥그스레하게 쥐고 손바닥 안으로 문대는 것, (3) 물을 손 하나 가득히 담아서, (4) 미리, (5) 열심히, 또는 자주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이 번역은 (5)에 의한 것으로, 후자를 따른 것 같다”(黑崎幸吉).
헨드릭슨(W. Hendriksen)은 탈무드의 소 논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손이 부정해지고 정결해진다 함은 손목까지 그러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 되는가? 그가 손에 물을 부을 때에 손목까지 붓고, 두 번째로는 물을 손목에 넘게 붓고, 다시 손으로 흘러내리게 했다면, 손들은 역시 정결하게 된다.”
{반즈(A. Barnes)는 “그들은 씻는 일에 관하여 여러 가지 어리석은 규칙들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사용하는 물의 양, 그 물을 사용하는 방법, 물을 바꾸는 횟수,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 등 세세한 규칙들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마 15:2의 주석).
이어서 마가는 【4】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라고 하였다.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의 물을 뿌리지 않으면(메 란티손타이, μή αντίσωνται)은 א, B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 A, D, K, W, X 사본들에는 “목욕하지 않으면, 침수하지 않으면, 물에 담그지 않으면”(메 밥티손타이, μὴ βαπτίσωνται)으로 되어 있다. 어느 쪽을 취해 어떻게 의역하든 간에 요지는 손을 물에 담가 씻지 않는 것(J. Wesley, W. Hendriksen, “Lightfoot”)이나, 전신을 물에 담가 목욕하지 않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바로 앞에서 손을 씻는 것에 대해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레 14:8, 9, 15:5, 6, 8, 10, 11, 13, 16:4, 24, 26).
그닐카(J. Gnilka, p. 358)는 “제의적으로 쉽게 부정탈 수 있는 시장(저자)에서 돌아온 유다인이 하는 전신 목욕이 그들의 정결 관행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로 제시된다. 이것은 좀 과장된 것 같다. 그러나, 디아스포라의 몇몇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해 주는 일들을 특히 강조했을 수 있다. 유딧(Jdt) 12장 7절과 시빌리넨(Sib) 3장 591절 이하가 이것을 확증해 줄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정결 의식은 식기와 가구에까지 미쳤다(2절의 주석을 보라). 이러한 정결 예법에 대해, 黑崎幸吉은 “이러한 습관 그 자체는 위생적으로 좋은 습관이었으나, 양심상의 선악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문제도 아니다. 이 양자를 혼동하여 형식만으로 하나님에게 용납되리라고 생각하는 점에 대하여 예수는 반대하셨다. 그 때문에 위생적인 좋은 습관조차도 무시하셨다.”라고 올바르게 결론짓고 있다.
3, 4절의 삽입 설명을 마친 마가는 다시 2절로 돌아가서, 【5】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하였다.
이 질문은 제자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예수께 대한 질문을 빙자한 혹독한 비난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가는 【6】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였다.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예수님의 답변이다.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내세우나, 예수님은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워 논박하셨다. 인간의 전통과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 인간적인 선과 하나님의 선, 종교적 형식주의와 종교적 내용, 종교적 위선과 종교적 사랑 등의 대립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서슴지 않으시고, 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비판하신 것이다.
외식하는 자 곧 위선자는 휘포크리톤(ὑποκριτών)이며 원래는 무대의 배우를 가리켰다. “현대의 전자 증폭 체계가 없었던 당시에는 배우들이 자기들의 소리를 25,000명이 앉는 관람석 전체에 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확성기를 숨길 수 있는 커다란 가면을 썼다. 이와 같이 위선이란 가짜 얼굴을 쓴 사람을 가리켰다. 따라서, 그는 본래의 자기가 아닌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R. Earle). 즉, 자기의 악하고 불의한 의도를 숨기거나 가장하고, 칭찬과 유익을 얻기 위해 위선적인 언행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의 전통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에 위선자들이다.
너의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사야 자신의 시대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그 자신의 때의 유대인들에게도 적용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D. W. Burdick).
기록하였으되는 이사야 29:13(비교 : 겔 33:31)을 가리키는 것인데, 인용된 내용과 히브리 원문이나 칠십인역과는 약간 다르다. 당시의 회당에서 널리 사용된 탈굼(구약성경의 아람어 역)에서 인용했거나, 혹은 예수님 자신의 자유로운 인용일 것이다. 그 요지는 마음에도 없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p. 359)는 “적대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에서 대립되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고백과 진심으로 드리는 공경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공경과 인간의 계명이다.”라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7】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들은 본래 신적인 교리들을 가르치는 듯이 가장하나, 실제로는 사람의 계명, 즉 자질구레하게 세분하며 형식에 구애되는 고대 랍비들ㅡ단지 인간에 불과한 이들!ㅡ에 의해 주장되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진 하찮은 규례와 규칙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마 6:2, 5, 16, 23:23-28)”(W. Hendriksen).
또한, 그들은 입술로는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제자들의 위반을 염려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예수님의 비판의 결론에 대해, 마가는 【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계명이란 인간의 말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전달자의 말을 통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인간(장로 곧 고대 랍비)의 말만을 중히 여겨 지켰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이 잘 설명하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인간의 유전에 불과한 것을 하나님의 계시 위에 올려놓고, 인간이 만든 규례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위에 올려놓는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랍비들은 모세의 율법 또는 토라를 613가지의 독립된 법령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그 중 365가지는 금지 조항으로, 248가지는 지시 조항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그들은 그 각각의 법령에 관하여 자의적으로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구별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모든 행위를 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규제하려고 시도했었다.......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법령을 늘리고, 그러한 법령들을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 적용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훈계에 훈계를 더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였다(참조 : 사 28:10, 13). 그렇게 하기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통일성과 목적(신 6:4, 레 19:18, 미 6:8. 참조 : 막 12:28-34)이 완전히 상실될 때까지 계속하였다.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Salvation Before Jesus Came/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44 강>>
13. 유대 교권자들과의 논쟁[7:1-23]
이 긴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승사적 관점에서 매우 다양하게 평가해 왔다. 불트만(R. Bultmann)은 이사야의 인용문을 들어 율법 학자들에 대해 논쟁하는 1-8절을 이 단화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여기에 마가가 전승사적인 교회 공동체의 논쟁인 9-13절을, “또 가라사대”(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통상적인 접속 공식으로 덧붙인 다음, 또 다른(가장 오래된) 전승 요소인 15절을 연결했다고 한다. 여기서 마가는 군중을 가르치신 것과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을 구별하였으며ㅡ이 구별은 마가에게 있어서 전형적인 것이다ㅡ18절 후반과 19절은 전승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끝으로, 20-23절은 마가 자신이나 “헬레니즘계의 저자”에게서 유래했다고 본다.
그와 달리, “디벨리우스(M. Dibelius)는 고르반 관습에 의한 넷째 계명의 위반에 대한 고발인 9-13절을, 손을 씻는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가장 오래된 통일된 단락으로 본다. 그 다음 단락은 15절의 내용인데, 17-19절과 20-23절은 이 15절에 대한 해설로서 15절의 철저성을 충실히 지키지 못한 교회 공동체의 가르침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1-5절은 마르코가 작성한 것이지만, 이사야 29:13을 적용한 6-8절은 다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들을 묶어 주는, 아마도 마르코 이전에 이미 작성된 연결문이라는 것이다”(J. Gnilka, pp. 350-351).
이러한 견해들 외에도 여러 견해가 있지만, 앞의 두 견해와 마찬가지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정확한 분석‧평가를 뒷받침해 줄 만한 근거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8절은 구조에 있어서 2:23-26을 상기시키는 논쟁 대화이다. 제자들의 행동에 관련된 적대자들의 구체적인 항의에 이어 구약을 인용하는 예수님의 원칙적인 대답이 나온다. “이 전승은 칠십인역에 의존한 이사야 문구 때문에 헬레니즘적 유다-그리스도교적 교회 공동체에 돌려야 하는데, 여기서 제기된 물음 역시 이 공동체에서 문제되었던 것이다. 2절과 11절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3-4절의 삽입구는 유다교를 멀리했던 이방 그리스도교적 청중으로 하여금 제기된 물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삽입구는 ‘모든 유다인’이라고 말함으로써 과장이 섞여 있고, 역사적으로도 옳지 않으며 어느 정도 공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여러 저자들이 이 삽입구를 마르코 이후에 작성된 각주로 보려 한다. 그러나, 이 삽입구가 5절로 이어짐으로써 2절의 이야기 줄거리가 5절에서 반복되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르코의 작성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J. Gnilka, pp. 351-352).
접속 공식인 “또 가라사대”로 미루어 마가는 전승으로부터 물려받은 9-13절의 단락을 첨가하였다. 그리고 마가가 14절의 도입구를 만들었거나 새로 형성했다 하더라도 군중을 가르치신 일과 제자들을 가르치신 일을 구별한 것은 마가 이전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긴 이야기가 여러 전승의 결합체이며, 특히 이방인 독자들에게 의식적 정결과 참된 의미의 정결인 영적‧도덕적 정결을 가르치기 위한 의도를 담은 것이라는 정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부정(不淨)의 문제(7:1-8), 부모 공경과 고르반(7:9-13), 그리고 부정(不淨)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7:14-23)로 구성되어 있다.
가. 부정(不淨)의 문제<7:1-8>
유대의 유전을 둘러싼 논쟁의 기사는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에 있어서도 심각한 문제이었다. 특히, 유대인 교인들에게는 유대의 유전이 어느 정도의 구속력을 갖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마가는 첫 단락(1-8절)을 【1】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로 시작한다.
바리새인들은 2:16의 주석을 보고, 서기관은 1:22의 주석을 보라.
이 구절 첫머리의 의미는 (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모두가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일 수도 있고, (2) 바리새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으나 서기관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테일러( Vincent Taylor)는 후자를 취하지만, 일반적으로 전자를 취한다.
지방의 교권자들의 요청(J. Gnilka, p. 354, 마경일)과 산헤드린의 명령을 좇아 이 곳에 온 예루살렘의 교권자들(W. Hendriksen)은 지방의 종교 권위자들보다 더 엄격하고 정통적이다(F. C. Grant). 따라서, 그 학자들(교권자들)은 그 권위가 알려져 있었으며(J. Gnilka, p. 354), 어디를 가든지 굉장한 존경을 받았다(黑崎幸吉).
이들이 온 목적은 예수님과 그분의 일행에 대해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가가 예수께 대한 반대의 중심지로 예루살렘을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3:22).
적들의 정탐 행위가 이내 소득을 얻은 것에 대해, 마가는 【2】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라고 하였다.
부정한 손의 부정한은 코이나이스(κοιναίς)이며, 문자적으로는 ‘보통의’라는 뜻이다. 후기 헬라어에서는 ‘정상적인’, ‘통속의’, ‘선택 또는 신성한 것과 구별되는 세속적인’ 등을 의미하였다(E. P. Gould). 그러므로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었다는 것은 단순히 손을 씻었다거나 씻지 않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규례대로 씻었는가 규례대로 씻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위생적인 위반이 아니라 제의적인 관습의 위반에 대한 것이며, 그들의 경건성을 문제삼는 것이다”(J. Gnilka, p. 355). 누가복음 11:38에 의하면, 예수님도 제자들과 같이 행동하셨다.
부정한 손을 씻지 아니한 손이라고 설명한 것은 이방인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레인(W. L. Lane)은 주로 손을 씻는 것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하였다.
밀접한 병행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Letter of Aristeas ■ 305)에 있다. “모든 유대인들의 습관과 같이 손을 씻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씻어야 한다는 성경적 명령(출 30:19, 40:13)은, 팔레스틴과 디아스포라 유대교에 의식적 씻음이 널리 퍼진 관행이었다는 것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준다. 적어도 주전 2세기밖에 안 된 이른 때에 많은 유대인들은 자발적으로 제사장들의 정결법을 취해 아침 기도 전에 규칙적으로 손을 씻었다(E.g. Judith 12 :7 ; Letter of Aristeas ■ 305 ; Sibyline Oracles III. 591-593). 이어 드리는 감사 기도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신도를 위한 것이었다. 즉, “오, 주여, 우주의 왕이시며, 율법으로 우리를 성결케 하시고, 손을 씻도록 명하신 당신께 감사하나이다”(TB Bearchoth 60b).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은 또한 제사적 관행에 근거되었다. 매일의 음식은 마치 그것이 제사적 음식인 것처럼 먹어야만 한다는 확신에서 주후 3세기에는 씻지 않고 먹는 것은 강력하게 단죄되었다(TB Bearchoth 62b).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도 명백한 경향이었던 것 같다. 바리새인들은 의식적 부정에서 자기들을 보존하는 열심에 있어서 제사장들을 능가했고, 제사적 규정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의무로 고려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신자의 제사직’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들이었다(레 20:26).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엄격한 훈련이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에 필요한 전조가 된다고 확신하였다(E.g. TB Nazir 23b : “사람으로 율법을 배우게 하고 불순한 동기로라도 계명들을 준수케 하자. 이는 때가 되면, 그가 선한 동기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레위적인 정결 예법에 대해서는 그닐카(J. Gnilka, p. 355)가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유다교의 레위적인 정결 예법은 오늘날에는 실행하기 어려운 종교적 관행이다. 이 예법은 구약성서-유다교만이 아니라, 수많은 고대 종교에서 발견되는 사람‧짐승‧기구‧일 등에 있어서 청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을 전제한다. 처음에 이런 구별을 할 때에는 하나의 표상이 있었는데, 그 표상이란 인간이 거룩한 것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고양된 상태에 있어야 하며, 신성을 손상하거나 신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들에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예비적인 정결 행위로써 인간은 신과 만날 수 있는 정결하고 거룩한 상태를 부여받게 되며, 속죄하는 정결 행위를 통해 부정한 것과의 접촉에 의해 상실될 수 있는 이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레위기 11-15장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구별되어 있으며, 성교, 임신, 질병들로 인해 생긴 부정한 것들이 언급된다(레위 11:19, 23-25, 신 14:3-21, 19:5, 1-4). 이 규정의 중심에는 이스라엘이 거룩하고 깨끗한 땅에 사는 거룩하고 정결한 백성이어야 한다는 사상이 담겨 있지만(레 20:7), 거룩을 물질적으로 규정한 데서 빚어지는 위험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다. 레위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은 부정한 인간이나 부정한 사물에 물질적으로 덧붙어 있으며, 따라서 씻거나 물을 뿌리거나 물에 담금으로써 벗겨낼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레위적인 정결이 윤리적인 정결의 상징이 될 수도 있지만, 특히 예언자들은 표면적인 레위적 정결 요구에 항거하고, 그 요구를 문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예수는 이렇게 비판함으로써 예언자들의 계열을 이어받고 있다.
예수 시대에 유다교에서 행한 정결을 위한 관행에 대해, 우리는 쿰란 문서를 발견한 이래 보다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바리사이파의 관행에 대해서는 불완전한 지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에쎄네파에서도 바리사이파에서도 사제의 관습과 습관을 일반인들에게까지 적용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제의적으로 씻는 일과 목욕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미쉬나에서는 열 두 장 이상(전체의 마지막 부분)이 정결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A.D. 70년 이전의 시기를 추론할 수 있다. 부정의 다양한 정도에 대해 결론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부정하게 하는 그릇들과 기구들이 언급되어 있고, 물을 담는 정도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구별되어 있다. 세부적인 규정들이 종교인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윤리적인 정결이 제의적인 정결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보다 많은 자유를 주장하는 증언들도 찾아볼 수 있다.
에쎄네파는 외부 사람들의 정결을 인정치 않았으며, 그 서열에 따라 에쎄네파 사람들은 정결의 상이한 단계에 속한 것으로 구별되었다. 오늘도 쿰란 유적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이 제의적인 공동 식사를 하기 전에 사용했던 목욕탕 시설을 살펴볼 수 있다. 레위적인 정결을 강조하면서도 사람들은 생활 태도의 갱신이 절실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호수나 강에서는 자신을 성결케 할 수 없으며 어떤 물로 씻어도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없다. 하느님의 법을 무시하고 그의 권고를 따라 정숙하게 살지 않으면 그는 부정한 상태에 남아 있게 된다”(종도의 규례 3, 4-6). 율법학자들에 의해 확정된 식탁에서 손을 씻는 일은 식사 전과 식사 후에, 경우에 따라서는 식사 도중에 행해졌으며 사제들의 성전 식사에서 점차 일반 식사에서까지 행해진 것으로 설명된다. 손을 씻지 않는 사람은 레위적으로 부정하게 된다. 이 습관의 근거를 대기 위해 사람들은 레위기 15장 11절을, 특별한 경우에는 레위기 20장 7절을 내세운다. 사람들이 관습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는지는 감옥에서 손을 씻지 않고 먹기보다는 차라리 굶기를 바랐던 라삐 아카바의 이야기가 잘 말해 준다.
마가는 계속해서 부정한 손에 대해, 【3】(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유대인들의 모든(판테스, πάντες)이라는 관형사는 성경에서 종종 그러하며, 오늘날의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그러하듯이 막연하게 사용되고 있다. 즉, ‘아주 많은’, ‘대다수의’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W. Hendriksen).
“실제로,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규정을 준수했고, 일반 백성은 이 규정들에 대해 방관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더군다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사제들의 관습을 일상적인 종교 생활에까지 적용하는 데 대해 항거하였다”(J. Gnilka, pp. 356-357).
장로들의 유전의 장로들은 프레스뷔테론(πρεσβυτέρων)이며, ‘옛 사람들’, ‘조상들’, ‘노인들’, ‘선조들’을 의미한다.
장로란 원래 ‘늙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었으며, 따라서 장로의 권위의 참 근원은 나이에 있었다. 장로란 연장자(욥 32:4)나, 한 가문의 어른(창 10:21)이나, 한 지파의 장(레 4:15)에게 적용된 명칭이었다. 장로는 씨족 사회, 또는 부족 사회의 권위 있는 존재이었다(출 18:13-). 신명기 1:13에는 관원으로 되어 있으나, 출애굽기 18:12에는 이미 이 같은 관리들이 선출되기 전에 장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민수기 11:16 이하에는 이스라엘 노인 중에 관원인 장로들 중에서 70인을 선정하여 이스라엘의 장로회를 구성한 것을 말하고 있다(비교 : 출 24:1, 9). 그들은 전투 지휘자, 논쟁의 재판관, 충고와 권면자, 혹은 행정상의 증인 등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대표하는 공동체의 초점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레 4:13-21, 신 21:1-9).
{“그 후부터 장로는 유대인 생활의 전통적인 특색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예언자의 친구로서의 장로(왕하 6:32)나, 왕의 충고자로서의 장로(왕상 20:8, 21:11)나, 국가의 정사를 맡아보는 행정관들의 동료로서의 장로(에 10:8)를 찾아볼 수 있다.......장로들은 회당의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설교는 하지 않았으나 회당의 행정과 질서를 맡아보았고, 또 회원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였다”(W. Barclay).}(벧전 5:1의 주석).
신약 시대의 각 유대 공동체에는 장로회가 있었다. 디아스포라에서는 장로회를 보통 게루시아(γερουσία)라고 하였고, 장로들을 아르콘테스(ἄρχοντες)라고 불렀다. 물론, 장로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71명으로 구성된 의회인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이었다. 산헤드린(공회)은 유대 민족의 ‘절대적 법정’으로 봉사하였다.
{장로 제도를 가지고 있던 민족은 유대만이 아니었다. 스파르타의 지도층은 ‘장로회’란 뜻인 게루시아(γερουσία)라고 불렸다. 로마의 의회는 ‘원로원’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노인이라는 뜻인 세넥스(senex)에서 유래되었다. 영국에서는 공동체의 사항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장로들’이란 뜻인 알더멘(aldermen)이라고 불렀다. 신약 시대의 애굽에는 어느 마을에나 공동체의 문제를 처리하는 장로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장로에는 오랜 역사가 있었으며, 거의 모든 사회에 장로와 같은 지위가 설정되어 있었다(W. Barclay).}(딤전 3:1의 주석).
{“소아시아에서도 협의회의 회원들이 장로들이라고 불렸다. 심지어 이교 세계의 종교 단체들에도 훈련을 책임진 ‘장로 제사장들’이 있었다. 우리는 소크노파에우스(Socnopaeus) 신전에서, 지나치게 머리를 길게 기르고, 양의 털옷을 입었기 때문에 비난받고 있던 어떤 제사장의 문제ㅡ제사장은 여자 같이 하는 것과 사치의 죄를 범해서는 안 되었다ㅡ를 처리한 ‘장로 제사장들’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W. Bar- clay).}(약 5:14의 주석).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교회가 ‘장로’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전부터 유대 세계나 그리스와 로마 세계 등에서 명예로운 칭호로 사용되고 있었다.
교회의 장로직은 유대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처음 얼마 동안은 나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장로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러다가 교회가 점점 부흥하게 되니까 조직적인 교회 관리와 지도를 위해 장로 제도를 만든 것 같다. 그러나, 교회의 장로들이 처음 임명된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이스톤(B. S. Easton)은 “야고보서의 말씀(약 5:14)은 장로들의 통치 아래 있는 교회의 공적 조직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다.”라고 하였다. 깁손(E. C. S. Gibson)은 “장로 제도의 시작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장로들은 사도행전 11:30에 이미 있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행전 14:23에서,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첫 선교 여행 때에 설립했던 모든 교회 안에 장로들을 임명했다는 것을 안다.”라고 하였다[참조 : 딛 1:5]. 간혹 사도들이 자신들을 장로라고 부르기도 했지만(벧전 5:1), 일반적으로 장로는 사도들보다는 낮은 지위(이상근)로서 교회를 대표하는(黑崎幸吉, 박윤선) 지도적 위치를 가진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다(J. Calvin, M. Henry, R. R. Williams).}(약 5:14의 주석).
장로들의 임무는 병자를 심방하여 기도하고(약 5:14), 교훈과 권면을 해 주고(롬 11:8, 살전 5:12), 가르치는 일을 힘쓰고(딤전 5:17), 재정 관리를 하고(행 11:30), 다스리고 심령을 돌보는 것이다(행 20:28-29).
여기의 장로들은 힐렐이나 샴마이 같은 고대의 율법 대가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전은 파라도신(παράδοσιν)이며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교리’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기록된 율법과 더불어 구전으로 전하게 한 구전법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오히려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전자가 물이라면 후자는 포도주와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 구전은 모세가 먼저 아론에게 전하고, 아론은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또한 12지파의 대표인 72인에게, 그리고 72인은 각 족장에게, 그들은 모든 회중에게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구전은 주전 66-70년경에 바리새인들에 의해 성문화되어 미쉬나(Mishna)라 불렸으며, 유대 민족의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다(마 15 :2, 6 막 7:3, 13, 살후 2:15).}(골 2:8의 주석). 그러나, 예수님은 유전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으셨다.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의 부지런히는 Δ 사본에는 생략되었고, A, B, K, L, X, Θ, Π 사본 등에는 퓌그메(πυγμῇ : 주먹)로 되어 있고, א, W 사본 등에는 퓌크나(πυκνά : 흔히)로 되어 있다. “이 낱말은 (1) 손목까지, (2) 주먹을 둥그스레하게 쥐고 손바닥 안으로 문대는 것, (3) 물을 손 하나 가득히 담아서, (4) 미리, (5) 열심히, 또는 자주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이 번역은 (5)에 의한 것으로, 후자를 따른 것 같다”(黑崎幸吉).
헨드릭슨(W. Hendriksen)은 탈무드의 소 논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손이 부정해지고 정결해진다 함은 손목까지 그러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 되는가? 그가 손에 물을 부을 때에 손목까지 붓고, 두 번째로는 물을 손목에 넘게 붓고, 다시 손으로 흘러내리게 했다면, 손들은 역시 정결하게 된다.”
{반즈(A. Barnes)는 “그들은 씻는 일에 관하여 여러 가지 어리석은 규칙들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사용하는 물의 양, 그 물을 사용하는 방법, 물을 바꾸는 횟수,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수 등 세세한 규칙들을 만들었다.”라고 하였다.}(마 15:2의 주석).
이어서 마가는 【4】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라고 하였다.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의 물을 뿌리지 않으면(메 란티손타이, μή αντίσωνται)은 א, B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 A, D, K, W, X 사본들에는 “목욕하지 않으면, 침수하지 않으면, 물에 담그지 않으면”(메 밥티손타이, μὴ βαπτίσωνται)으로 되어 있다. 어느 쪽을 취해 어떻게 의역하든 간에 요지는 손을 물에 담가 씻지 않는 것(J. Wesley, W. Hendriksen, “Lightfoot”)이나, 전신을 물에 담가 목욕하지 않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바로 앞에서 손을 씻는 것에 대해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레 14:8, 9, 15:5, 6, 8, 10, 11, 13, 16:4, 24, 26).
그닐카(J. Gnilka, p. 358)는 “제의적으로 쉽게 부정탈 수 있는 시장(저자)에서 돌아온 유다인이 하는 전신 목욕이 그들의 정결 관행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로 제시된다. 이것은 좀 과장된 것 같다. 그러나, 디아스포라의 몇몇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해 주는 일들을 특히 강조했을 수 있다. 유딧(Jdt) 12장 7절과 시빌리넨(Sib) 3장 591절 이하가 이것을 확증해 줄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정결 의식은 식기와 가구에까지 미쳤다(2절의 주석을 보라). 이러한 정결 예법에 대해, 黑崎幸吉은 “이러한 습관 그 자체는 위생적으로 좋은 습관이었으나, 양심상의 선악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문제도 아니다. 이 양자를 혼동하여 형식만으로 하나님에게 용납되리라고 생각하는 점에 대하여 예수는 반대하셨다. 그 때문에 위생적인 좋은 습관조차도 무시하셨다.”라고 올바르게 결론짓고 있다.
3, 4절의 삽입 설명을 마친 마가는 다시 2절로 돌아가서, 【5】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하였다.
이 질문은 제자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예수께 대한 질문을 빙자한 혹독한 비난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가는 【6】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하였다.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예수님의 답변이다.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내세우나, 예수님은 예언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워 논박하셨다. 인간의 전통과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 인간적인 선과 하나님의 선, 종교적 형식주의와 종교적 내용, 종교적 위선과 종교적 사랑 등의 대립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서슴지 않으시고, 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비판하신 것이다.
외식하는 자 곧 위선자는 휘포크리톤(ὑποκριτών)이며 원래는 무대의 배우를 가리켰다. “현대의 전자 증폭 체계가 없었던 당시에는 배우들이 자기들의 소리를 25,000명이 앉는 관람석 전체에 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확성기를 숨길 수 있는 커다란 가면을 썼다. 이와 같이 위선이란 가짜 얼굴을 쓴 사람을 가리켰다. 따라서, 그는 본래의 자기가 아닌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R. Earle). 즉, 자기의 악하고 불의한 의도를 숨기거나 가장하고, 칭찬과 유익을 얻기 위해 위선적인 언행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의 전통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에 위선자들이다.
너의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이사야 자신의 시대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그 자신의 때의 유대인들에게도 적용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D. W. Burdick).
기록하였으되는 이사야 29:13(비교 : 겔 33:31)을 가리키는 것인데, 인용된 내용과 히브리 원문이나 칠십인역과는 약간 다르다. 당시의 회당에서 널리 사용된 탈굼(구약성경의 아람어 역)에서 인용했거나, 혹은 예수님 자신의 자유로운 인용일 것이다. 그 요지는 마음에도 없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p. 359)는 “적대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에서 대립되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고백과 진심으로 드리는 공경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공경과 인간의 계명이다.”라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7】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들은 본래 신적인 교리들을 가르치는 듯이 가장하나, 실제로는 사람의 계명, 즉 자질구레하게 세분하며 형식에 구애되는 고대 랍비들ㅡ단지 인간에 불과한 이들!ㅡ에 의해 주장되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진 하찮은 규례와 규칙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마 6:2, 5, 16, 23:23-28)”(W. Hendriksen).
또한, 그들은 입술로는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제자들의 위반을 염려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예수님의 비판의 결론에 대해, 마가는 【8】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계명이란 인간의 말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전달자의 말을 통해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인간(장로 곧 고대 랍비)의 말만을 중히 여겨 지켰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이 잘 설명하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인간의 유전에 불과한 것을 하나님의 계시 위에 올려놓고, 인간이 만든 규례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위에 올려놓는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랍비들은 모세의 율법 또는 토라를 613가지의 독립된 법령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그 중 365가지는 금지 조항으로, 248가지는 지시 조항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그들은 그 각각의 법령에 관하여 자의적으로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구별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모든 행위를 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규제하려고 시도했었다.......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법령을 늘리고, 그러한 법령들을 구체적인 삶의 정황에 적용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훈계에 훈계를 더하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였다(참조 : 사 28:10, 13). 그렇게 하기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통일성과 목적(신 6:4, 레 19:18, 미 6:8. 참조 : 막 12:28-34)이 완전히 상실될 때까지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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